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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한데 제가 일반인이라서요-48화 (48/175)

제48화

근데 그 유명한 일소검이 왜 이 시간에 이 동네 버거왕에 있을까?

의문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얘는 왜 이 동네 버거왕에 있지? 핑거킹은 알아도 우연은 모를 텐데, 심지어는 우연희도 모를 텐데 왜 말을 걸지?

“혹시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들린다거나 하지 않으세요?”

그리고⋯⋯ 왜 이렇게 도쟁이 같은 질문을 하지?

그냥 모든 게 의문이었다. 지금 이 시간에 여기 있는 걸 보니까 새벽 때려치우고 도쟁이로 전직했나.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일소검을 쳐다보았다. 일소검은 자기도 다짜고짜 그런 말을 내뱉은 게 부끄러운지 고개를 아래로 살짝 떨궜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급해서.”

급한 거야 뭐, 그래 보이시네요. 나는 대수롭지 않게 입 안에 감자튀김을 던져 넣었다. 일소검은 내 반응에 약간 당황한 눈치였다.

“아, 저기⋯⋯.”

“도 안 믿어요.”

“예?”

“대출도 필요 없어요. 보험도 필요 없고요, 각성 물약도 필요 없거든요. 사이비 종교는 더욱 사절이고요.”

국내 최대 사이비 종교 단체 교주도 만나 봤는데 사이비 종교 같은 데 넘어가겠냐. 교주 때려눕히고 교주하면 그만인데.

물론 일소검은 새벽 길드 소속이니 낙원 측과는 사이가 썩 좋지 않을 거다. 게다가 얘는 특성 때문이라도 제법 멀쩡한 편이거든.

초면에 반말 찍찍 안 갈기는 것 봐. 당연한 예의인데도 안 지키는 헌터가 더 많다니까?

“제 오붓하고 평화로운 식사 시간을 방해하실 생각이라면 얼굴이라도 공개하시는 게 어떨까요? 잘생겼으면 그대로 앉아 계셔도 봐 드릴 의향이 있거든요.”

나는 손에 턱을 괴고 일부러 재수 없게 말했다. 당연한 예의도 안 지키는 헌터, 그게 바로 나다.

예의도 갖다 팔았는데 초면에 재수 없게 말하는 게 뭐가 대수라고. 나는 일소검이 두 번 다시는 나와 마주칠 일 없도록 최선을 다했다.

우연인 걸 알아서 접근한 건지 손가락테크닉인 걸 알아서 접근한 건지는 모르겠다만, 좋게 말로 할 때 돌아가라. 우연이든 핑거킹이든 새벽 놈들이랑은 얽힐 일 없다고. 네놈들 윗대가리가 맨날 킹받게 하잖아.

“와, 재수 없어.”

옆자리에서 저런 소리가 나올 정도로 재수 없었다. 나는 새로 발견한 내 재능에 뿌듯함을 감추지 않으며 웃었다. 이 정도면 물러가겠지. 화나고 부끄러워서라도 물러가는 게 정상 아니냐?

“그러면 제 얘기 들어 주실 건가요?”

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강적이다. 대뜸 질문을 던진 일소검의 레몬색 눈이 결연하게 빛났다.

이런 놈들은 대체 왜 이렇게 끈질긴 거지?

나는 타고난 인상으로 도쟁이를 비롯한 온갖 종류의 무뢰배들에게 시달려 온 인간으로서 진지한 고민에 빠졌다.

역시 얼굴을 어떻게든 해야 하는 건가. 뭘 하든 쉽게 물러가지 않으니까 처음부터 차단해야 하는 건가.

띵동.

주문 번호 뜨는 모니터에 새로운 번호가 떴다.

그러고 보니 얘도 아까 들어오면서 주문하고 왔지. 나는 눈을 슬쩍 굴려 일소검을 보았다.

그 또한 소리를 들었는지 화면을 향해 고개를 들고 있었다. 손가락 사이에 낀 영수증에 있는 번호와 화면에 뜬 번호가 같다.

“⋯⋯잠시만 기다려 주실래요?”

자기가 생각해도 절묘한 타이밍이었는지, 일소검은 타임 스탑을 요구했다.

하지만 도쟁이를 비롯한 온갖 무뢰배들과의 싸움은 먼저 떨어져 나간 놈이 진 것. 나는 그가 자리를 뜬 사이에 감자튀김을 입 안에 마구 욱여넣었다.

햄버거는 들고 튀자.

탄산음료? 그건 편의점 가서 사면 돼!

나는 빛의 속도로 식사를 끝마치고 총알처럼 매장 밖으로 뛰쳐나왔다. 아이고, 이걸 어쩌지. 도망쳐 버렸는데.

무슨 일이든 중요한 건 아니었겠지. 새벽 측에서 내게 전할 중요한 일이 있다면 반서준이 직접 전했을 테니까.

그럼 남는 건 일소검 개인의 일인데, 그건 내가 시간 할애하면서 들어 줄 이유가 전혀 없다. 오히려 얽히면 피곤해질 거야. 그럼 인생이 피곤해진단 말이지.

나는 오른손으로 어깨를 통통 두드리며 왼손에 든 치즈버거를 먹었다. 오늘은 집에 일찍 가서 마님한테 빌어야지. 쇤네가 잘못 했습니다요. 어떻게 마님 눈에서 눈물을 보이게 만들었는지! 제가 아주 대역죄인입니다!

입방정으로 완성된 한 편의 드라마가 머릿속에 촤르륵 펼쳐졌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집으로 돌아가던 그때의 나는 미처 몰랐다.

저 짧은 만남으로 일소검이랑 얼마나 지독하게 얽히게 될지 말이다.

* * *

사람을 괴롭게 하는 건 꾸준함이다.

하루 공부하는 거? 쉽지. 하루 운동하는 거? 당연히 쉽다.

다이어트는 늘 내일부터고, 시작해도 하루 이틀이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겠다고 다짐해도 하루 이틀, 자기 계발을 해 보겠다고 다짐해도 하루 이틀.

작심삼일이란 말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꾸준히 하는 건 무엇이든지 어렵고, 존경받아 마땅한 일이다.

하지만.

“아! 저기요!!”

그게 남에게 피해를 주는 방향으로 틀어지면 말이 조금 달라진다.

나는 레몬 사탕 같은 눈을 빛내며 달려오는 일소검을 피해 달렸다.

저 새끼 대체 언제까지 저래? 아! 얘기 안 한다고! 그만 귀찮게 하라고!

욕지거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나는 어제 예솔이한테 신세타령을 했다가 들은 말을 떠올렸다.

경찰에 스토커 신고하라고 했지. 근데 쟤는 헌터잖아. 작정하고 숨으면 경찰은 못 찾는다고.

이에는 이, 헌터에는 헌터. 헌터를 상대할 땐 헌터로 상대해라. 그런데 평범한 일반인이 부를 수 있는 심부름센터의 각성자는 등급이 좀 낮다. 정말 높아도 D 정도?

그런 헌터가 새벽 길드 제1공대 근접 딜러를 어떻게 이겨. 죽었다 깨어나도 못 이긴다. 다시 태어난다면 모를까.

차라리 저쪽이 내 정체를 알고 있다거나 하면 대화가 좀 편한데, 저번에 떠들던 거 보면 각성한 줄도 모르는 것 같고.

하긴 우연으로도 모두한테 얼굴 깐 건 아니었으니 모를 만도 하지.

새벽에 들어간 것도 아니고, 다른 길드에 들어간 것도 아니고.

어느 길드든 S급 들어왔다 하면 홍보 빠방하게 때렸을 테니 그랬다면 저쪽도 모를 일은 없었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개인 사정으로 가입을 조금 미루고 있으니까.

나는 폭풍처럼 쏟아지는 멜팅하트의 메시지를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본부의 TF가 출동하기 전에 얌전히 본부로 오라는 경고였는데, 본의 넘치게 무시하는 중이었다.

위에서 갈구니까 화난 건 알겠는데, 그래도 거길 제 발로 기어들어 가긴 좀.

가면 차원 학회 노인네들도 기어 나올 텐데, 그럼 쓸데없는 질문도 끝없이 받을 거고. 저번에 폭탄 하나 터뜨리고 왔거든.

일단 지금은 등급 외 게이트 대책 방안을 내놓는다고 바빠서 이쪽으로 신경을 못 쓰는 것 같지만, 조만간 끌려가긴 하겠지.

그렇게 되면 우연 단말기를 빼앗길 수도 있다.

극적인 협상을 할 수도 있긴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극적인 거니까.

그래서 나는 길드 가입을 쭉쭉 미뤄두고 있었다.

돈은 그때 건물을 냉큼 받은 고로 급하지 않고. 사실 이렇게 평생 백수로 먹고 살아도 될 것 같기는 한데.

“잠시만요! 제 얘기 좀 들어 주세요! 이상한 얘기 아니에요!”

그랬다간 마님이 쓰레기 보듯이 보겠지. 역시 다른 방법을 고안하자. 나는 가볍게 결론을 내며 집 근처 서점으로 뛰었다.

한 건물 안에 있는 2층짜리 서점인데, 상식 박힌 현대인이면 서점 안에서까지 소란을 피우진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역 한 개 거리에 있는 백화점, 집 근처 공원, 제법 큰 캐릭터 스토어, 사람 북적북적한 거리와 동네 카페.

‘저기요!’

‘잠시만요!’

‘죄송한데, 제 말 한 번만⋯⋯!’

그동안 집 밖으로 나돌아다닐 때마다 끊임없이 일소검과 마주쳤다. 이 정도면 진짜 스토킹 하는 거 아닌가 고민이 들 만큼 마주쳤다.

상식적으로 이건 스토킹 아니면 운명이라고밖에 설명하기 힘들었다. 상식적이다 못해 지나가는 개미가 봐도 인정한다면서 고개를 끄덕여 줄 상황이었다.

경찰에 신고도 못 하는 스토커라니. 세상은 참 부조리해. 각성자가 이렇게나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데 잡아가지도 못하고.

그래서 PK 같은 쓰레기가 나도는 거 아니야.

물론 그 자식은 하는 일만 보면 쓰레기도 아니고 핵폐기물이었다.

원래 힘 있고 상식 없는 놈이 세상에서 제일 무섭다. ⋯생각해 보니까 PK 부르면 해결되는 일이었잖아?

둘 다 비슷한 수준이고, 염동력이면 접근도 못 하게 만들 수 있을 텐데.

나는 서점 안으로 몸을 날린 뒤 맨 구석에 처박혀 단말기를 꺼내 들었다.

[멜팅하트] ▶ 제발 확인 좀 하시라고요 (999+)

[PK] ▶ 쉬운 일이니까 걱정 말고 (3)

[루트] ▶ 시제품 나오면 연락드리겠습니다

[네가정말좋아] ▶ 이모티콘을 보냈습니다.

[버블버블] ▶ 파일: 차원 학회 정기 보고.pdf

손가락테크닉 단말기로 오는 연락은 늘 오는 사람들한테만 온다. 멜팅하트 메시지는 언제 저렇게 쌓였지. 신경도 안 쓰고 있어서 몰랐다.

[PK] ▶ 이번에 새로운 협력자가 생겼어. 그런데 무턱대고 믿긴 어려운 생물이라서 이쪽도 방비를 해 보려고.

[PK] ▶ 그러니까 곧 열릴 돌발 게이트에 다녀올래?

[PK] ▶ 쉬운 일이니까 걱정 말고

나는 PK의 메시지를 눌러 용건을 확인했다.

돌발 게이트? 이 근처에 곧 돌발 게이트가 생긴다고?

이 인간이 그걸 어떻게 알아?

등급 외 게이트가 등장하며 예전보다 더 야생이 된 세상.

돌발 게이트는 그 세상을 살아 나가는 인간들의 일상이 되었다.

예전에는 협회가 출몰 공지한 게이트를 헌터들이 점찍었지만, 요새는 불쑥 등장한 게이트에 헐레벌떡 달려가는 식이었다.

감지된 게이트가 1개라면 감지할 새도 없이 튀어나오는 게이트가 5개. 안 그래도 부족한 헌터 수요가 급증했다.

공무원 헌터들의 과로사 위기는 길드들이 인명 보호 및 국가 수호를 들어 구역을 나누며 일단락되었지만, 그들이 상시 대기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은 위기를 직감했다. 아무리 안전 불감증이라도 그렇지, 돌발 게이트가 옆 동네에 열리다 못해 우리 동네에 열리는데 어떻게 하하 호호 지내겠는가.

지구가 멸망해도 출근할 것 같던 사람들이 눈에 띄게 동요했다. 나는 새 시대의 난장판을 겸허히 받아들였다.

대중교통 광고판 또한 다른 방향으로 발전하는 거 보니 아주 잘 적응한 모양이었다.

당신도 각성자가 될 수 있다는 광고가 하루에도 수십 개씩 보이는 진정한 의미의 21세기! 이것이 바로 K아포칼립스다!

해 줄 테니까 사람 하나 처리해 줘. ◀ [손가락테크닉]

그리고 얘기 나누고 싶으면 스토커부터 떼어 내야 할 것 같은데. ◀ [손가락테크닉]

나는 책을 아무거나 집어 그 사이에 고개를 파묻었다. 빛이 새어 나오는 단말기 화면에 PK의 답신이 떠오른다.

[PK] ▶ 스토커? 네 뒤꽁무니 쫓아다니는 그거?

[PK] ▶ 최선을 다해 볼게. 일단 15초 안에 그 건물에서 나와 봐.

15초 안? 15초 안에 이 건물에서 나가려면 창문 깨고 뛰어내리는 수밖에 없는데.

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지 않고 창문가를 흘끗 보았다. 채광을 위해 일부러 크게 만든 창은 사람 하나가 뛰어내려도 충분할 크기였다. 벌써 2초가 지났으니까, 하람을 따돌리고 15초 안에 이 건물에서 벗어나려면.

“저기요.”

확실히 저 창을 부수고 뛰어내려야겠다.

젠장, 무슨 호랑이야? 생각하자마자 오게.

나는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단말기 화면을 숨겼다. 뛰어왔는지 마스크가 묘하게 비뚤어진 일소검이 숨을 고르고 있었다.

“제 말 한 번만 들어 주시면 안 돼요? 저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 보세요.”

그래도 공인이라고 얼굴은 공개 안 하던 그가 이때라는 듯이 모자랑 마스크를 냉큼 벗었다.

평일 오전이라 매장 안에 사람이 별로 없다는 점을 고려한 거겠지.

[PK] ▶ 맞다.

[PK] ▶ 15초 안에 거기서 나오라고 한 이유가 말이야.

“저는 새벽 길드 소속 헌터인 하람이라고 합니다. 혹시 요즘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거나 하지 않으세요? 아니면 환청이라던가.”

[PK] ▶ 지금 네가 있는 곳 근처에 또 다른 돌발 게이트가 열릴 거야.

[PK] ▶ 한

“또⋯⋯ 돌발 게이트에 자주 휘말린다던가 하는 일이요.”

[PK] ▶ 15초 뒤에?

삐이익-!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공기가 일렁거리며 이상을 알린다.

틀림없는 게이트의 징조. 나는 그걸 깨닫자마자 현대를 살아가는 모범 시민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기로 했다.

지금 중요한 건 하나였다. 당장 저 창문을 깨고 뛰어내리는 것.

나는 고개를 퍼뜩 들고 땅을 박찼다.

와장창-!!

창문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마지막에 본 것은 게이트가 건물을 집어삼키는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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