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화
“끄아아악-!”
누군가의 비명이 들린다.
거세게 진동하는 던전 내부는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교만왕의 뱃속에 갇힌 모두가 단 한 사람을 기다리며 소모전을 벌이고 있었다.
“유주하!”
액체가 새는 구멍을 새로 생성한 얼음으로 애써 틀어막은 러브리스가 네가정말좋아의 이름을 외쳤다.
그러자 안과 밖의 공간을 가늠하던 네가정말좋아가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변화를 막을 수는 없어. 여기 있는 인간 모두를 밖으로 빼낼 수도 없고.”
“그렇다면?”
“한두 명 정도면 가능해. 던전의 생성자와 내 급의 차이가 너무 커. 그 이상은 불가능해”
슈브라도 있었으면 모를까, 혼자서 공간을 접는 것은 무리다.
위기 상황 앞에서, 네가정말좋아는 빠른 판단을 내렸다.
늘 뇌를 빼고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네가정말좋아는 나름대로 제가 지켜야 할 적정선을 아는 사람 중 하나였다.
파격적인 행보와 거침없는 입담으로 만인의 적이 된 건 그가 그 정도는 감당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감당할 수 없는 인물인 손가락테크닉이나 극야 앞에서의 그를 보라. 개처럼 기지 않았던가?
“나가자.”
네가정말좋아는 짧은 순간에 모든 판단을 마치고 이 상황에서 취할 수 있는 최선의 결론을 뽑아냈다.
“그분이나 슈브는 알아서 살아남을 수 있어. 전하는 말할 것도 없지. 특급 게이트에서 혼자 살아 돌아왔으니까.”
특급 게이트를 혼자 닫고 귀환. 손가락테크닉 영웅담을 떠들 때면 가장 먼저 나오는 핑거킹 최대 업적이었다.
“여기 남아서 문제될 건 우리뿐이야. 우린 아직 쓰임새가 있으니까 여기 묻히면 곤란해. 제법 오래 공들인 물건이니 대체재를 찾기 어려울 거야.”
치이익-!!
신발 밑창이 녹아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상황은 위급했고, 미적거릴 시간은 없었다.
‘F급 판정을 받았죠?’
본능에 따르는 삶을 살았다. 원하는 것을 했다. 하고 싶은 것을 했고, 하고 싶지 않은 것은 하지 않았다.
‘내가 당신을 S급으로 만들어 줄게요.’
불길한 보랏빛 눈의 악마. 손을 잡은 건 결국 그였고, 이 또한 본능을 따른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전하의 세 번째 신하가 되어 주세요.’
미소 짓는 얼굴이 퍽 유혹적이다. 구제 불능인 F급을 S급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발언. 그걸 누가 믿을 수 있을까.
네가정말좋아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따라간 건 단순히 그 얼굴에 홀려 간 것뿐이다.
원래 다들 그렇지 아니한가. 아이들도 예쁘고 아름다운 것에 홀리는 마당에 다 컸다고 아닌 건 또 뭔가?
그는 이 사회가 공인하는 외모 지상주의 신봉자였다.
F급에서 S급이 되는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고. 그건 사이비 종교 교주가 아니라 사이비 종교 교주 아버지가 와도 못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말은 현실이 되었다.
“손잡아, 빨리.”
쓸모를 다해야 한다. 지금 이 자리에 그를 올려 준 건 그 사람이었다.
아니. 어쩌면 사람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은혜 갚은 까치도 있는데 은혜 갚은 사람이 없을 게 뭔가.
낙원의 대부분이 극야에게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 어떠한 구속도 없었지만, 다들 지독히도 맹목적이었다.
그 머리부터가 누군가를 위해 그렇게나 맹목적으로 구는데, 아랫사람들이 영향을 안 받을 수가 있을까.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물론… 그의 상사는 공인된 인류 최강을 무슨 자기 집 애완동물 보듯이 보긴 했지만 말이다.
열심히 설명 듣는 손가락테크닉을 보는 눈빛이 얼마나 멍멍이 보는 견주 같던지.
저쪽에서 대놓고 시비를 걸어도 화난 멍멍이 보는 견주 같이 웃더라.
대충 뭘 해도 아이고, 우리 강아지~ 따위의 스탠스를 취한단 소리였다.
“아아악-!!”
이번엔 반대편에서 비명이 튀어나온다. 역시 흐르는 액체에 살점이 녹아내린 모양이다.
러브리스가 머뭇거리는 동안 잡생각이 길어졌다. 빌어 처먹을 러브리스.
네가정말좋아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로 욕을 했다.
말도 없이 무슨 짓을 하고 있나 했더니 새어 나오는 액체에 사람들이 녹지 않도록 마나를 펑펑 써 대는 중이었다.
“슬슬 그만하고 빼자고. 어차피 시간이 길어지면 여기서 다 죽을 건데 살려서 뭐 해.”
“조금이라도 더 살려 두면 방법이 나올 수도 있겠지.”
“저것들을 믿어?”
네가정말좋아가 미간을 좁힌 채로 묻는다.
생각하고 말하는 네가정말좋아라니. 일 년에 한 번 볼 법한 드문 광경이었지만, 러브리스는 놀라지 않았다.
“아니.”
그리고 휘둘리지도 않았다. 네가정말좋아는 F급부터 시작한 S급이지만, 그녀는 처음부터 고랭크를 받은 각성자였다.
“저것들을 믿는 게 아니야.”
고랭크 헌터들의 자만심을 그녀만큼 잘 아는 사람도 드물었다.
고랭크 헌터쯤 되면 다른 사람을 믿는 게 얼마나 멍청한 일인지도 알게 되는 마당에 그런 것조차 모르겠는가.
“그럼?”
짜증이 가득 묻어나는 네가정말좋아의 질문이 그녀의 귓가를 두드렸다.
러브리스도 알았다.
여기서 죽는 건 개죽음이고, 그녀가 쓰일 곳은 따로 있다는 걸.
대의를 위해서라도 여기서 죽는 일은 없어야만 한다.
하지만.
지금 들어온 이들은 이 나라 헌터계의 핵심. 장기적으로 봤을 때 그들이 하나라도 더 살아야 좋았다.
또 요즘 들어 많이 흐려진 이야기이긴 하지만, 생명은 그 존재만으로 소중한 거였다.
어디 가서 이런 소리 했다가는 틀딱이라고 놀림 받겠지만.
그리고.
“전하를 믿는 거야.”
그녀라고 믿는 구석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물론 손가락테크닉이 대중에 알려진 것처럼 무작정 덮어놓고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닌 건 안다.
그렇지만 그녀는 보았으니까.
그녀를 물리고 왕에게 대적한 그 사람의 등을 보았으니까.
끝내 홀로 죽은 모습마저도.
“너 누구야? 러브리스 아니지?”
네가정말좋아가 떨떠름한 얼굴로 묻는다.
저게 불경하게 또 저러네.
러브리스는 욱하는 마음에 입을 열었다가, 곧장 들려온 외침에 입을 도로 닫았다.
“네정좋! 거기 있냐!!”
놀랄 만큼 다급하고 놀랄 만큼 명쾌한 목소리였다. 러브리스는 고개를 돌려 대공동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있으면 빨리 이동할 준비해. 몬스터 쏟아져 나오기 전에 죄다 대피시켜야 하니까!”
“사람한테 대뜸 반말을 하면 어떡해.”
“아, 맞다. 계속 반말했더니 존댓말 하는 거 까먹음.”
여기 대체 왜 있는지 모를 PK와 그의 등을 밟고 있는 한 남자.
그녀의 본래 모습과는 백만 광년쯤 동떨어진 모습이었지만, 얼굴에 착용한 반가면이 그녀의 정체를 알렸다. 저건.
러브리스가 줄곧 기다렸던 이였다
* * *
한창 무너지는 중인 던전 안이었다. 상황은 이미 난장판이었고, 헌터들은 인간을 녹이는 액체를 피해 도망 다니고 있었다.
쿠구구궁-!!
거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거대한 진동이 대지를 뒤흔들었다.
“으아아악-!!”
“비켜! 거긴 낭떠러지라고!”
등 뒤로 거대한 그림자가 진 게 보였다.
젠장.
나는 평소에도 잘 쓰지 않는 점잖은 욕을 입에 담았다. 핏빛 영혼석이 손안에서 반짝였다.
“다들 주모오오옥!!”
목소리는 크게, 존재감은 요란하게.
핑거킹 하면 다들 떠올리는 푸른 불꽃이 허공을 춤췄다.
나는 순식간에 이쪽으로 쏠린 시선을 느끼며 씩 웃었다.
관종은 아니지만, 설레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보이십니까, 헌터 여러분?”
나는 손에 든 영혼석을 높이 치켜들고 흔들었다.
영혼석을 발견한 헌터들이 동시에 외친다.
“저건…!”
“영혼석이야! 핑거킹이 들어왔다는 게 사실이었냐고!!”
“다른 곳으로 간 녀석들 불러, 빨리!”
영혼석에 마나를 불어넣자 게이트가 정처 없이 흔들린다. 늘 보는 광경이지만, 게이트가 열리는 모습은 참 기이하기 짝이 없다.
열린 게이트 사이로 사람들이 우르르 빠져나간다. 나는 고개를 뒤로 돌리며 외쳤다.
“던전 무너지기 전에 빨리 꺼지라고!”
외치지 않아도 꺼질 인간들이지만, 외쳐 주는 게 도리 아니겠는가.
문은 열어 줬으니 됐다.
나는 프라가라흐를 쥔 채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곳곳에 찰랑찰랑하게 고인 액체에 녹아 죽은 사람들이 보인다.
서둘러 왔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문이 열린 이상 닫히지 않을 테고. 그렇다면 마지막에 나가면 되겠지.
나는 저 멀리에서 날아오고 있는 PK를 보았다. 너무 느려서 기다려 주기도 힘들었다.
“전하, 앞으로 모실까요?”
특성으로 바닥을 단단히 얼린 러브리스가 옆으로 와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어 거부 의사를 밝혔다. 사방을 채운 괴물들이 한데 모여 점점 커지고 있었다. 나는 그 기막힌 광경을 보며 말했다.
“기다릴 사람도 있고, 저게 습격할 때 막을 사람도 필요할 것 같아서요. 먼저 가세요.”
“으음, 그렇지만 전하가 행차하시는 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저런 거 백 명 데려다 놔도 전하 한 명만 못할 텐데요.”
“그럼 댁이 저거 막으시려고요?”
나는 점점 커지고 있는 괴물 덩어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순진무구하게 눈을 깜빡인 네정좋이 몽롱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뜸을 길게 들이는 거 보니 자기도 하기 싫은 모양이었다.
“⋯⋯전하가 원하신다면 이 한 몸 바쳐서,”
“정말 애쓰시네요.”
“충정이라고 해 주시면 안 될까요?”
그런 거 논하기엔 댁 민낯을 너무 많이 봤는데요.
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지 않고 러브리스에게 눈짓했다. 러브리스가 제법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네정좋의 옷깃을 당겼다. 켁. 목이 졸린 네정좋이 숨 막히는 소리를 냈다.
러브리스는 네정좋을 끌고 감으로써 빠르고 확실한 일 처리를 보증했다. 나는 그녀에 대한 신뢰가 차곡차곡 쌓이는 것을 느꼈다. 여기서 나가면 낙원에 한 번 더 들러야겠다. 교만왕과 계약, 그리고 편애의 정체까지.
물어볼 게 산더미였다.
나는 생각을 정리하며 고개를 뒤로 돌렸다.
아까 교만왕을 보며 눈이 망가진 탓에 괴물의 생김새가 뭉개져 보였다.
그땐 기겁하며 펄떡였지만, 지금은 상대할 수 있다. 업그레이드가 아니라 다운그레이드해야 상대할 수 있는 적이라니.
범상치 않다.
나는 거체를 향해 한 발 내디뎠다. 아니. 내딛으려고 했다.
“당신, 무슨 생각이야.”
탕-!
쏜살같이 달려드는 푸른 궤적이 보인다. 나는 손을 움직여 마나로 이루어진 탄환을 잡아냈다. 파스스 흩어지는 마나 덩어리가 하늘빛이었다.
탄환이 날아온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매섭게 뜬 하늘색 눈이 날 노려보고 있는 게 보였다.
무너지는 던전에서도 올곧게 서 있는 사람.
우리나라 망할까 봐 그토록 살리려고 애를 쓴 인간이다.
“밖으로 나갈 생각이 아니라 안으로 들어갈 생각인가?”
반서준의 시선이 거대한 괴물에게 닿았다. 괴물의 거대한 깃털 날개가 지상을 가볍게 쓸어내린다. 일대가 통째로 무너져 내렸다.
“같이 가지.”
철컥.
무기를 든 그가 불신 가득한 눈동자를 굴렸다. 가소로운 행동이었지만, 나는 너그러이 이해했다.
흠. 뭐 그럴 만도 하지. 제의한 거 걷어차고 택시비를 뜯어 가질 않나, 던전에서 코빼기도 보이질 않더니 갑자기 영혼석을 들고 나타나질 않나. 얘들은 밖에서 뺑이만 쳤을 거 아냐?
“왜? 내가 뭐 혼자서 이득이라도 챙기려는 것 같아?”
“당신은 말을 해도 꼭 그런 식으로 하지. 그렇게 생각했다면 실랑이는 하지도 않았어.”
“저번처럼 존경을 담아서 말해 보지 그러냐. 솔직하지 못한 게 컨셉이야?”
반서준의 얼굴이 완전히 구겨졌다.
나는 그가 내 턱 밑에 총기를 들이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더 놀렸다간 진짜로 쏠 것 같음.
“됐고, 집에 가서 발 닦고 잠이나 자라. 난 마지막에 나갈 거니까.”
“그러니까 굳이 왜-”
콰광-!!
거대한 굉음이 반서준의 말을 잘라먹었다.
괴물의 날개가 이 근방의 땅을 모조리 부쉈다. 나는 게이트가 열린 지점을 향해 쇄도하는 날개를 보며 그의 멱살을 쥐었다.
“다 나가기 전에 저걸 막을 사람이 한 명은 필요하다고 했잖아. 알았으면 먼저 가.”
두 눈을 부릅뜬 반서준이 내 손목을 꽉 쥐었다.
그러나 그의 특성은 응집과 관통. 근접전은 내가 이기는 게 당연했다.
나보다 훨씬 크고 단련된 몸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내가 당기는 대로 끌려왔다. 사람은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할 수 없다. 나는 그걸 잘 알았고, 그도 그걸 잘 알았다.
“너-!”
반서준이 와락 구긴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의 쫑알거림을 들어 줄 시간 같은 건 없었다. 아, 들어 줄 생각도 별로 없었다.
“다음에 또 보자고.”
나는 귀찮게 하는 찰거머리를 게이트 밖으로 집어던지며 말했다. 우리가 진솔하게 대화할 장소는 여기가 아닌 것 같다.
너는 멀쩡하게 나가서 꾸준하게 대표 노릇을 해 줘야지. 나는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렸다.
게이트를 향해 날아가는 반서준이 내 제스처를 보더니 악귀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린다.
이런. 당분간 잠자리가 사납겠는데. 돌아가는 길에 소금 사야지.
머리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졌다. 하얀 깃털 날개가 지면을 강타하기 위해 다가온다.
파직!
시퍼런 전류가 손바닥 위로 가볍게 튀었다. 나는 다가오는 날개를 향해 손을 뻗었다.
쿠르릉!! 쾅!!
이후, 눈이 멀 정도로 강렬한 낙뢰가 날개 위로 사정없이 내리꽂혔다.
어디서 구운 닭 냄새가 솔솔 났다. 그 닭이 진짜 닭을 말하냐면, 뭐 그런 건 아니고.
파지지지직-!!
단순히 남의 날개를 태우는 소리였다. 그래도 닭 날개랑 비슷하게 생긴 건 맞잖아.
“벼락 떨군 놈 누구야!! 눈깔 어디다 두고 다니냐!!”
“으악! 이모!! 예쁜 말, 예쁜 말!! 저기 손가락테크닉 있다고요!!”
고막 빠지게 시끄러운 소리 사이로 쩌렁쩌렁한 외침이 섞여 들렸다.
아직 빠져나가지 못한 헌터 중 사헌 소속 헌터가 있나 보다. 레나가 소리치는 게 들리는 걸 보면.
나는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홱 돌려 소리 지른 양반 얼굴을 확인했다. 이야, 저거 화룡 아줌마 서초동 친위대잖아. 거물이 들어오셨네.
“떨어진다! 떨어진다!! 이모, 오른쪽!!”
“소리 안 쳐도 다 알아!! 이모 귀청 떨어진다!!”
두꺼운 반구형의 실드가 주변에 미친 피해를 막는다.
후방의 피해가 전무한 건 이를 악물고 버텨 선 사헌의 두 사람 덕분이었다.
실드가 있으니 후방은 신경 쓸 필요 없겠지.
나는 벼락을 거두고 불꽃을 휘둘렀다. 전기 구이 통닭이냐, 아니면 불맛 화끈한 불닭이냐.
메뉴는 둘 중 하나였다. 물론 상대가
진짜 닭이냐고 하면 그건 또 아니지만.
콰앙-!!
군데군데 타서 얼룩덜룩한 날개가 다시 한번 지면을 강타한다.
나는 게이트 입구를 쓸어버릴 듯 밀려오는 깃털의 폭풍을 향해 대검을 휘둘렀다.
후웅-!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났다. 이윽고 대검과 정면으로 부딪친 날개가 쾅! 소리를 내며 파드득 떤다.
나는 그 여파로 뒤로 한껏 밀려나 실드에 부딪혔다.
와장창-!!
“내 실드 깨 먹은 놈 누구냐아아아!!”
“이모! 손가락테크닉! 손가락테크닉!! 고정하세요!!”
아이고, 미안하네.
한 번의 부딪힘으로 와장창 깨져 나간 실드 뒤로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게이트 앞에 있는 헌터는 세 명. 방금 두 명이 게이트를 넘어갔다.
다들 갔으니 이쪽도 더 남아 있을 필요는 없지.
나는 검을 아공간으로 던져 넣은 후에 사헌의 두 사람을 번쩍 들었다. 불길함을 감지한 레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손테 님, 설마 지금 하시려는 게⋯⋯?”
“나가면 이모님 모시고 병원이나 가라.”
나는 그대로 오른팔을 크게 휘둘렀다. 오른팔에 들려 있던 친위대 아줌마가 비명을 지르며 게이트를 통과했다.
그 광경을 본 레나가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팔다리를 마구 흔든다.
“악! 아악!! 저 다리 멀쩡해요! 저기까지 뛰어서 갈 수 있어요!! 던지지 마세요, 던지지 마시라고요!!”
“네가 달리는 것보다 내가 던지는 게 더 빠름.”
레나의 처절한 비명은 그렇게 게이트 너머로 사라졌다. 게이트는 아직 열려 있었으나, 던전은 싹 비었다.
싹 비었다고 하긴 뭐한가. 아직 PK와 인간 아닌 것들이 남아 있었으니.
굼벵이처럼 기어 오던 PK가 날갯짓의 여파에 휘청거린다.
나는 칠칠맞지 못한 비즈니스 파트너를 위해 한 번 더 불꽃을 휘둘렀다.
뇌가 딩딩 울린다. 아까 멎은 코피가 주르륵 흘렀다.
“문 닫혔어? 안 닫혔지?!”
“넌 눈이 없어? 저기 멀쩡하게 열려 있는 거 안 보이냐!”
“특급 게이트 닫고도 펄펄 날아다니던 애가 왜 이 모양이 됐어? 드디어 한물갔어?”
“너 처자는 동안 왕이랑 영혼의 맞다이 떠서 영혼석 가져왔다, 이 새끼야.”
나는 흐른 코피를 옷 소매로 문질러 닦으며 PK를 뻥 걷어찼다.
걷어차인 PK가 게이트 너머로 쑥 사라진다. 다시 한번 날개로 지면을 강타하는 괴물 뒤로 녹색 눈이 일렁거렸다.
저건 안 나가도 되나.
하긴 외계인 걱정해 줄 상태는 아니다. 내 몰골이 더 문제지.
[‘녹색 눈의 악마’가 당신의 배후자(背後者)가 되길 원합니다.]
정신없는 틈을 타 녹색 글씨가 한 번 더 떠올랐다. 나는 목을 휙 긋는 시늉을 하며 게이트로 몸을 던졌다. 게임 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