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화
찰칵.
시야가 돌아간다. 불 꺼진 방 안에 혼자 남은 것처럼 싸한 감각이 뒷덜미를 스쳤다.
나는 아직 감각이 없는 손을 쥐락펴락했다. 왼손 엄지에 아까 보았던 검은 반지가 자리 잡고 있었다. 낑낑거리면서 힘을 주어도 꿈쩍하지 않는 신개념 소재다.
【“돌아왔군.”】
나른한 목소리가 귓가를 두드린다. 나는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았다. 하얗게 새어 나오는 입김. 끝이 보이지 않는 구렁 안의 두 사람.
감당할 수 없는 존재를 시야에 담은 눈에 핏발이 섰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이를 악물었다.
단순히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토할 것 같은 압박감이었다.
저런 존재와 대등하게 대화를 나누려면 얼마나 강해져야 하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나는 내가 우물 안 개구리라는 걸 깨달았다. 확실히 인간은 너무 약했고, 차원의 융합은 아직 일렀다.
지독한 무력감이 어깨를 감쌌다.
【“귀환을 축하한다, 최초의 귀환자여. 하지만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와 다르게 네 격이 터무니없이 낮구나.”】
서늘한 무언가가 목선을 더듬었다.
나는 소름이 바짝 서는 것을 느꼈다. 귓가에서 누군가가 깔깔대며 웃는 소리가 들린다. 누군가가 귀에 대고 속삭였다.
계약하자. 그때처럼 계약하는 거야.
[‘녹색 눈의 악마’가 당신의 배후자(背後者)가 되길 원합니다.]
눈꺼풀 아래 까만 시야에 녹색 글씨가 천천히 떠올랐다.
아까부터 줄곧 떠오른 이상한 창이었다. 환영 안에서는 단말기가 작동하지 않으니 시스템 창이 떠오르지 않는 게 맞는데, 이상한 게 자꾸 보였었지.
단순히 넘겼는데 그렇게 넘길 게 아니었다. 이상한 게 따라붙었다는 증거였던 거다.
【“이상하게 말이 없군. 너는 이 재회의 순간이 기쁘지 아니한가?”】
꽉 쥔 손을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나는 눈을 번쩍 떴다가 붉은색과 녹색의 아스트랄 크리스마스 파티를 경험하곤 다시 눈을 감았다.
몹쓸 광경을 본 눈이 시큰거렸다. 과도한 뇌 사용에 코피가 주륵 흐른다.
녹색의 무언가가 다시 속삭였다.
계약하면 제대로 볼 수 있을 거야.
다시 함께 외우주를 거닐자.
힘을 되찾아 고대 신을 봉인하고, 왕을 무릎 꿇리고, 영토를 손에 넣고. 이번에야말로 유일한 왕이 되는 거야.
지독하게 끈질긴 목소리였다.
나는 검은 시야 한구석에 붙박인 계약 멘트를 무시하곤 입을 열었다. 다른 건 다 난장판인데 의외로 목소리만큼은 태연했다.
“집에 가고 싶은데.”
【“그 점만은 과거와 변함이 없군.”】
“할 말 다 했으면 던전 닫고 집에 좀 보내 줘라. 밖에 무고한 인간들이 있어요.”
지금쯤 저희 애들이 그 끔찍하게 생긴 것들이랑 쎄쎄쎄 하고 있을 거라고요.
그리고 본의 아니게 오다 버린 PK도 주워야 한다.
최선을 다해 찾아 주겠지만, 죽었으면 어쩔 수 없지. 고이 묻어 주는 수밖에.
나는 기억을 더듬어 PK의 사무실 위치를 확인했다.
교만왕은 왠지 말이 없었다. 귓가에서 울리는 목소리는 여전했다.
쟤는 인간 싫어해. 외우주 애들 다 인간 싫어해. 왠지 알아? 너 때문이야.
야, 넌 뭔데 자꾸 내 탓을 해. 난 오리지널 찐 인간이란 말이야. 외부 차원에는 발도 디뎌 본 적 없어요. 알아?
「“무슨 소릴 하든 그건 내 맘이지. 계약할 것도 아니면서.”」
계약할 것도 아닌 거 다 알면서 왜 들러붙냐. 나는 손을 대충 휘둘러 녹색 뭐시기를 쫓았다. 동시에 교만왕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꼴을 보니 차원 간섭이 심해졌나 보군.”】
나는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눈을 떠 앞을 보았다.
온통 붉은 시야에 녹색의 무언가가 붕붕 떠다니고 있었다.
주변을 채운 진득한 핏빛이 교만왕의 홍채 색과 같았다. 아마 힘의 크기를 보여 주는 것 같았다.
【“지금 상태로는 대화를 나눌 수 없을 것 같은데, 다음 약속을 잡지.”】
“어⋯⋯ 다음 약속?”
【“그래. 느슨해진 봉인을 타고 옛 영주들이 간섭을 시작하고, 차원의 모양이 바뀔 때. 모두가 동면에서 깨어날 때. 그때 보지.”】
흐린 형체의 가슴팍에서 붉은 원 아홉 개가 휙휙 돌았다.
찌지직.
교만왕은 원 중 하나를 떼어 내 내게 던졌다. 나는 내게 날아온 물건을 받아 확인했다.
손끝을 타고 전해지는 두근두근 뛰는 감각. 영혼석이었다.
눈앞이 까무룩 흐려진다. 왕이 사라진 자리가 와장창 소리를 내며 깨져 나갔다. 녹색 글씨가 눈앞에 떠올랐다.
[‘녹색 눈의 악마’가 당신과 가계약(假契約)을 맺길 원합니다.]
그게 뭔데. 나는 미간을 팍 구기고 녹색 글씨를 노려보았다.
거뭇한 시야 구석에서 무언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으아악-!!”
“세상에.”
나는 내 주먹에 맞고 튕겨 나간 무언가를 보며 짧게 감상을 표했다. 기분 나쁠 정도로 짙은 녹색 눈이 날 응시한다. 퍽 익숙한 생김새의 인간이, 아니. 인간이라고 부르는 건 옳지 못했다.
“나한테 불만 있어?”
악마가 얼굴을 구겼다. 퍽 익숙한 생김새의 악마가 불만을 표하고 있었다. 기분 나쁠 정도로 선명한 녹색 눈으로.
편애였다.
* * *
어쩐지 저 얼굴을 볼 때마다 기분이 나쁘더라니. 괜히 그런 게 아니었어.
나는 내 감이 제법 쓸 만하다는 것에 만족했다. 그러나 상황이 X됐다는 걸 안 건 편애 얼굴을 주먹으로 갈기고 난 후였다.
일단 영혼석을 얻어 오긴 했는데, 저기 구석에 기절해 있는 PK도 깨워야 했고.
“던전이 붕괴할 거야.”
던전이 붕괴할 거란 소리도 들었기 때문이다. 젠장, 어째서죠.
나는 성실한 K헌터답게 우선 미룰 곳을 찾았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미룰 게 또 뭐 있단 말인가. 빌어먹을!
“내면세계의 주인이 떠났으니 곧 던전이 무너질 거야. 무너지면 위에 있는 인간은 다 죽지 않을까?”
그거참 굉장한 소식이군요. 위에 있는 인간들에 어지간한 랭커가 죄다 속할 텐데, 다 죽을 거란 소식이잖아.
우리나라 망했네. 헌터 강대국에서 헌터 약소국 되나?
“하지만 지금이라도 계약한다고 말하면 도와줄 의향도 있고.”
“그냥 다 뒈지라고 해.”
“재미없네.”
편애는 투덜거리며 경고했다.
던전이 무너지는 건 순식간이니 인간들 목숨을 구할 거라면 빨리 올라가란 소리였다. 위에 네정좋과 러브리스도 있으니 알차게 써먹으란다.
오케이.
나는 그의 충고를 무시하지 않고 PK의 뺨을 찰싹찰싹 때렸다. 무릇 잠에 빠진 자를 깨울 때는 손속에 자비를 두지 말아야 하는 법이다.
“근데 교만왕이 이 던전의 주인 아니었어?”
“맞아.”
“교만왕이 아까 영혼석을 뜯어 주고 갔잖아. 영혼석은 보스를 쓰러뜨려야만 나오는 거 아니었어? 그냥 넘겨주는 것도 가능한가?”
PK가 앓는 소리를 내며 주변을 더듬거렸다. 나는 아직도 못 일어난 녀석을 뻥 걷어차며 질문했다.
이 영혼석이 게이트를 여닫는 힘을 가진 건 안다.
그래서 원리가 늘 궁금했다. 잘하면 이쪽에서 외부 차원으로 쳐들어갈 수도 있는 거니까.
지금 일방적으로 당하는 건 주도권이 오로지 저쪽에 있어서인데, 살짝만 뒤집어도 인류에게 긍정적인 변화가 있지 않을까?
잘하면 회담 따위를 할 수도 있겠지. 편애를 보면 저쪽도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것들이 있나 본데.
하지만 세상은 늘 생각대로 돌아가지 않는 법.
“무슨 생각 하는지 알겠는데, 인간은 못 해.”
“왜?”
“인간은 심장에 서클을 만들지 않으니까. 아, 가르쳐 주면 할 수도 있겠네. 하지만 어지간하면 못하지.”
“너 일부러 못 알아듣게 말하는 거지.”
“알아듣고 싶으면 계약하든가.”
계약무새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계약 안 한다고 몇 번을 말했는데 아직도 포기를 못 했냐. 엿이나 먹으라지.
나는 구역질하는 시늉을 하며 PK를 한 번 더 발로 찼다. 무자비한 폭력에 겨우 잠에서 깬 PK가 끙끙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으, 분명 식탁에 올라가 있었는데⋯⋯.”
“식탁이고 뭐고 정신 좀 차려. 지금 던전 붕괴하기 전에 문 열러 가야 하니까.”
“악! 정신 차렸어! 정신 차렸으니까 그만 때려!!”
등짝을 퍽퍽 두들겨 맞은 PK가 구시렁대며 마나를 움직였다.
나는 핏빛 영혼석을 꽉 쥔 채로 PK의 특성에 몸을 맡겼다.
마나나 스킬 같은 거야 우리 편한 대로 부르는 거라지만, 서클이라니.
그런 소리 들으니까 이 동네 진짜 양판소 같잖아.
이 거지 같은 던전에서 얻은 건 외계인에 관한 정보밖에 없다. 몹은 없고, 몹 잡아도 주는 것 하나 없고, 이상한 반지 같은 거나 떠맡고.
특히 마지막이 심히 X된 것 같았다. 아까 그 기억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나랑 똑같이 생긴 게 있었지.
도플갱어 따위로 가볍게 넘어가기에는 지나치게 범상치 않았고, 그렇다고 그걸 나라고 부르기엔 눈 색이 달랐다. 나는 지옥의 구멍처럼 시꺼먼 그 눈을 떠올리며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최악인데.”
“어?”
“별거 아냐.”
아는 사람도 없어서 어디다 말도 못 하고. 거기에 교만왕이랑 미팅 약속까지 잡고. 후자는 좀 큰일 나는 거 아닌가.
아냐. 나밖에 모르니까 괜찮겠지. 나는 양심 없게도 완전 범죄의 꿈을 꿨다.
어허, 사람이 이 정도 양심 없는 것 가지고 뭐라고 하면 안 되지. 결국 싸워도 내가 싸울 건데.
“좀 빠릿빠릿하게 올라가 봐. 반서준 죽어서 우리나라 대표 사이비 종교 교주 되면 네가 책임질 거야?”
“그거 원래 네 자리잖아. 시원하게 얼굴 까. 내가 도와줄까?”
“그럼 그날이 네 제삿날이 되겠지.”
나는 심드렁히 대꾸하며 위로 고개를 들었다. 아까 편애가 네정좋이랑 러브리스가 위에 있다고 하지 않았냐. 아마 있으면 바로 위에 있을 것 같은데.
한참을 역으로 올라왔다. PK는 온 힘을 쥐어 짜냈고, 나는 옆에서 응원하는 시간을 가졌다. 욕설을 들은 것도 같은데, 사람이 뭐든 잘하는 건 아니잖아. 그렇지?
희미한 빛이 아래로 내려왔다. 나는 뻥 뚫린 천장을 보며 PK를 재촉했다.
“얼마 안 남았어. 빨리!”
“이게 최고 속도인데 여기서 뭘 더 하라고!”
“네가 그러고도 S급이야? 밥값 좀 해!”
“네가 밥 사 준 적이 있긴 해?!”
어허, 말이 그렇다 이거지. 그리고 너도 밥 안 사 줬잖냐. 칼 같이 나누자고. 식빵 한 쪽 굴러 들어오면 완벽한 5:5 하는 게 비즈니스지. 모름?
나는 비즈니스 파트너의 불만을 묵살하고 손을 뻗었다. 지상이 가깝다. PK를 잡아당기며, 그 등을 밟고 도약한다.
“네정좋! 거기 있냐!!”
이 상황에서는 없어도 대답하는 게 인지상정인데.
나는 배에 힘을 주고 외쳤다.
저 너머로 던전이 붕괴하는 광경이 보인다. 하지만 가장 먼저 보인 건 코앞에 서 있는 두 사람의 모습.
“있으면 빨리 이동할 준비해. 무너지기 전에 죄다 대피시켜야 하니까!”
“사람한테 대뜸 반말을 하면 어떡해.”
“아, 맞다. 계속 반말했더니 존댓말 하는 거 까먹음.”
등을 밟힌 PK가 투덜거리며 태클을 건다.
나는 PK의 조언에 따라 언어 출력을 재조정했다. 친한 사이도 아닌데 대뜸 반말을 갈기는 건 내 이미지에 지장을 줄 수 있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저쪽은 신경도 안 쓰는 모양이지만. 이것 참 유감이네.
나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던전 붕괴가 만들어 낸 아수라장을 바라보았다.
보스 몬스터를 잡지 못한 던전에 탈출구는 없다. 이 던전이 열린 게이트가 확산되어 웨이브가 되길 기다리는 게 보통이지.
그 전에 이 영혼석으로 문을 열어야 했다.
“사람들이 모인 곳에!”
나는 네정좋을 향해 손을 뻗으며 소리쳤다. 러브리스를 홱 잡아챈 네정좋이 공간을 접어 이동한다.
“나는 왜 두고 가는데!!”
땅을 밟기 무섭게 이제는 먼 곳이 된 장소에서 절규하는 PK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미안. 그러게, 너도 극야처럼 잘생겼으면 좋았잖아. 그럼 저 얼굴 귀신이 널 두고 가겠냐.
“데려올까요?”
눈치 빠르게 낙오자를 파악한 네정좋이 물었다. 참된 신하의 자세였다.
“그냥 버려요.”
하지만 세상에는 어쩔 수 없는 희생도 있는 법.
나는 비즈니스 파트너의 낙오에 눈물을 머금고 그를 보내 주었다.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