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화
집에나 보내 달라고 열심히 외쳤건만, 세상은 날 돕지 않았다.
사실 집에 가려면 어떻게든 이겨서 나가야 하긴 했다. 게이트의 문을 열기 위해서는 영혼석이 필요하니까.
쿠구구궁-!
온 세상이 뒤집힐 것처럼 땅이 진동한다. 나는 입 안에 들어간 흙을 뱉어 내며 쏟아지는 물보라를 피했다. 호수 안의 진득한 검은 물이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다가왔다.
“이 구덩이에 고인 것은 왕의 피. 벗어나기는 쉽지 않을 거야.”
솟아오른 물이 꾸물거리며 형체를 이뤘다. 나는 거대 슬라임의 형태로 자리 잡은 물덩이를 바라보며 미간을 좁혔다.
어메이징⋯⋯ 여기가 어디지.
아무튼 어메이징 21세기!
내가 21세기에 움직이는 물을 만날지 누가 알았겠는가. 23세기나 되어야 볼 줄 알았지. 발전이 너무 빠른 거 아닌가. 대세는 레트로인데.
날개 없어 서러운 인간이 달밤에 호숫가를 달렸다.
나는 인간이라 날개가 없는데, 쟤는 외계인이라고 날개가 있다니. 분하다.
흙과 자갈 따위가 뒤섞여 더욱 탁해 보이는 호숫물이 철썩거리며 다가왔다. 나는 근처의 나무를 밟고 공중을 향해 뛰어올랐다.
저렇게 형체가 없는 류의 적은 상대하기 까다롭다. 특성이 신체 강화인 터라 더 그랬다.
호숫물이 쓸고 간 자리에 붉게 빛나는 자갈이 남았다.
콰광-!!
지뢰처럼 족족 터지는 자갈이 땅을 흔들고 파 낸다.
이것이 바로 외계인식 개간 사업?
나는 아직 감각이 돌아오지 않은 손을 뻗어 불꽃을 피워 봤다. 호숫물을 증발시키기엔 턱없이 부족한 크기다.
이런 류의 적에겐 러브리스 같은 특성이 좋은데. 나는 낙원 소속의 얼음 특성 헌터, 러브리스를 떠올리며 러닝 시간을 가졌다.
그 특성이라면 저 호숫물을 얼려 제압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극야의 부하 선정 안목이 한없이 부러워지는 시점이었다.
파앙-!
아래로 추락하는 몸이 수면을 밟고 뛰어올랐다. 나는 치이익 녹아 부식되는 신발 밑창을 보며 얼굴을 구겼다.
신발도 산재 처리해 줍니까? 들을 지구인 하나 없는 의문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닌다.
파지지직.
뻗은 손으로부터 푸르스름한 스파크가 튀었다. 이내 강한 낙뢰가 군단장의 머리 위로 내리꽂혔다.
흐물거리며 지상을 점령하던 호숫물이 일순간 짧게 흩어진다.
저거다!
물이 움직이기 시작한 건 저 외계인이 본모습을 드러낸 이후였지.
“위에서 깝죽대지 말고 내려와서 정정당당하게 싸워라!”
나는 나무 위에 착지한 후 버럭 소리를 질렀다. 왕의 권능에 얻어맞은 탓에 조금 탄 기운이 남은 소년이 화난 얼굴로 마주 소리쳤다.
“정정당당을 논할 거라면 네가 외우주로 오던가! 여긴 내 군단도 본체도 없다고!”
아, 그런 거였나. 어쩐지 조금 물렁하더라.
하긴 이쪽 차원에 건너올 때 대가로 건 것 정도의 힘을 쓸 수 있다고 했지.
나는 대충 납득하며 어깨를 돌렸다. 검은 물이 나무 위를 슬금슬금 기어오르고 있었다.
검은 물이 담긴 호숫가 주변은 짧게 자란 잔디만 무성했으나, 조금 더 가면 울창한 숲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나무를 건너 타며 숲의 끝을 가늠했다.
PK도 같이 떨어졌는데 통 보이질 않았다. 숲을 통째로 갈아엎을까 고민도 해 봤지만, 그랬다간 무고한 인명 피해를 낼 수도 있고. 환경이든 생명이든 여러모로 파괴범 엔딩이 나왔다.
“물어볼 게 있다!”
그래서 나는 약간 탄 군단장에게 다시 한번 말을 걸었다. 무투파도 아닌데 군단도 본체도 없어 허약해진 외계인이 고개를 까딱이며 답했다.
“뭐냐.”
“나랑 같이 떨어진 인간 못 봤어? 챙겨 가야 하는데.”
“시험은 1인용이다. 함께 떨어졌으면 다른 시험관의 분신을 마주하고 있겠지.”
아주 직관적인 대답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알아들었다는 표시를 했다. 전투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나는 쏟아지는 물과 폭발하는 자갈을 피해 소년에게 접근했다.
유효타가 먹히는 건 낙뢰와 불꽃의 권능이었지만, 이마저도 원거리에서 치면 위력이 줄었다.
아까 환영을 깨겠다고 무리한 탓이 아닌가 싶다. 나는 여전히 감각이 없는 팔다리를 움직여 댔다.
늦게 반응하면 물방울이 튀어 옷에 구멍이 뻥뻥 났다.
그렇게 한참을 뛰어다니고 있으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야 이러다 언젠가는 저 분신을 잡겠지만, 다른 분신을 마주한 PK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바깥의 상황은 어떻게 됐지?
색욕왕이 노리는 것은 이 던전과 우리 차원을 융합시키는 것 아니었던가?
하얀 머리칼의 소년이 송곳니를 드러내며 히죽 웃는다.
아, 나는 그 웃는 얼굴을 보며 깨달았다.
이렇게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 자체가 패배의 요인이 될 수 있구나.
시험관이라는 저 군단장 또한 직접적인 공격 없이 검은 물만을 부리고 있었다. 필히 시간을 끌기 위한 수작이다.
그럼 가만히 어울려 줄 수만은 없지. 나는 땅에 내려와 자갈이 터지는 타이밍을 확인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땅에 떨어진 후 정확히 5초 후에 터진다. 나는 땅에서 자갈을 쥐어 힘껏 던졌다.
따악!
소년의 이마에 직격한 자갈이 쾅 소리를 내며 터졌다. 줄곧 폭음을 내며 땅을 뒤흔들었던 만큼 거센 위력으로 상대에게 피해를 입혔다.
“허.”
소년이 짧게 감탄사를 뱉어 냈다.
나는 머리 한쪽이 시커멓게 타 일그러진 얼굴을 보며 씩 웃었다.
공포 영화의 한 장면만큼이나 끔찍한 모습이었지만, 돌파구를 찾았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치이익.
물에 스치듯 닿은 소매 끝이 녹아내린다. 나는 제법 신이 난 채로 돌팔매질을 시작했다.
검은 피막 날개가 바람을 가르고 쏜살같이 움직인다.
쾅! 콰광!
공중에서 폭발이 연쇄적으로 일었다.
우선 날개를 맞춰야지. 떨어지면 저 물에 처박아 버리자. 녹아내리면 이기는 거고, 녹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낙뢰를 떨궈 감전시킬 거니까.
일.
특성으로 인해 남달라진 동체 시력이 움직이는 사물을 포착한다.
이, 삼, 사.
공기를 가르고 날아간 자갈이 소년의 날개에 맞는다.
오.
반동으로 튕겨 나온 자갈이 허공이 붕 뜬다.
그리고 폭발한다.
“아아아악-!!”
고막이 뜯어질 것만 같은 비명이었다. 추락하는 소년이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분홍색 눈에 비치는 내 얼굴이 히죽 웃음 짓고 있다. 흐리멍덩한 잿빛 눈이 사냥감을 포착한 맹수처럼 빛났다.
낙하산은 심각한 사회 문제라지만, 저 동네에도 낙하산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저거 말마따나 단순히 분신이라서 그럴 수도 있고.
확실히 직접적으로 공격해 오지 않는 것은 내게 있어 큰 메리트였다. 팔다리 감각 없이 싸우는 건 큰 디버프였기 때문이다.
묘하게 느릿느릿 꾸물거리는 검은 물을 피해 나무를 척척 밟았다.
추락하는 소년의 몸뚱이를 잡고 호숫물 안에 처박는다. 소년의 몸은 검은 물에 처박혀도 녹아내리지 않았다. 나는 손끝을 그러모아 푸른 스파크를 꺼냈다.
“너는.”
소년이 대화를 시도해 온 건 그때였다.
“무엇을 위해 왕을 알현하려고 하지?”
검은 물이 소년을 띄우고 출렁거린다.
나는 검은 물에 비치는 내 모습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옷 군데군데 구멍이 난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얼마 입지도 않은 건데.
“나는 왕을 알현하고 싶은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는데.”
그냥 던전 닫으려고 들어왔더니 왕을 알현하기 위해서는 시험을 치러야 한다! 이러지 않았냐. 나는 조금 억울했다.
“하지만 침략자들한테 할 말은 있지.”
소년이 미간을 찌푸린 채로 고개를 들었다. 나는 그 하얀 낯을 내려다보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여긴 내 구역이니까 빨리 꺼지라고 전해. 어디서 근본도 없는 시정잡배들이 기어들어 와서 내 땅 네 땅 하고 난리야?”
이 별의 주인은 인간이다! 몇십억 인구로 신음하고 있는 지구가 안 보이냐? 외계인까지 추가됐다간 이 별은 끝장이야. 인구수 과다라고.
콰지지직-!!
푸르스름한 낙뢰가 검은 물과 소년에게 사정없이 내리꽂혔다.
나는 하얗게 빛나는 시야 사이로 조금 전에 보았던 녹색 글씨를 보았다.
[조건을 충족하였습니다.]
[‘녹색 눈의 악마’가 흥미를 보입니다.]
[왕의 요람으로 진입합니다.]
* * *
환영은 커다란 세 개의 틀로 나눌 수 있었다. 시전자를 중심으로 세계를 구축하는 것, 피시전자를 중심으로 세계를 구축하는 것,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것.
창조는 개나 소나 하는 게 아니다. 해당 특성 각성자의 말에 따르면 세 번째는 어마어마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니 보통 쓰는 것은 첫 번째와 두 번째.
첫 번째는 시전자가 제 기억을 보여 주거나 대화를 원할 때 쓰이고, 두 번째는 피시전자의 트라우마를 자극해 정신 공격을 행하거나 무의식의 영역으로 들어갈 때 쓰였다.
「“고향으로 돌아갈 거야.”」
검은 천으로 얼굴과 몸을 완전히 가려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이 말했다. 그의 앞에는 하늘 높이 솟은 거대한 왕좌와 열두 장의 날개를 단 괴물이 있었다. 그들이 대화하는 곳은 검은 구렁이었는데, 어찌나 추운지 입김이 솔솔 샜다.
「“너와 계약한 악마들은?”」
「“계약은 해지하고 가야지. 우리 차원은 외부의 존재를 받아들이기엔 아직 약하거든.”」
「“그것들은 네 충실한 개였을 텐데, 꼴이 우습지도 않군.”」
검은 천의 누군가는 정체를 알 수 없었지만, 그와 대화하는 괴물은 정체를 짐작하기 쉬웠다.
나는 선득한 핏빛 눈을 보며 생각했다. 저것이 바로 우리가 교만왕이라고 부르는 괴물이었다.
「“다들 이해하겠지. 이해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어차피 다 봉인하고 갈 테니까.”」
「“새로 옥좌에 앉은 이들에게서 땅을 떼어 간 건 그것 때문인가?”」
「“그래. 널 보는 것 또한 이게 마지막일 거다.”」
옥좌에 앉아 그를 내려다보던 교만왕이 돌연 손을 뻗었다.
검은 천의 누군가는 교만왕의 손 위로 올라서서 그를 보았다. 두 사람의 크기 차이는 상당해서 검은 천의 몸 전체가 교만왕의 한쪽 눈알만 했다.
「“나는 인간이야. 너희만큼 긴 세월을 살 수 없지. 하지만 인간은 이 차원의 그 어떤 종족보다 끈질긴 종족이고, 언젠가는 이 차원의 문이 다시 열릴 테니.”」
「“그건….”」
「“때가 오면 다시 이곳을 찾은 인간에게 이 물건을 건네줘. 그게 내 마지막 부탁이다.”」
그가 건넨 건 검은 반지였다.
그 어떤 장식도 없는 민무늬 반지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불쾌함을 일으키는 재주가 있었다.
검은 천을 두른 이가 교만왕의 손 위에 반지를 올려 두었다.
교만왕은 붉은 두 눈을 굴려 반지를 응시했다. 주변의 모든 빛을 흡수하는 것처럼 검은 반지가 손바닥 위에서 스르르 사라진다. 그는 교만왕을 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고마워.”」
단 하나의 인간이 몸을 돌린다.
쩌저적.
공간이 일그러지는 소리가 났다. 사라져 가는 인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교만왕이 작게 입을 벌린다.
「“너는 너를 위해 헌신하던 계약자들을 헌신짝처럼 버렸지. 그것들은 네게 있어 어떤 존재였지?”」
라임이 범상치 않았다.
호오, 자네가 바로 요즘 트렌드를 아는 왕인가?
나는 흥미진진하게 두 존재의 드라마를 감상했다. 일그러진 공간 사이로 한 발을 내디딘 인간이 고개를 돌려 교만왕을 보았다.
「“그 종족들은 내 무엇도 될 수 없어. 내게 가치 있는 것은 나와 내 종족뿐이다.”」
「“이기적인 말이로군.”」
「“그렇지. 그래도 너는 뭐⋯⋯.”」
그의 몸 반절이 공간 사이로 넘어갔다. 펄럭이는 소리와 함께 그의 얼굴을 가린 천이 쏟아져 내렸다.
나는 검게 빛나는 그의 눈을 보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홍채도 동공도 모두 까만 눈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기이한 것이었으나, 그 얼굴만큼은 매우 익숙했다.
익숙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매일 아침마다 보는 것이었으니까.
「“친구라도 말해도 괜찮겠네.”」
그래. 그건 바로 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