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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한데 제가 일반인이라서요-43화 (43/175)

제43화

푸른 달과 노란 달이 하늘을 점령하고 있다. 나는 달이 두 개인 하늘을 보며 기이한 감상에 취했다.

여긴 어디지? 안드로메다?

기왕 보내 줄 거면 홍콩이나 보내 줄 것이지, 거 왜 다른 은하로 보내 주냐.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봤다. 푸른 달과 노란 달. 두 개의 달이 뜬 하늘은 교만왕의 영토에서 본 적 있었다.

아, 그래. 이게 교만왕 홈그라운드에 들어와서 보는 환영이니까 외부 차원이 나올 만하지.

그런데 외부 차원의 뭘 보여 주려고 이런 환영에? 나는 찝찝한 기색을 감추지 않으며 뒤통수를 긁었다.

환영, 환각, 환상, 교묘한 덫, 몽마의 장난, 한때의 꿈.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이 비범한 상태 이상은 덫에 걸린 자를 무방비 상태로 만들었다.

많은 각성자가 덫에 걸려 죽었다, 정신력을 키우는 것 말곤 대처할 방법이 없다. 참 곤란한 상태 이상이지만, 놀랍게도 처음부터 걸리지 않는 방법이 있었다.

그게 과연 무엇이냐, 별거 없다. 환영이든 환각이든 결국 남의 정신을 지배하는 것. 그냥 그 술수를 쓰는 시전자보다 강하면 그만인 것이다.

이 무슨 힘만 세면 다인 무림식 방법이란 말인가. 하지만 그게 다인데 뭐 어떡하냐. 자본주의 사회의 법칙이 돈인 것처럼, 외부 차원의 법칙은 힘이었다. 뭐든 세면 문제없다.

따라서 나는 이쪽으로 대처를 하나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다 나보다 약한데 상태 이상 걸릴 일이 뭐 있겠냐. 그런 안일한 생각이었다.

“과거의 날 매우 쳤어야 하는데.”

“뭐?”

“아냐. 혼잣말이었어.”

걸릴 일 없다고 생각했는데, 걸릴 일 있잖아. 나는 앞서가는 소년에게 대충 대꾸해 준 후 도로 입을 다물었다. 괜히 말을 많이 섞고 싶지 않았다.

쟤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뭐 하러 친하게 대화까지 하냐. 그 시간에 PK나 찾는 게 낫지.

나는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우리는 거대한 호숫가를 걷고 있었다. 호수의 검은 물이 두 개의 달을 담고 잔잔하게 출렁인다. 세상으로부터 괴리된 것만 같이 이상한 광경이다. 걷고 또 걷고 있으나 끝이 보이지 않는다.

여긴 어디지?

끝없이 이어지는 길에서 나는 처음에 가졌던 의문을 다시 꺼내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바깥에선 지금쯤 하얀 괴물들이 난리를 치고 있을 텐데. 나는 앞서가는 소년의 하얀 머리통을 보며 말했다.

“우리 지금 어디 가고 있어?”

말없이 줄곧 앞서 걷던 소년이 그 말에 고개를 돌렸다. 머리 색만큼 창백한 피부 위로 분홍색 점이 콕콕 박힌 모양새다. 벌린 입 사이로 뾰족한 송곳니가 존재감을 과시했다. 인간이 아니구나.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게 드디어 궁금해? 나는 조금 더 일찍 물어볼 줄 알았는데.”

살짝 웃는 얼굴에 드러난 흰 송곳니가 톱날처럼 날카로웠다.

나는 손을 쥐락펴락하며 이어질 전투에 대비했다. 아직 감각이 돌아오지 않았다. 아까 권능을 너무 쓴 탓이었다.

“여긴 어디야? 너는 누구고.”

“여긴 왕의 영토야. 나는 안내인이지.”

“왕이 누군데. 교만왕?”

“뭐⋯⋯ 너희는 그렇게 부르는 것 같더라.”

곱슬거리는 앞머리를 만지작거린 소년이 배시시 웃었다. 소년의 창백한 얼굴 위로 구불거리는 글씨가 새겨진다. 가지런한 양복 재킷을 뚫고 거대한 피막 날개가 솟아오른다.

소년이 그 날개로 날아오름과 동시에 호숫가가 거세게 뒤흔들렸다. 번뜩이는 분홍색 눈의 소년이 퍽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침입자에게 묻지. 우리의 영토에 발을 들인 이유는?”

“난 집에 가고 싶은데. 나가는 길이 어디냐.”

“이곳은 왕을 알현하러 온 자를 시험하는 길. 나갈 방법은 오직 두 가지다.”

앳된 목소리가 제법 근엄하게 내려앉는다. 나는 주머니를 뒤적여 단말기를 꺼냈다. 부르르 떨리는 단말기 화면에 알 수 없는 글자가 빼곡하게 채워진다.

온통 깨져 보이는 게 전쟁 초기와 똑같았다. 정보를 얻는 건 포기하는 수밖에 없나.

“시험을 통과해 왕을 알현하거나.”

쾅-!!

고막을 찢을 듯한 폭발음이 들린다. 나는 감각이 없는 손가락을 움직여 귓가를 더듬었다.

“죽거나.”

그와 동시에 소년이 미소 지었다. 눈앞이 화염으로 휩싸인다. 흔들리는 시야 사이로 녹색 글씨가 춤췄다.

[교만왕의 영토에 진입하였습니다.]

[수문장의 증표(8/8)]

[왕을 알현하려는 자, 자격을 증명하라.]

[적합자 확인.]

[제2군단장, ‘아르다트’가 출몰합니다.]

아. 어디선가 누가 낄낄거리는 환청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나는 욕지거리를 삼키며 프라가라흐를 들었다. 그러게, 왕 같은 건 모르겠고, 집이나 보내 달라니까.

* * *

손가락테크닉이 시험에 막 들었을 무렵, 지상.

[별이 추락한 나락 해방까지, 359:13:27]

낙원의 네가정말좋아는 극야의 명령에 따라 얌전히 대기 중이었다.

“잘못하면 들킬 수 있으니까 공간 열지 마.”

그것도 빌어 처먹을 러브리스와 함께.

‘저건 언제 죽지.’

손가락테크닉을 저주하는 일을 생업으로 삼은 멜팅하트와 함께 러브리스를 저주한 지도 벌써 일 년.

수많은 저주 인형과 부적이 쓰레기통으로 직행했음에도 불구하고 러브리스는 아직 살아 있었다.

‘목숨줄이 질겨.’

상식적으로 일반인도 죽이기 힘든 저주 인형 따위가 각성자를 어떻게 죽이겠냐마는, 일단 그는 해당 행위를 지속적으로 실행 중이었다.

멜팅하트의 세 치 혀 놀리는 솜씨는 극야가 그녀를 스카웃할 만큼이나 뛰어났고, 네가정말좋아는 늘 본능에 이성을 맡기고 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그녀의 특성이 세 치 혀 놀리기 따위인 것은 또 아니다. 그저 그녀는 다른 사람들보다 말을 더 잘할 뿐이고, 네가정말좋아가 지나치게 생각 없이 살기 때문에 벌어진 일일 뿐이었다.

러브리스보다도 더 오래 저주받은 손가락테크닉이 지금도 떵떵거리며 잘살고 있는 현실을 보라. 이 어찌도 부질없는 짓인지.

그의 (자칭)친구이자 입 싸기로는 새벽의 제라늄과 비빌 위인인 레터가 들었으면 배꼽을 잡고 뒹굴 이야기였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레터는 네가정말좋아의 (자칭)친구였고, 아마 평생 가도록 저 괄호를 뗄 일이 없을 것이기에, 그는 웃음거리가 되는 일을 피할 수 있었다.

장기적으로 보면 그냥 웃음거리가 되는 게 나았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가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며 헛생각을 하는 사이에.

“어휴.”

상태 이상한 회귀자에 많이 모자란 지구인, 그리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외계인이 섞인 (타칭)사이비 종교 집단.

개중에서 정상인 포지션을 담당하고 있는 러브리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잘하고 있으려나.’

기분 나쁜 녹색 눈을 가진 외계인.

외부 차원에서 온 존재. 그들의 차원을 침공한 몬스터들과 동일한 성분의 쓰레기.

이번 작전의 핵심을 맡은 길드원, 슈아이브. 줄여서 슈브.

지구에서는 ‘편애’라고 불리는 존재.

‘인간처럼 생긴 몬스터라니. 대체 무슨 생각이신지.’

몬스터가 외부 차원의 주민이라는 것은 어지간하면 다들 아는 이야기다. 하지만 아는 것과 보는 게 과연 같겠는가.

극야의 말이라면 덮어놓고 따르는 게 그들이라지만, 편애의 정체를 알았을 때는 아무리 그들이라도 목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대업에 반드시 필요한 존재입니다.’

고작 말 한마디에 그 목소리는 쏙 들어갔지만.

‘굳이 따지자면 몬스터보다 더한 존재지만요.’

사근사근한 말투로 고한 내용치곤 굉장히 파격적이다. 당시 당황한 러브리스는 뭐라도 해 보려고 고개를 돌렸다가, 생각 없는 얼굴로 손뼉을 치는 네가정말좋아를 본 후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그냥 생각하지 말자.’

그녀에게 존재 의의를 준 곳이었지만, 그들의 감성을 이해하기엔 그녀가 너무 모자랐다.

생각하지 말자, 그냥. 이번 작전도 뭔가 굉장히 이상했지만, 어차피 그녀가 맡은 일은 중요한 것도 아닌 것을. 덮어놓고 따르고 보면 뭐든 되겠지.

오늘따라 바람이 차다. 러브리스는 마치 재야의 고수처럼 평온한 마음가짐을 꾸렸다.

콰과광-!!

아마 그 소리가 없었다면 해탈의 경지에 이를 수 있지 않았을까.

“던전이 무너진다!!”

세상은 늘 그녀를 도와준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건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번 던전은 제대로 된 던전이 아닙니다. 색욕왕이 잠자는 교만왕을 이용해 파 둔 함정이지요.’

떠나기 전 들었던 이야기가 차근차근 떠오른다. 러브리스는 당황하지 않고 변화에 대비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 던전은 알현이 끝나기 전까지 무너지지 않는다.

‘잠에서 깨지 못하는 교만왕이 이쪽 차원의 존재와 대면하기 위해서는 내면세계를 끌어 와야 합니다. 색욕왕이 바라는 건 두 차원의 빠른 융합. 왕의 이름은 가벼운 것이 아니고, 그 내면세계는 더욱더 그렇습니다. 단순히 던전으로 끝난다면 문제없겠지만, 웨이브가 된다면? 막지 못하고 이 차원과 융합되기 시작한다면?’

극야의 입술 끝이 반듯하게 올라간다. 보라색 눈이 불길하게 일렁인다. 러브리스는 뒷말을 예상한 탓에 눈을 질끈 감았다.

‘융합 속도가 걷잡을 수 없이 빨라지겠죠. 그쯤 되면 손을 쓸 수 없게 될 거예요.’

아직 준비가 끝나지 않은 인간이라는 종족이 외부 차원의 종족들의 노예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각성자들이야 그럭저럭 쓸 만한 힘을 가졌으니 먹고 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렇지 않은 다수의 인간들은? 범인류적으로 끔찍한 엔딩이다.

‘내면세계를 닫을 유일한 방법은 왕을 알현하는 것입니다. 그 시험은 과정이 복잡하고 긴 시간이 필요합니다. 색욕왕이 노리는 것은 그것이겠죠. 그러니 저희는 진입 후 조를 이뤄 왕을 알현하는 길을 뚫을 겁니다.’

수문장의 시험을 통과해 증표를 모은다. 심층으로 내려가 그 증표를 뿌린다. 마지막 증표를 가진 자가 왕을 알현할 기회를 얻을 테니, 증표를 놓고 나온 이후에는 던전의 변화에 대비한다.

하얗게 얼은 숨이 공중으로 흩어졌다. 알현의 길에 들어선 자가 나왔으니 그 외의 것들은 모두 폐기 처분할 대상이다.

충격적인 스킬로 보는 사람의 정신 오염을 부추기던 몬스터들이 일제히 모습을 바꾸었다. 러브리스는 손을 뻗어 얼음 창을 쥐었다.

거세게 흔들리던 던전이 꿈틀거리며 모습을 바꾼다.

좁게, 더 좁게.

세포의 역할을 하는 몬스터들이 몸 안의 침입자를 무찌르기 위해 달려든다. 러브리스는 위벽처럼 꿈틀거리는 땅 위에 서서 앞을 바라보았다.

‘내면세계의 위치는 보통 개체마다 다르지만, 이번에 보게 될 교만왕의 내면세계 같은 경우에는⋯⋯.’

밟고 서 있는 땅에서 진득한 액체가 새어 나온다. 러브리스는 땅을 단단하게 얼리며 경과를 지켜보았다. 얼음이 녹아내리고 있다.

얼음뿐만 아니라 다른 것들까지 모두.

‘내면세계가 신체 내부에 있습니다. 그러니 교만왕의 내면세계가 이쪽 차원과 융합된다면….’

네가정말좋아가 괜히 꾸물거리며 공간을 찢어 비튼다.

러브리스는 그의 뒤를 따르며 공간의 변화를 지켜보았다. 갖은 비명으로 엉망이다. 극야가 내뱉은 뒷말이 가까스로 떠올랐다.

‘이 나라 전체가 교만왕의 뱃속으로 들어가겠네요.’

떠오른 얼굴이 퍽 상큼했다.

아니 그거⋯⋯ 그렇게 웃으면서 말해도 되는 내용입니까?

러브리스는 잠깐 되묻고 싶었다. 이건 진짜로 손가락테크닉의 손에 이 차원의 존망이 걸린 것 아닌가. 그 사람⋯⋯ 확실하게 믿어도 되는 건가?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고 돌이킬 수도 없다. 러브리스는 지금 이 순간 손가락테크닉이 간절하게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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