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죄송한데 제가 일반인이라서요-41화 (41/175)

제41화

별이 추락한 땅은 사슬이 감싸고 있다.

여덟 개의 사슬은 죄인을 봉인한 봉인구고, 잠든 왕을 깨우는 길이다.

“슈브.”

심층으로 들어선 러브리스가 편애를 불렀다. 그들이 도달한 곳은 교만왕의 내면세계다. 한 번의 실수가 큰 재앙을 초래할 수도 있었다.

“지금 갈게.”

영원히 잠자는 서방 세계의 왕.

일곱 권능의 한 자락을 얻었지만, 봉인당하고 만 탓에 영원히 내면세계에 갇힌 왕.

바깥의 인간 나부랭이들은 지금 이 공간이 일반 던전인 줄 알 테지만, 이곳은 일반적인 던전 따위가 아니었다.

‘그냥 던전이었으면 이미 나가고도 남았겠지.’

힘만 무식하게 센 그자가 있으니까 무작정 돌진하면 그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왕의 침소. 눈뜨지 못하는 왕이 유일하게 타인을 마주하는 곳.

“조각은?”

“일곱 개는 이미 확보했다는 통신이 왔어. 나머지 한 개는 전하가 직접 들고 올 거야.”

낙원의 셋이 끝없는 나선 계단 위를 걷는다.

여덟의 수문장은 내면세계에 도달한 자가 왕을 알현할 자격이 있는지 판단하는 시험관.

물론, 시험도 치르지 않고 수문장을 냅다 때려눕힌 인간도 있다.

무식한 처사였지만, 그 또한 왕이 안배한 길. 수문장을 압도할 정도로 강한 이는 왕을 알현할 자격이 있다.

“바깥 상황은 어때?”

“분신이 출몰했어. 중앙이 열렸으니 시간 끌기엔 딱이지.”

“그래? 아직 남아 있는 인간들이 안타깝게 됐네.”

이번 던전은 단순한 던전이 아니다. 외부에서의 침공이 아닌, 그저 간섭.

이 차원과 교만왕의 내면세계를 잇기 위해 색욕왕이 파 둔 함정이다.

왕을 깨우고 진실을 아뢰어 물러가게 하느냐, 아니면 이대로 저쪽 차원과 융합되느냐.

작전의 핵심은 그것이었다.

“개떼처럼 몰려들더니, 개고생만 하고 가네. 그러게, 우리만 들어온다고 이야기했을 때 수긍하고 가면 좋았을 텐데.”

“그들 입장에서는 간섭조차도 침공으로 보일 테니까. 나라 망하기 전에 헌터 집어넣어서 어떻게든 막아야지.”

전쟁 당시에 각성한 러브리스가 미간을 좁히며 대답한다. 편애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이어 말했다.

“그러게, 말할 때 믿으면 좀 좋잖아. 이번 던전은 침공 아니라고 본부에 말까지 해 줬는데 왜 안 믿어?”

“너 같으면 너희 차원 침공한 외계인이 그런 소리 하는데 믿을 수 있겠어?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표정을 완전히 구긴 러브리스가 따갑게 쏘아붙이며 고개를 돌렸다.

길게 이어진 나선 계단의 끝에 위로부터 떨어진 빛이 닿는다. 사슬로 칭칭 감긴 거대한 문이 그들 앞에 존재를 드러낸다.

“샛별아.”

극야의 부름을 받은 러브리스가 아공간에서 물건을 꺼내 든다. 그와 동시에 아무것도 없는 땅바닥에서 네가정말좋아가 솟아오른다.

“명하신 대로 준비 마쳤습니다.”

“슈브.”

“여기도 오케이.”

잘못하다간 인류 멸망을 초래할 재앙이니 처리는 빠르게.

이 차원의 연약한 인간들에게 아직 다른 차원의 간섭은 조금 일렀다.

교류라는 단어는 동등한 상황에서만 쓸 수 있는 단어다. 이대로 두 차원이 융합된다면 준비가 되지 않은 이쪽 차원의 인간들은 죄다 노예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그러니 낙원의 궁극적인 목표는 이 차원과 인간이라는 종족이 준비될 때까지 뜸을 들이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왕으로 거듭날 존재를 보필하고 감시하는 것.

이세계(異世界)의 존재.

이쪽 차원으로 섞여 들어온 외계인, 슈아이브가 휘파람을 불며 달려 나갔다.

‘왕의 자격은 이번 던전에서 확인한다.’

영혼을 보는 것은 오직 극야뿐. 슈아이브는 직접 목격하지 않은 것을 믿지 않았다. 극야가 이야기한 왕이 그의 왕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없었다.

왕의 자격은 비로소 왕 앞에 섰을 때만 보이는 것. 녹색 눈의 악마는 공을 들여 이번 판을 짰다.

그의 왕일지도 모르는 존재는 이번 기회를 통해 더 큰 세계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물론, 그 일련의 행동에 당사자의 의사는 전혀 들어 있지 않았지만.

그 당사자가 알면 욕을 반나절은 내뱉을 일이었다.

* * *

조금 오래전의 일이다.

각성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절.

“와, 이거 다 네가 한 짓이야?”

까만 모래를 검붉은 바닷물이 쓸고 지나간다. 나는 작열하는 검은 태양 아래에서 인간 주제에 하늘에 떠 있는 놈을 만났다.

“넌 뭐야?”

“말이 험하네. 초면에 실례잖아.”

팔자 편하게 웃는 얼굴이 넉살 좋다. 바닥에 널린 시체가 보이지도 않는지 꿈동산 어린이처럼 해사하게 웃는다.

“너 완전 세구나? 여긴 왜 왔어?”

검은 아스팔트 바닥이 검은 모래랑 뒤섞여 있다. 던전이 웨이브화 된 걸로 모자라 그대로 방치된 탓에 외부 차원과 내부 차원이 융합되기 시작한 단계였다.

남들은 몬스터한테 찢겨 죽고 있는데 혼자서 팔자 편한 놈.

당시 그에 대한 내 인식은 딱 그 정도였다.

인성 끝내주게 생겼네. 저런 놈이랑 우리 엄마가 같이 있지는 않겠지.

“내 말 듣고 있어? 혹시 귀먹었어? 다쳐서 귀가 안 들려?”

그러면 내가 아는 힐러 양반이 있는데, 소개시켜 줄까? 아~ 물론 공짜는 아니고. 세상이 이렇게 난장판인데 힘 있는 사람들끼리 손잡아야지, 그 뒤로 한참 동안 어쩌고저쩌고.

들어 줄 가치가 제로다. 제가 각성했다고 거드름 피우는 놈들이 이 시국에 한두 명인가.

그런 건 됐고, 일단 엄마를 찾아야 했다. 그 당시의 나는 그 일념 하나만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키에에엑-!!

어딜 가든 몬스터가 튀어나온다. 죽이고, 또 죽인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흐아아악!! 괴물이다!!”

“빨리 저걸 잡아! 힘이 있으면 약자를 지켜야 할 거 아니야!!”

다양한 사람들을 보았다. 다양한 말을 들었다. 개중에는 감사의 말도, 저주의 말도 있었다.

감사를 전하는 말과 구해 줬음에도 저주를 퍼붓는 말은 차원이 다르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공통점은 있었다.

그건 바로 이놈이나 저놈이나 할 것 없이 도피하듯 자리를 떴다는 점이다.

사람들이 지금이야 각성자들을 긍정적으로 인식하지만, 과거만 해도 조금 달랐다.

뭐, 피부색이 다르다고 차별하는 게 사람이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안녕.”

나는 초록색 점액이 묻은 마스크를 벗었다. 헤실헤실 웃는 얼굴의 머저리가 하늘에서 인사를 건넸다.

“또 보네.”

태연자약하게 인사하는 꼴이 가증스럽다. 뭘 또 본다고 인사를 해. 줄곧 따라왔으면서.

나는 이번에도 그 인사를 무시한 후 길을 걸었다. 저번에 다이소에서 뭉텅이로 챙겨 온 마스크가 다 떨어졌다.

이 근방에 다이소가 있던가? 일단 가 보면 알겠지.

“내 말 안 들려? 역시 귀가 먹은 건가?”

귀 아주 멀쩡하다. 안 들리긴 뭐가 안 들려?

하지만 표정 바꾸면 듣고 있는 거 티 나겠지. 나는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채로 주변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나름의 탐색이다.

“살⋯⋯ 려 주⋯⋯.”

“사람ㅇ 여⋯기 있⋯⋯.”

평소엔 족족 실패했는데, 오늘은 운수가 좋을는지.

거리가 상당한지 뚝뚝 끊기지만, 분명히 누군가가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고개를 퍼뜩 들고 운동화 끈을 꽉 맸다. 땅을 힘껏 박차고 뛰어올랐다.

몬스터의 습격에 멀쩡한 게 통 없는 건물을 마구 밟고 달렸다.

“살려 주세요! 여기 사람이 있어요!”

“도와주세요! 누구 없어요?!”

한 번 뛸 때마다 쾅쾅이나 퍽퍽 정도의 소리가 났다. 인기척이 들리니 저쪽에서도 끊임없이 소리를 질렀다. 덕분에 사람들을 무사히 찾을 수 있었다.

“거기 누구 있죠?! 맞죠?!”

지척에서 환희에 찬 목소리가 들린다. 비스듬히 무너진 건물 잔해 안쪽에 사람들이 고립된 모양이다. 살점이나 핏자국이 나뒹구는 것을 보니 깔린 사람은 이미 죽은 모양이고.

일단 구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으니 저 사람들부터 구하자.

나는 무너진 건물 잔해를 들어 옆으로 치우기 시작했다. 가장 커다란 것 몇 개를 치우자 고립된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여기요! 여기예요!”

“선생님, 정신 좀 차려 보세요! 저기 누가 우리를 구하러 왔어요!”

숫자가 한 열 명 정도 되나. 아무튼 꽤 많은 사람이 있었는데, 깨어 있는 건 고작 두 명뿐이었다.

저 사람들은 쓰러진 거야, 아니면 죽은 거야. 나는 돌가루가 묻은 손을 탁탁 털며 그들을 빤히 바라봤다.

마트 유니폼을 입은 직원 한 명과 교복을 입은 학생 한 명이 쓰러져 있는 사람들을 깨우고 다닌다.

쓰러진 사람들의 입술이 하나같이 푸르스름한 초록빛이었다. 개중에는 손톱이 녹색인 경우도 있었다.

“아저씨, 정신 좀 차려 보세요. 아저씨!”

“학생, 여기서 계속 자면 큰일 나. 빨리 일어나!”

두 사람이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을 깨운다. 나는 얼마간 뻘쭘하게 혼자 서 있다가, 그들에게로 슬그머니 다가가 사람들을 살피고 다녔다.

깨어 있는 학생의 친구인가 싶은 애들이 보인다.

택배 회사 조끼를 입은 아저씨도 보였고, 장 보러 나온 것 같은 아주머니도 보였다.

나는 사람 몇몇을 살피다가 주변에 또 다른 사람은 없나 하고 고개를 돌렸다. 외진 곳에 혼자 쓰러져 있는 여성의 뒷모습이 보인다.

뒷모습이 우리 엄마로 착각할 만큼 닮은 사람이었다.

“엄마⋯⋯?”

목소리가 덜덜 떨리며 나왔다. 나는 그대로 달려가 그 사람의 몸을 뒤집어 보았다.

얼굴 전체가 녹색으로 물든 사람. 유감스럽게도 우리 엄마는 아니었다.

아니지.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구나. 그녀는 더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스르륵.

손에서 힘이 풀린다. 이놈의 서울 공화국. 사람은 끔찍하게 많은데 정작 찾는 사람은 없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터덜터덜 떠나는 걸음 뒤로 누가 감사 인사를 전했다.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내 갈 길을 갔다.

사람하고 엮일 일은 만들지 않는 게 좋다. 그게 몇 주 만에 폭삭 망한 아포칼립스 월드를 살아가는 사람의 방식이었다.

이제 어딜 가서 찾아봐야 하나. 나는 아무도 없는 길을 걷고 또 걸었다. 외부차원과 반쯤 동화된 거리는 사뭇 이세계의 분위기를 풍겨서 더욱더 스산했다.

혼자 돌아다니는 거야 뭐, 그즈음엔 익숙해졌으니까.

“엄마를 찾고 있는 거야?”

아마 그 말을 듣지 않았으면 어디 건물에라도 들어가서 밥이나 찾지 않았을까.

“어쩐지. 그래서 사람들을 찾아 돌아다녔구나?”

나는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채로 고개를 들었다. 이름도 모르는 게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말을 건넨다.

“내가 도와줄까?”

상냥한 어조로 건네는 말이 퍽 여유롭다. 나는 그제야 저 이상한 놈의 말에 첫 번째 대답을 했다.

“왜?”

“관심이 생겨서.”

“왜?”

“초능력 쓰는 사람은 조금 봤는데 너만큼 강한 사람은 본 적 없는 것 같아.”

덜컹!

방금 막 들어가려고 했던 건물의 문이 스스로 열린다. 약국 안에서 하얀색의 무언가가 슝 튀어나와 가볍게 허공을 부유한다.

“그런 사람은 보통 돈이 되거든. 넌 아마 아주 크게 될 거야.”

“그건 내가 돈이 된다는 소리, 아니면 내가 더 세질 거라는 소리?”

“둘 다로 봐도 좋지 않을까?”

마스크를 소포장한 팩이 손 위로 툭 떨어진다. 저 녀석은 진짜 초능력의 정석 같은 초능력을 쓰네. 나는 마스크 봉지를 만지작거리면서 생각했다.

“원하는 게 뭐야? 무상으로 돕진 않을 거 아냐.”

“그건 천천히 협의해 보자. 지금 당장 네가 나한테 줄 수 있는 건 없잖아.”

기이한 염동력자가 공중에 몸을 띄운 채로 방긋 웃는다.

“요컨대 나는 네 미래를 보고 투자하는 거지.”

나는 그 미소가 꼭 사람 등쳐먹는 사채업자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뭐, 당장 내가 손해 보는 것도 없고.

게다가 염동력이면 끝내주게 쓸 만할 것 같은데.

역시 고민을 안 할 수가 없는 제안이다. 나는 마스크 봉지를 꽉 잡은 채로 제법 길게 고민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무리한 보수는 요구하지 않으니까.”

퍽도 걱정을 안 하겠다. 우리 엄마가 저런 놈은 상종도 하지 말라고 했는데.

나는 썩은 얼굴로 눈동자를 굴렸다. 곧 밤이 온다. 밤의 아포칼립스 월드는 낮의 아포칼립스 월드보다 배로 위험하다.

“야, 이름이 뭐야?”

고민은 길지 않았다. 사실 길게 고민할 것도 없었다.

뭉개진 몬스터의 파편을 뒤집어쓸 때마다 토기가 치밀었다.

하루 종일 한 마디도 안 하는 날이 다반사였다. 또 어리고 약해 보인다고 같은 인간에게 습격을 당한 적도 있었다.

“내 이름?”

저 녀석은 날 따라다니면서 그걸 쭉 지켜봤고, 아마 저 제안을 했을 땐 거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을 거다.

“그냥 PK라고 불러.”

내가 제 제안을 수락하지 않을 리가 없다고.

“앞으로 잘 부탁해.”

신이 난 얼굴의 PK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그게 바로 전국구 블퀴벌레인 저 인간과 아는 사이가 된 사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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