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죄송한데 제가 일반인이라서요-39화 (39/175)

제39화

게이트에 도착한 건 몇 분 전이었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손⋯⋯ 아니. 헌터님. 현재 원활한 던전 게이트 입장을 위해 주위를 비워 둔 상태입니다.”

도착하자마자 헌터 협회 한국 지부장 아재가 냉큼 달려와서는 고개를 숙였다. 아, 예. 아저씨 얼굴 자주 봅니다? 그만 뵙고 싶은데 이놈의 나라랑 게이트가 절 놔주질 않네요.

“현재 다섯 길드와 S1팀이 던전 안으로 진입한 상태입니다. 2차 투입은 내일 오전 아홉 시로 잡아 두고 있습니다.”

전투 능력이 전무한 지부장이 땀을 뻘뻘 흘리며 눈치를 봤다. 나는 단말기로 유능한 심부름꾼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그의 말을 흘려들었다.

필요한 게 있는데. 그것 좀 가져와라. ◀

▶ 뭔데?

우연 단말기.◀

“물론 헌터님께서 원하신다면 2차 투입을 미룰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게이트 확산이 얼마 남았는지 모르는 상황이기 때문에-”

“예. 2차 투입은 원하는 대로 하세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90도 직각 인사를 한 지부장이 그다음 설명을 시작했다. 앞서 간 길드가 새벽, 낙원, 사헌, 백천, 일연이라는 소리였다. 그냥 5대 길드라고 하시지 그래요.

“정보 통제 또한 이미 마친 상태입니다. 헌터님의 정보가 밖으로 샐 일은 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던전 안에서 새게 될 경우에는 저희도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건 뭐, 상관없고요.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나는 단말기 화면을 보며 물었다. 지부장이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입니다. 편하게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자정에 누가 올 거거든요.”

▶ 자정에 갈게.

“혹시 그분의 성함이⋯⋯?”

“직접 들여보내 주지 않으셔도 알아서 들어올 거니까 알고만 계시면 됩니다.”

“그것만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옙. 바로 진입할게요.”

“감사합니다. 무사 귀환을 빌겠습니다.”

다시 한번 허리를 직각으로 숙인 지부장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안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이럴 때는 뭐라도 준비해 놓는 게 좋다.

단말기 가져오란 빌미로 특성 쓸 만한 심부름꾼도 불렀으니 괜찮겠지. 나는 신발 끈을 꽉 졸라매며 화환에게 턱짓했다.

“갑시다.”

“예?”

“S1팀 저 안에 있다는데 님만 내뺄 생각은 아니죠?”

당황한 얼굴의 화환이 얼렁뚱땅 끌려왔다. 그렇게 둘이서 던전 게이트에 진입한 게 고작 몇 분 전.

[■급 게이트에 입장하셨습니다.]

[시스템이 활성화됩니다.]

[교만왕의 영토에 진입하였습니다.]

[주변 환경 데이터를 수집 중입니다.]

[데이터 확인 중….]

[교만왕 루시퍼의 ■■ 영역으로 추정.]

[추정 게이트 랭크 ■]

[추정 던전 랭크 ■]

[추정 몬스터 랭크 A+~S]

[추정 보스 랭크 ■]

[추정 종합 랭크 ■]

[추정 ■급 던전 - ‘별이 추락한 나락’에 진입하였습니다.]

으레 떠오르는 정보가 다 까만 네모투성이다.

가진 정보가 아예 없다는 뜻이겠지. 그나마 몬스터 랭크가 나왔네.

이거 2차 투입이면 몰라도 3차 투입 인원들은 다 죽겠는데.

그리고 그런 것을 굳이 따지지 않아도 게이트 안은 완전 지옥이었다.

아아아아-!

어디선가 끊임없는 비명이 들려온다. 사람 심장 선득하게 만드는 게 참 끝내주네 그래.

“여기 왜 이렇게 시원하냐. 뼈까지 시원하네.”

나는 목덜미를 긁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덩달아 끌려온 화환은 추위에 내성이 없는지 아주 얼어 죽기 직전이었다.

“저기요, 정신 좀 차려 보세요. 여기서 눈 감으면 얼어 죽어, 이 사람아.”

“아.”

멱살을 탈탈 털린 화환이 정신을 차렸는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여기가 각성자한테도 추운 공간이긴 하나 보다. 정신 못 차리는 걸 보니까.

“죄, 죄송합니다. 너무 추워, 서.”

이가 딱딱 부딪히는 소리만 들어도 추운 게 느껴진다. 이래서 신체 강화 특성이 좋아. 남들 추울 때 뼛속까지 시원하고 말잖아.

끝없이 새카만 공간이다. 나는 오랜만에 피어싱을 만져 아공간을 열었다. 던전에 드나드는 헌터라면 어느 상황이든 준비가 되어 있어야지. 사실 안에 별거 없다.

나는 아공간 안에서 흔드는 핫팩을 꺼내 인간 동태에게 던져 줬다. 핫팩을 받은 화환이 물건을 손으로 몇 번 더듬더니 사용처를 깨닫곤 미친 듯이 흔든다.

“어디 보자.”

발밑이 미끄러운 걸 보니 이건 땅이 아니라 얼음덩어리군. 눈은 내리지 않는데 바람은 미친 듯이 불고, 엄청나게 춥다.

다른 각성자보다도 훨씬 좋은 눈이 던전 안을 쭉 살핀다. 끝없이 펼쳐진 대빙원. 하지만 여긴 구렁이다.

어둠에 적응하고 보니 구조를 대충 알 것 같았다. 대빙원을 중심으로 가장자리를 벽이 막고 있구나. 중앙 쪽은 더 파여 있고.

그 정도는 바람 소리로도 충분히 짐작이 가능했다. 저 비명이 거슬려서 귀가 어지간히 좋지 않으면 불가능하겠지만.

아아아-!

이건 어디서 들리는 거지. 중앙?

뭐든 됐다. 이 상황에서 우선적으로 확보해야 할 것은 안전이 보장된 거점이다.

다른 헌터들도 그 생각을 하면서 움직이고 있겠지.

“일단 거점부터 마련하죠.”

나도 똑같은 생각을 하며 화환을 번쩍 들었다. 졸지에 짐짝처럼 매달린 화환이 무어라 입을 열었지만, 내가 땅을 박차고 달리는 게 더 빨랐다.

바닥이 빙판이라 자꾸만 미끄러진다. 이러면 힘줘서 밟는 수밖에.

콰직, 콰직.

땅에 발붙일 때마다 얼음이 박살 나는 소리가 났다. 달리니까 보통 시원한 게 아니네. 이제 뼈 안까지 시원한데.

“잠깐만요! 잠시만요! 천천히 가 주십시오! 으아아악-!!”

짐짝처럼 들린 화환이 목청 좋게 비명을 질러 댔다. 나는 짐짝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며 앞으로 쭉쭉 나아갔다.

본래 던전에서는 잘 준비된 몬스터가 떼로 몰려나온다. 그건 누군가의 군단이 침공할 목적을 가지고 오기 때문인데, 이번 던전은 조금 달랐다.

군단이 아니라 교만왕의 ■■ 영역이라고 했지. 게이트 분석도 중간에 한 번 바뀌었다.

이걸 극야가 준 정보와 합쳐 보면 색욕왕이 중간에 손을 대서 바뀐 게 분명한데⋯⋯.

왜 굳이 내부 차원에 게이트를 만들어야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것도 우리나라에.

딴 나라에 만들었으면 좀 좋아? 왜 굳이 여기에 파셔서 사람을 추위에 떨게 만드는 건데.

나는 거칠게 부는 바람을 뚫고 벽 끝으로 바짝 붙었다. 바람 소리가 조금 다른 걸 보아 저기 뭔가 있다.

“아아악-!!”

잘 들어 보니 뭔가⋯⋯.

“살, 살려 주세요-!!”

인간의 언어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살려 달라고 말하는 것을 보니 확실히 누가 있다.

나는 얼굴 위 반가면을 한차례 점검하곤 그대로 땅을 박찼다. 소리가 점점 가까워짐과 동시에 몬스터의 형체가 보인다.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놈이다.

“야! 비켜!!”

저놈 대가리에 발차기 메다꽂을 거니까!

“그러다 처맞는다!!”

도망갈 타이밍 보지 말고 그냥 물러나라고!

나는 한 팔로 들고 있던 화환을 냅다 집어 던진 후 몬스터 대가리에 그대로 몸을 날렸다.

크워어어-!!

이마를 정통으로 맞은 몬스터가 포효하며 뒤로 넘어간다. 쿠당탕 소리가 나는 걸 보니 세게 박은 모양이다.

떼잉, A+~S급 몬스터가 돼서 말이야, 이렇게 말랑해서 되겠어?

나는 몬스터의 위에서 내려와서 아까 잡혀 있던 사람을 구했다. 냅다 집어 던진 화환도 정신을 차렸는지 말을 하고 있었다.

“헌터님! 하마터면 죽을 뻔했지 않습니까!”

“헌터님이 빌빌대시니까 그렇죠. 잘 따라왔으면 안 던졌어요.”

“아직 준비도 안 됐는데 헌터님께서 억지로 끌고 들어오셨잖아요!”

그야 나만 들어가긴 꼽잖아. 그리고 S1팀 안에 있다며? 어차피 들어오긴 들어와야 했네.

그리고 준비 안 한 채로 나랑 가는 게 준비 한 채로 너희 팀이랑 들어가는 것보다 안전한 거 모름? 이거 물에서 건져 놔도 봇짐 내놓으라고 할 놈이네.

“거, 불만 그만 표하시고 S1팀이나 찾아보세요. 여기 사람들 있으니까 물어보든가.”

인원수가 좀 되는 거 보니까 다섯 길드나 S1팀 중 하나일 것 같은데?

근데 새벽이나 낙원이었으면 진작에 난리 났을 테니까 나머지 넷 중 하나인 듯.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사람들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아까 구조한 사람이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저희가! 저희가 S1팀입니다!”

오. S1팀이라고?

“선배! 방금 말씀하신 거 선배 맞으시죠? 그럼 지금 절 구해 주신 분이 손가락테크닉 님이신가요?!”

주변이 싸해졌다. 나는 조금 남은 인정마저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구출한 인간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거기 날강도 있냐?”

자고로 아랫놈이 잘못하면 윗놈을 후려쳐야 한다고 했다. 나는 아랫놈에게 잘못을 묻지 않는 대신 윗놈을 불렀다.

대답은 빠르게 돌아왔다.

“여기 있습니다.”

목소리가 답지 않게 진중하다. 조금 전에 팀원이 잡혀서 그런지 분위기가 더 다운되어 있었다.

밖에서처럼 농담 따먹기 할 상황이 아닌 건 알겠군. 나는 입 밖으로 꺼낼 뻔했던 농담 50선을 도로 집어넣었다.

“일단 자리부터 옮기자.”

나야 이 동네 환경이 시원하고 말지만, 저들에겐 시원한 수준이 아니겠지.

안 그래도 거점을 마련하려고 했다. 마침 몬스터 사는 곳 저기가 딱이네.

나는 기절한 몬스터를 옆으로 치워 두고 동굴 안쪽으로 들어갔다. 뒤따라오는 S1 팀원들이 쑥덕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저 사람이 진짜 핑거킹이에요?”

“소헌 선배가 데려왔으니 맞겠지. 그런데 생각보다 더 멋있는 목소리네.”

“정말요? 약간 귀엽지 않나?”

“야, 핑거킹한테는 반가면 있잖아. 우리가 보고 듣는 건 다 저 사람 실제 모습이 아니라고.”

“맞다. 그렇지.”

조금 전까지 위기에 처했던 사람들답지 않게 태평하다. 이것이 바로 K-안전 불감증의 실체? 손가락테크닉이 알아서 해 주겠지 같은 마인드?

“다들 조용히 해. 안에서 몬스터 떼가 나올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정신머리 박힌 인간이 없는 건 아닌지, 곧바로 옳은 말이 튀어나왔다.

“손전등 필요하십니까?”

손전등을 위로 올려 제 얼굴을 비춘 날강도가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어우, 귀신인 줄 알았네. 나는 고개를 저으며 거절의 말을 꺼냈다.

“손전등은 됐어요.”

손전등보다 확실한 게 있으니까.

나는 검지를 뻗어 허공을 그었다. 모든 것을 정화하는 푸른 불꽃이 나풀나풀 피어오른다.

바람이 안 부는 곳에서 불을 피우니까 좀 낫다. 하도 까만 곳에 있어서인지 불을 피우자 눈이 아렸다.

“모두 이쪽으로!”

체온 유지에 불만큼 좋은 게 없지. 나는 불꽃이 사라지지 않게 유지하며 몸을 움찔거리는 몬스터를 한 대 더 후려쳤다. 털이 북실북실한 게 아주 깜찍하구만.

그나저나⋯⋯.

「“내게로 와.”」

속삭이는 목소리가 유혹적이다. 넘실거리는 푸른 불꽃이 한 방향을 향해 고개를 기울인다.

「“네가 알고 싶은 것은 여기에 있다.”」

불꽃을 무리하게 쓸 때마다 들었던 목소리. 아주 가까운 곳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동굴 안에 S1팀 인간들을 내버려 두고 밖으로 잠깐 나왔다. 움푹 팬 중앙에서 미약한 빛이 아롱거린다.

「“중앙으로 오거라.”」

불꽃의 원래 주인이 힘의 파편을 부른다.

아무래도 낙원 측이 말한 이변을 확인하려면 중앙으로 가야 하는 모양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