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화
상황이 복잡했다. 사실 상황이 복잡한 건 아니고, 내 심정이 복잡했다.
상황이 복잡할 게 뭐 있어. 그냥 여기저기서 하라는 대로 하면 되는데. 몸 튼튼하지, 제 몸 하나 건사할 능력도 있지.
심지어 내가 활약할 길까지 남들이 싹 다 정해 준다. 차원 학회 영감탱이들이 자료 수집해 오라고 날뛰지, 마찬가지로 자료 수집이 필요한 헌터 협회에서도 독촉해 대지.
거기다 이번에 뭐냐, 그. 새벽 측에서도 와 달라고 굽신거리지 않았나? 인기 하나는 우주 대스타가 따로 없다. 연희는 아직 애긴데. 엄마랑 공원 가서 비둘기 밥이나 주고 싶은데.
그렇다고 조만간 그냥 상급 게이트도 아니고 웨이브가 터질지도 모른다는데 나 몰라라 할 수도 없고. 당연히 나 몰라라 할 수도 없지.
돈 주는 쪽에서 저기 다녀오라잖아. 원래도 갈 생각이었다.
근데 여기에 극야가 재를 뿌렸다. 남이 차려 준 밥상에 냅다 재를 뿌렸다.
심지어 재를 뿌린 것도 모자라 안대까지 벗겨 줬다. 나는 평소처럼 안대 끼고 밥숟가락 물려다가 밥에 재가 뿌려진 걸 보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게 무슨 소리냐?
“알겠으니까 세 줄 요약 좀.”
그런 소리다.
저 인간이 끔찍하게 마음에 안 든단 소리.
저게 차인지 각설탕인지 알 수 없는 상태의 음료를 마신 편애가 차를 입 밖으로 줄줄 흘린다.
웩. 더러워.
나는 미간을 구기며 허리를 곧게 폈다. 조금만 더 삐딱하게 앉아 있다간 척추 수술하러 가게 생겼다.
“색욕왕이 차원 융합을 앞당기려고 하고 있다. 교만왕이 이번 게이트에 간섭한다. 두 왕으로 인해 재앙이 일어날 것이다.”
극야가 손가락을 접으며 차근차근 세 줄 요약을 했다. 일부러 도발한 보람이 없는 대답이었다. 나는 여전히 미간을 구긴 채로 그를 노려보았다. 뭘까. 뒤가 너무 구린데.
신체 강화 특성은 육감까지 상승시켜 주진 않지만, 나는 제법 감이 좋은 편이었다.
사실 감이 좋지 않았다면 진작에 죽었을 거다. 가끔 엉뚱한 곳을 때리는 경우도 있긴 한데, 결과가 나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어쨌든 나는 내 감을 퍽 신뢰하는 편이었다.
“이해하셨나요?”
시비를 털었는데도 여전히 나긋나긋한 목소리다. 님 지금 절 애새끼 취급 중이죠. 표정이 딱 손주 재롱 보는 할머니였다.
“유감스럽게도.”
이상한 인간은 피하는 게 상책이다. 사이비 조사하러 갔다가 사이비 된 놈들이 한두 명인가? 나는 이 사이비 집단에서 하루빨리 탈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내가 이 동네에 직접 걸어 들어온 것 같긴 하지만, 원래 처음엔 다 그런 법 아니겠는가. 누가 쫄딱 망할 거라고 생각하고 로또를 사? 다 1등 하면 뭐 할지부터 생각하고 로또를 사지.
“용건 알았으니까 이만 갈게요. 저 때문에 오늘 업무에 지장이 생기셨을 텐데 부디 좋은 교화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더 묻지 않아도 괜찮으신 건가요? 저는 전하의 용건이 이게 다가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여유 넘치는 미소가 재수 없다. 저 얼굴이면 통장을 바쳐도 좋겠다고 생각했었나. 나는 과거의 나에게 말해 주고 싶었다. 얘야, 사람은 얼굴도 중요하지만 인성도 참 중요하단다.
껍데기가 끝내주면 뭐 하겠는가. 당연히 끝내주지. 하지만 거기에 인성까지 끝내주면 더 끝내주지 않을까?
좋아하는 연예인이 인성 논란이 터지면 마음이 팍 식는 게 이런 것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내 마음속 한구석에 조금 남아 있던 호의마저 싹 지워 버렸다.
“그건 그런데 그쪽한테 물어보긴 싫네요. 그냥 네정좋 님 불러서 물어볼게요.”
과한 반응이지만,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냥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기이한 기시감이 몸을 휘감았다. 저 인간이 웃는 꼴만 보고 있으면 소름이 돋았다.
미지로부터 오는 공포는 늘 공포 영화 단골 소재감이었다. 사람은 모두 자기가 알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아쉽네요. 말씀 더 나누면 좋았을 텐데.”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내게 호의적이었던 극야가 껄끄러운 것을 위와 같은 것이라고 정의했다.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인물인지 대충 파악하는 게 당연한 수순이지만.
“주하야.”
“네.”
“배웅해 드려.”
저 사람은 아무리 봐도 모르겠다. 첫 만남에 헛소리를 하지 않나, 차원 학회도 모를 법한 이야기를 던지지 않나.
내가 대뜸 재 보기에는 너무 알 수 없는 인간이었다. 위업이 대체 몇 개냐? 로맨스로 장르 바꾸기, 세계의 비밀 알려 주기, 미래 예견하기. 와! 트리플 크라운!
사람이 저렇게 한결같이 수상하기도 어려운데. 나는 네정좋의 스킬로 집에 도착한 뒤에도 꾸준하게 극야 생각을 했다.
아무리 봐도 수상하다. 내 인생 장르는 랭킹 1위 힘숨찐 유유자적 헌터물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면 회귀자의 특급 헌터 컬렉션물일지도.
그래서 이 모양 이 꼴인 거지! 낙원 애들 다 기깔난 애들이잖아! 헐;; 알고 보면 이 동네 주인공은 힘숨찐 랭킹 1위가 아니라 극야였단 말인가?!
머릿속에서 한 편의 드라마가 재생됐다. 나는 엄마한테 등짝을 얻어맞으면서도 꿋꿋하게 드라마를 썼다.
그리고 그 드라마가 진실이라는 것을 깨달은 건, 시일이 조금 지난 후의 이야기다.
* * *
차원 학회.
다른 차원의 존재가 확인되고 생긴 학문과 그 학문에 목숨 건 인간들의 집합소.
기존에 인간 사회를 지배하던 과학의 시대는 갔다. 일단 다른 차원과 관련되면, 혹은 각성자와 관련되면 우리가 아는 과학의 범주를 벗어난다.
하늘을 날고 불을 뿜어 대는 각성자들한테 물리 법칙의 잣대를 들이밀어 봤자 뭐가 나오겠냐.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바야흐로 신개념 학문의 시대가 온 것이다.
▶ 아레스 님
▶ 제 메시지 보고 계세요?
▶ 아레스 님이 먼저 자료 가져오라면서요! 지금 이 귀중한 자료를 세 줄 요약 시키는 게 말이 돼요?!
분노의 메시지가 투두두두 올라온다. 나는 침대에 누워 과자나 까먹으면서 차원 학회 측 담당자의 메시지를 보고 있었다. 아, 뭐. 월급도 받으면서 하라면 해 올 것이지 말이 뭐 그렇게 많아.
그러니까 A부터 Z까지 설명하지 말고 ◀
핵심만 말하라니까 ◀
지금 tmi까지 떠드니까 세 줄 요약 시키는 거잖아 ◀
투 머치 인포메이션. 오케이?
외국 생활 3년 차에게 영어를 쓰려니까 쑥스럽다. 왕년에는 토익 공부도 했었는데 말이지. 나이가 드니까 공부가 어렵더라고?
지금 메시지 나누고 있는 상대방이 들으면 정신 나갔냐는 소리를 할 말이었지만, 나는 꿋꿋했다.
나 차 타야 하니까 빨리빨리 말해◀
그래서 외부 차원의 봉인이 뭔데? 색욕왕이 밀린다는 소리 찐임?◀
원래 현실에서 얌전한 사람도 자판 앞에 서면 여포가 되는 게 당연한 일 아니던가. 사회적 체면을 위해 억누르고 있던 본성이 전자 기기만 잡으면 툭툭 튀어나왔다.
요즘 세상에서는 인성이 제일 중요하다던데. 미안해, 엄마. 우리 집 가정교육 일단 실패한 듯.
아니 근데 세력 구도 같은 걸 대체 어떻게 알아내는 거야?◀
스파이라도 심었어?◀
그 현란한 얼굴이 없는 지금 생각해 봐도 수상하다. 외부 차원에 직접 나간 것도 아닌데 그런 정보는 대체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심지어 그쪽은 옛날이야기까지 술술 불었다. 그 동네 역사 같은 건 그 동네 출신 아니면 모르는 게 정상 아닌가.
아무튼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 정도면 새벽이 깜찍해 보일 수준인데.
▶ 스파이요?
▶ 스파이가 있긴 하죠
잠시 답장이 없던 대화 상대가 한참 뒤에나 되어서 답장했다.
헐. 스파이가 진짜였어? 나는 뒤통수를 때리는 충격과 공포에 먹던 과자를 떨어뜨렸다.
▶ 그런데 이건 메시지로 못 알려 드려요
▶ 1급 기밀이거든요
뭔데 1급 기밀까지 나오는 건데. 극야는 나한테 뭘 말하고 간 거지?
나 VVIP 아니야? 이래도 안 됨? ◀
알면 귀찮아지는 무언가에 접근한 느낌이었다. 나는 일단 침착하게 딜을 시도했다.
▶ 당연하죠;;
▶ 저 이거 함부로 발설했다간 제거당해요.
▶ 다시는 제 얼굴을 못 보실 수도 있다고요;; 아시겠어요?
제거 소리까지 나오네. 윗줄 영감탱이들이 끈질기긴 해도 밥값 하는 애를 함부로 자르지는 않는데.
안 봐도 되는데 ◀
하지만 긴박한 상황일수록 남을 놀리는 맛이 있지.
누가 보면 남 목숨 갖고 놀리냐며 소리 지를 대답이었다.
▶ 말이 너무 심하시네요.
▶ 화나게 하지 마세요.
아니나 다를까 반응이 바로 돌아온다. 나는 농담이라는 답장을 빠르게 남긴 뒤 서둘러 말을 돌렸다.
그래서 색욕왕이 밀리고 있다는 소리도 맞고, 외부 차원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것도 맞다는 소리지? ◀
근데 출처는 1급 기밀이라서 발설 못 하니 궁금하면 직접 와서 들어라? ◀
차원 학회 측에 연락해 물어본 사실은 저거 딱 두 개였다.
첫째, 저번에 발표했다는 세력 구도에서 색욕왕이 밀리고 있는 게 맞는가. 둘째, 외부 차원의 움직임에 관한 것.
외부 차원에서는 틈만 나면 내부 차원으로 들어오지만, 우리는 외부 차원으로 나갈 방법을 알지 못했다.
따라서 우리가 가진 것은 외부 차원에 나갔다가 귀환한 ‘최초의 귀환자’의 수기뿐인데, 이것 하나만으로는 외부 차원을 완전히 알 수 없었다.
당연하지. 저건 아주 옛날 일이니까. 저 사람의 수기에 적힌 외부 차원은 옛 영주들이 살아 있는 시대였다.
▶ 네 그니까 협회 통해서 자료만 보내지 마시고 좀 오세요.
▶ 윗선에서 아레스 님 기다린다니까요.
그렇게 말하면 누가 가. 나는 미간을 팍 찌푸린 채로 단말기 화면을 껐다.
“연희야! 엄마 먼저 내려갈 테니까 문 잠긴 거 확인하고 와!”
엄마가 집 안 불을 끄더니 크게 소리쳤다. 나는 다 먹은 과자 봉지를 정리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화장실 들렀다가 갈 테니까 안 내려오면 전화해!”
엄마 준비 끝날 때까지만 뒹굴기로 했으니까 슬슬 일어나야지.
나는 미리 가져온 가방에 내 짐을 주섬주섬 챙기며 단말기 화면을 기울였다.
[오산 지역 ? 게이트 확산까지 (71:32) 추정.
던전:웨이브 확률 10:0 추정.
추정 게이트 랭크 ■. 추정 피해 랭크 ■. 추천 특성: ■.]
하루 전까지만 해도 정확한 랭크가 떠 있었다. 하지만 극야와의 대화 이후로 랭크가 변화했다.
기존에 모은 데이터로는 분석할 수 없다는 뜻이겠지. 협회 놈들 지금도 머리 열심히 굴리고 있겠구먼.
[날강도] ▶ 핑거킹
[날강도] ▶ 야 힘숨찐
[날강도] ▶ 아 읽씹하지 말라고!! 아!!!
게다가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건 그쪽만이 아니었다. 우리나라에 역대급 게이트가 열리게 생겼는데 누가 제일 킹받겠는가. 당연히 이 나라 사람들이지.
헌터 협회 본부는 그래도 미국에 있다. 이 나라 쫄딱 망해도 쟤들 목까지 날아가진 않는단 소리.
하지만 이 나라 사람은? 헌터들이 던전 진압 못 하면 쫄딱 망한다. 일반인은 왕을 보는 것만으로도 큰 충격을 받지 않을까.
왜 ◀ [손가락테크닉]
나 지금 부산 바캉스 가는 중 ◀ [손가락테크닉]
교만왕의 군단이 바다를 건널 수 있었나. 아. 어차피 바다 안 건너도 다른 나라 갈 수 있으니까 유라시아가 쫄딱 망하겠네.
나는 가방 안에 카프리 썬을 구겨 넣고 지퍼를 잠갔다. 가스 불 잠갔는지도 확인했다. 화장실 문도 닫았고, 창문도 다 닫았고.
지이이잉-
단말기가 미친 듯이 울렸다. 나는 날강도의 폭풍 같은 메시지 테러를 무시하며 집 밖으로 나섰다. 철컥. 문 잠겼는지까지 확인 완료.
바깥 날씨가 끝내줬다. 그야말로 폭풍전야가 따로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