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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한데 제가 일반인이라서요-35화 (35/175)

제35화

“제가 실언을 했네요. 죄송합니다.”

극야의 보랏빛 눈이 언제 혼자 번뜩였냐는 듯 눈꺼풀 밑으로 쑥 자취를 감춘다.

나는 생각보다 더 고분고분하게 구는 그를 보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 기선 제압하려고 건방지게 나간 건 맞는데, 이렇게 굴면 내가 천하제일 안하무인 같잖아.

방금 그거 힘만 믿고 나대는 판소 일짱 같지 않았어? 사이다물 깽판 츄리닝 랭킹 1위 같은 거.

“저희는 이번 게이트에서 발생할 이변을 감시하기 위해 움직일 예정입니다.”

“이변?”

“네. 혹시 차원 학회에서 발표한 외부 차원 세력 구도에 대해 알고 계신가요?”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귀를 확 사로잡는다. 어떻게 하면 청중의 시선을 주목시킬 수 있는지 아는 목소리.

이야, 저 목소리로 강연을 하면 떼돈을 벌 텐데. 아닌가. 유튜브 하면 더 벌겠지.

나는 새삼 비현실적인 목소리에 짧게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외부 차원 세력 구도라면 차원 학회 놈들이 끈질기게 알려 주는 그거 아니냐?

“일곱 개의 나라로 쪼개져 있죠. 각각을 다스리는 것은 우리 차원을 침공하는 일곱 왕이고요.”

“맞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도 아시나요?”

그거야 뭐⋯⋯.

“땅따먹기에서 이기려고?”

나는 별것 같지도 않은 질문을 심드렁히 받아쳤다.

일반인이나 저랭크 헌터는 보통 모르지만, 고랭크 헌터가 되면 어떻게든 알게 되는 이야기다.

모르면 인생 헛산 거지. 차원 학회에서 접근할 가치도 없을 정도로 허접하다는 거잖아.

우리 차원과 저쪽 차원은 긴밀하게 이어져 있다. 저번에 네정좋에게 들은 것처럼 두 차원은 쌍둥이 차원이니.

애초에 차원 단위로 떨어져 있는 주제에 침공이 가능한 게 웃기지 않냐. 혹시 테라포밍이라는 단어 아시는지?

저쪽이 원하는 것도 그런 거였다.

일곱 세력이 한창 땅따먹기하는 와중에 군침이 싹 도는 크기의 먹잇감이 발견된 거지.

심지어 거기 사는 애들은 약해 빠져서 만만하기까지 한 거였다.

너무 약해 빠진 나머지 조금만 힘쓰면 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게 너무 달콤한 파이였다.

다른 놈들도 똑같은 생각을 할 정도로.

약한 걸 잡아먹고 몸집을 불리는 건 자연의 당연한 순리. 우리 차원에는 그렇게 개미 떼가 미친 듯이 몰려들었다.

“잘 알고 계시네요.”

웃는 얼굴로 미모 공격을 한 극야가 네정좋을 향해 손짓했다.

곧이어 펼쳐지는 건 외부 차원의 지도.

“이건?”

외부 차원에 직접 가 본 적은 없지만, 이게 외부 차원의 지도라는 건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쪽 세계의 세력 구도입니다. 보시면 색욕왕의 세력이 빠르게 줄어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는 거대한 대륙의 우측 아래, 색욕왕의 세력이 자리한 위치를 보았다.

봉인 지역이라고 까맣게 칠해진 구획과 가장 가까운 땅이다.

적힌 것에 따르면 지난 300년간 가장 많은 영토를 빼앗긴 땅이기도 했다.

특이점은 최근 몇 년 만에 300년간 빼앗겨 온 땅만큼이나 많은 땅을 빼앗긴 것인데, 너무 급격한 변화라 이상하게까지 보였다.

“좀 이상하네요. 최근에 빈집 털이라도 당했나.”

나는 턱을 만지작거리며 지도를 톡톡 두드렸다. 아니면 이 세력 일짱 건강에 문제라도 생겼대?

저 동네 왕 정도면 인간과는 격이 다른 존재인데. 흔치 않은 일이다.

“빈집 털이를 당하긴 했죠. 전하가 가면 만든답시고 쟤들 족족 털고 다녔잖아요. 거기다 새벽을 비롯한 추종자 무리가 전하 따라 한답시고 뒤이어 털고 다녔지.”

제 앞의 찻잔에다 각설탕 탑을 쌓던 뉴페이스가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입을 연다.

짙은 다크서클이 인상적인 게 어디서 많이 본 인간이었다.

“보통 존재를 걸고 넘어오지는 않으니 저 정도에서 끝났지만, 실제였으면 저 동네는 아이랑 노인밖에 안 남았겠어요.”

남자가 말을 하며 고개를 까딱인다. 부슬부슬한 머리카락이 고개를 흔들 때마다 같이 흔들렸다.

지나치게 선명한 녹색 눈이 섬뜩하니 기분이 나빴다.

“그만.”

입술 끝이 미미하게 굳은 극야가 그를 제지했다. 나는 얌전하게 꼬리를 말고 들어간 남자를 보며 아까 느낀 익숙함의 정체를 깨달았다.

“댁 편애죠?”

질문을 들은 남자가 이를 드러내며 씩 웃는다. 대답은 안 들었지만 확신했다. 저거 편애다.

하긴 낙원 수뇌부 모임에 편애가 있지, 누가 있겠어. 마침 러브리스, 네정좋까지 다 있네. 그야말로 극야가 편애하는 리스트 아니냐.

그럼 이번 게이트에 네 명 다 들어가는 건가. 이변이라는 게 대체 뭐길래? 나는 지도 끝을 손톱으로 갉작거리며 고민했다.

“말씀하시는 거 보니까 색욕왕이 몰린 게 이변이랑 관련이 있나 보네요.”

봉인 지역과 가장 가까운 색욕왕의 영토. 가장 수세에 몰린 군단. 나한테 얻어맞고, 다른 왕에게도 얻어맞은 비운의 세력.

“게이트는 저들이 여는 거죠. 색욕왕 이야기를 괜히 꺼내셨을 리는 없으니 이변의 축이 되는 건 색욕왕일 테고. 그럼 이변이라는 건 색욕왕이 넘어오는 건가요?”

지구는 무척이나 달콤한 파이다. 아무리 수세에 몰렸어도 지구 세력을 꿀꺽하면 판도를 바꿀 수 있을 거다. 색욕왕이 원하는 것은 지구 침공인가?

나는 모인 정보로 내 기준에서 제법 그럴듯한 추측을 해냈다. 하지만 추측은 늘 추측일 뿐인지.

“아니요.”

내 추측은 장렬히 빠꾸 당했다.

“그럼 뭔데요.”

거 사이비 교주 양반. 사람 의견 빠꾸시키고 아니요만 달랑 던져 놓으면 다야?

님 요새 트렌드 모름? 요새 트렌드 세 줄 요약이야, 세 줄 요약.

소설도 웹소설로 보는 시대에 세 줄 요약도 안 하고 시간을 끌다니. 시간을 끌었으면 재깍재깍 대답을 내놔야 할 거 아냐?

나는 괜히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자세를 비틀었다. 대놓고 거드름 피우는 자세였다.

“외부 차원의 일곱 왕은 가장 위에 설 단 한 명을 가리기 위해 끊임없이 싸워 왔습니다.”

눈을 가볍게 내리깐 극야가 시를 낭독하듯 잔잔한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지금은 외부 차원의 영토가 일곱 왕의 왕국으로 완전히 굳어졌지만, 먼 옛날에는 일흔두 개의 영지로 갈려 있었지요.”

극야의 말에 맞춰 네정좋이 다른 지도를 꺼낸다. 봉인 지역이 까맣게 칠해지지 않은 지도. 일흔두 개의 조각으로 나뉜 외부 차원.

“지금은 고대 신이나 옛 영주로 불리는 이들입니다. 최초의 귀환자가 놋쇠 단지에 봉인해 버렸지만, 그 영혼만은 아직 봉인 지역에 남아 떠돌고 있습니다.”

극야의 손가락이 이전 지도의 봉인 지역을 가리킨다. 나는 집중력을 쏟아 극야의 설명을 경청했다.

“봉인된 옛 영주들은 아주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들입니다. 과거 옛 영주였던 지금의 색욕왕이 일곱 왕 중 하나인 것을 보면 알 수 있죠.”

“잠깐, 질문. 옛 영주들은 다 봉인된 게 아닌가요?”

“다 봉인된 게 맞습니다. 누군가의 실수로 인해 색욕왕만 유일하게 봉인에서 풀려났을 뿐이지요. 따라서 지금 봉인 지역에 존재하는 놋쇠 단지는 일흔 한 개입니다.”

그런 엄청난 일이.

나는 잠자기 전에 신화나 전설 따위를 듣는 어린이처럼 과몰입했다. 극야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일곱 왕이 지배하는 지금의 외부 차원은 안정기이지만, 고대에는 하루가 다르게 세력의 판도가 바뀌는 혼란기였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부하는 늘 소모품이고, 외부 차원은 그저 강자 존입니다. 결국 끝에 가서 남는 건 단 하나죠. 여기서 질문드려도 괜찮을까요?”

“해 보세요.”

“옛 영주들은 지금의 왕과 비슷하거나 더 높은 수준의 강자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구도에서 한계에 내몰린 색욕왕이 판도를 뒤바꿀 방법은 무엇일까요?”

극야가 묘한 미소를 띤 채로 물었다. 왕들과 색욕왕, 색욕왕과 옛 영주들.

나는 핑글핑글 도는 머리로 그럴듯한 추측을 다시 시작했다.

왕이 고작 일곱밖에 없으니 일대일 맞다이는 보통 일어나지 않겠지. 그럼 군단의 크기가 싸움의 승패를 가른다.

하지만 색욕왕은 고대 옛 영주 중 하나.

왕들은 옛 영주가 봉인된 후에야 세력을 갖추게 된 허접들.

순수한 개인의 실력만으로는 색욕왕이 우세다.

그런 색욕왕이 지금의 판도를 뒤바꾸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일단 기존에 굳어진 세력을 어떻게든 망가뜨려야겠지.

군단 대 군단의 싸움도 나쁘지 않겠지만, 그래 봤자 졸개의 싸움. 강자가 필요했다.

내가 색욕왕의 군단을 혼자서 박살 내놓은 것처럼, 상대 군단을 혼자서 박살 낼 수 있을 실력자가.

아. 그렇구나.

순간적으로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가설이 있었다. 나는 재빨리 입을 열어 가설을 입 밖으로 꺼냈다.

“봉인을 부순다.”

봉인만 부수면 하나하나가 군단에 비견될 강자가 쏟아져 나온다.

어차피 마지막에 가서 남는 건 하나랬지.

그렇다면 일곱 명이서 싸우다가 질 바에야 차라리 일흔여덟로 만들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외부 차원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겠지만, 어차피 그대로 갔어도 질 게 뻔하니까.

아수라장에서 새로운 기회를 얻으면 좋은 거고, 지면 그냥 원래 질 걸 지는 거다.

봉인을 푸는 게 맞다. 색욕왕은 봉인을 풀기 위해 움직이는 게 옳아.

하지만 봉인이 그리 쉽게 풀릴 물건은 아닐 테고. 이러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게 아닌가?

나는 미간을 좁히고 곰곰이 고민했다. 그러자 극야가 작게 소리 내어 웃더니 입을 열었다.

“봉인은 쉽게 풀 수 있는 것이 아니죠. 봉인을 깨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봉인의 주체를 부수거나, 봉인을 뒤흔들 만큼 큰 충격을 가하거나.”

봉인을 부술 만큼 큰 충격이라. 봉인의 규모가 어느 정도 되는지는 모르지만, 절대로 작진 않을 것 같은데. 왕보다 센 놈들을 일흔하나나 봉인한 거라니까.

“그리고 봉인에 영향을 주기 위해서는 보통 차원 단위의 충격을 가해야 합니다.”

극야는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이 바로 고민의 해답을 내놓았다. 차원 단위의 충격, 우리 차원과 저쪽 차원이 합쳐지고 있는 현재 상황. 조합하면 간단한 답이 나왔다.

“색욕왕은 두 차원이 하루빨리 합쳐지기를 바라는 거네요. 그렇죠?”

나는 눈을 곧게 치뜬 채로 극야를 향해 물었다. 극야는 변함없이 웃으며 답했다.

“예. 저희는 이번 게이트부터 그 움직임이 시작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색욕왕은 안 넘어온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럼 그 이변이라는 건 정확히 뭐죠?”

“이번 게이트의 주인은 교만왕입니다. 색욕왕의 간섭 자체가 이변이 될 테고요. 아마 재앙이 일어날 겁니다.”

상급 게이트다.

보통 상급 게이트도 마냥 쉽게 볼 것은 아니었는데, 그들의 말에 따르면 왕이 간섭하는 게이트였다.

이 정도면 특급도 뛰어넘어 그냥 대재앙이라 불러야 하는 것 아닌가.

“게이트의 주인인 교만왕이 직간접적으로 간섭할 겁니다. 색욕왕은 이변을 일으키기 위해 간섭하게 될 테고, 그걸 교만왕이 모를 리가 없겠죠. 혹시라도 두 왕이 부딪히게 되면 거대한 재앙이 반드시 일어나게 될 겁니다.”

재앙을 선고하는 사이비 교주. 나는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광경에 주머니에 넣어 둔 지갑을 더듬었다.

진짜 헌터 아니었으면 냉큼 돈부터 바쳤을 듯. 아이고오, 교주님. 저희 집엔 토끼 같은 어머니가 있어요!

“오늘 설교는 아포칼립스 컨셉인가요?”

하지만 나는 차가운 도시의 헌터. 믿지 못할 만큼 엄청난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저 사이비 교주를 무작정 신용할 수는 없는 법이다.

나는 건방진 포즈 그대로 앉아 극야를 노려보며 물었다. 극야는 아랑곳하지 않고 빙그레 웃었다.

“믿어 달라고 무릎 꿇고 호소해도 믿지 않으시겠죠. 지금 시점에서는 늘 그러셨으니까요.”

그가 의뭉스러운 미소를 띤 채로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너는 대체 뭐가 문제냐?

“하지만 게이트 이후 확신을 가지게 되신다면, 그때는 저를 따라와 주세요.”

휴대폰을 손에 쥔 편애가 옆에서 히죽히죽 웃는다. 나는 예쁜 얼굴로 호소하는 극야보다 저쪽이 더 신경 쓰여 미칠 것 같았다.

“저는 녹색 눈의 왕을 만나러 갈 겁니다.”

그건 편애의 눈이⋯⋯ 정말 기분 나쁠 정도로 선명한 녹색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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