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화
“머리만 말고 신체 전체를 드러내 주시면 안 될까요.”
나는 그쪽은 누구냐는 질문을 받고도 태연하게 머리만 들이민 네정좋을 향해 말했다.
“아.”
그러자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이 감탄사를 내뱉은 네정좋이 신발을 신은 채로 등장했다.
세상에, 저게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저런 무례한 짓을! 네놈은 유교 국가의 도리도 모르느냐! 청소할 때 밀대 미는 건 내 몫이란 말이다!
나는 눈을 부릅뜬 채로 네정좋의 신발을 노려봤다. 뜻하지 않게 강렬한 시선을 받게 된 네정좋이 눈동자를 굴려 눈치를 보다가, 조용히 신발을 어딘가로 보내 버린다.
눈치가 아주 없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하긴 없으면 곤란하겠지. 그 인간의 수족 아니던가.
“옆에 계신 이분이 데려다주시기로 했어. 그럼 나 다녀올게.”
외박한 딸내미가 희대의 인성 파탄자 하이 랭커를 불러낸 상황! 그것도 왠지 모르게 공손히 무릎까지 꿇고 있는 상황! 새벽 길드 다녀온다던 딸내미가 낙원 길드 인간하고 같이 있는 상황! 이건 대체 무엇을 뜻한단 말인가!
인생은 스릴 쇼크 서스펜스라더니. 나는 동공 지진을 일으키는 엄마를 바라보며 더듬더듬 손을 뻗었다.
턱.
네정좋의 어깨에 안착한 손이 그의 어깨를 꽉 쥐었다. 상체를 숙이고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이자 바로 대답이 돌아온다.
“갑시다.”
“네.”
대답이 퍽 고분고분하다. 하긴 낙원 인간들 중에 모난 인간이 몇이나 된다고. 차세형이나 혼자 튀었지.
눈앞 풍경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낙원에 가야겠다고 생각한 건 그 메시지를 본 이후부터다.
* * *
“저는⋯⋯.”
지이잉-
입을 떼기 무섭게 단말기가 진동했다. 무겁게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팍 깨졌다. 아오, 이번엔 또 무슨 일인데.
하여간 협회 본부는 도움 되는 게 없다. 맨날 이거 안 된다, 저거 안 된다, 이거 해 달라 하면서 부려 먹기나 하고 말이야.
상급 게이트 출현 경고.
-헌터 협회 본부-
주머니 속 단말기가 끝내주게 뽑혀 나온다. 보라색으로 깜빡이는 아이콘은 헌터 협회 본부에서 직통으로 전달하는 특급 메시지다.
세상엔 수없이 많은 게이트가 있다. 저 게이트는 던전이 되기도 하고, 웨이브가 되어 사람들을 위협하기도 한다.
새로운 것의 발견은 새로운 학문의 시작이 되는 법. 다른 차원의 존재를 알게 된 인간은 새로운 차원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온 게 바로 차원학.
게이트에 드나드는 각성자가 아니면 연구할 수 없는 분야라서 어려움이 크다고 했나.
아무튼 내가 본부에 협조해 정보를 긁어모으는 이유도 저쪽의 연구를 돕기 위해서다.
적을 알면 대처도 쉬워지니 공익적으로 좋지.
[오산 지역 상급 게이트 확산까지 (98:44) 추정.
던전:웨이브 확률 2:8 추정.
추정 게이트 랭크 S. 추정 피해 랭크 SS+. 추천 특성: 시공간.]
이번 게이트는 추정 게이트 랭크보다 추정 피해 랭크가 훨씬 높다.
이런 건 보통 게이트가 웨이브가 될 때 펼쳐지는 현상인데, 아니나 다를까 웨이브일 확률이 8이나 된다.
확실히 이번 게이트 무사히 막아 내긴 조금 힘들겠는데. 나는 입에 문 빨대 끝을 잘근거리며 스크롤을 내렸다. 이를 분석해 보낸 차원 학회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뭔지 알아야 할 이유가 있었다.
[주변이 교만왕의 영토와 비슷한 환경인 것으로 보아 교만왕의 군단이 나타날 것으로 추정 중.
채우지 못한 27.54%에 해당하는 영토일 경우 환경 샘플과 몬스터 데이터, 아닌 경우 보스 데이터만 전송해 주시기 바랍니다.
학회로부터 오는 보수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협회 측에서 받아 두겠습니다.
* 일전에 저지른 불법 행위에 관하여 총장님께서 하실 말씀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랭킹 1위의 위신과 체면을 위해 이른 시일 내에 협회 본부에 방문해 주시길 바랍니다. 잘못하다간 TF가 출동해 국제적 망신을 당할 수 있습니다. -낙원의 멜팅하트 올림-]
한참을 깜빡거리던 보라색 아이콘은 메시지를 끝까지 읽자 금세 사라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나는 고뇌에 빠졌다.
아. 어디서 들킨 거지.
세계 랭킹 권외면 아무래도 상관없는 거 아니었어? 빌어먹을 본부 놈들. 쓸데없는 거 신경 쓸 시간에 헌터 국제법 개정에 목소리나 내보시지.
내 착실한 노동이 긁어모은 정보는 본부가 관리하는 단말기에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다.
확실히, 이 단말기가 있어야 게이트 공략이 가능하긴 하지. 하지만 지금처럼 모든 헌터들의 신상을 전 세계에 박제하는 게 옳은 일인가?
이게 무슨 사이버 펑크 장르도 아니고. 우리 동네 장르는 양산형 헌터물 아니었어?
왜, 나만 혼자 킹왕짱 센 판타지 장르 말이야. 나 혼자만 잘나가서 다른 차원까지 정복하는 그거.
추리닝 하나 딱 걸치고 기자 회견 나가서 ‘저는 세니까 제 맘대로 하겠습니다. 괜히 뒤에서 구시렁대지 마세요. 치졸해 보이니까.’이런 대사 치고 간지 작살 1위로 각광 받는 그런 거 있잖아.
그러나 현실은 일반인. 일반인까지는 아니더라도 내적 소시민.
아직 세계가 멸망하지 않은 고로 막무가내는 무리. 세계 멸망 이후 막무가내 의향 있음. 주의 요망.
삐용삐용.
뇌리에서 붉은 사이렌이 울린다. 속 터지는 지금 상황을 만든 새벽 길드원들이 병원에 실려 가는 소리다.
하지만 현실과 상상은 괴리가 크다. 자고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러브 앤 피스가 중요하지. 나는 화면을 끈 단말기를 다시 주머니에 쑤셔 넣고 입을 열었다.
“저는 협력 같은 거 안 해요.”
턱을 꼿꼿이 치켜들고 거만하게 눈을 뜬다. 내가 존댓말을 썼던 건 마지막 예의였다는 티를 팍팍 내며 팔짱을 낀다.
“협력은 무슨 내 발목이나 안 잡을까 모르겠네. 내가 이래봬도 특성 세 개짜리 힘숨찐이거든.”
“충분히 혹하실 만한 보수를 준비해 두었는데도 말입니까?”
“보수는 무슨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너하곤 협력 안 해. 그래도 낙원 놈들 의기양양한 모습은 꼴 보기 싫으니까 게이트 보러는 가 주지.”
게이트 보러 가 주는 게 아니라 무조건 보러 가야지. 협회 놈들이 다녀오라잖아.
하지만 저쪽은 그런 내막을 모른다. 나는 곤란한 듯 미간을 좁히는 반서준을 보며 히죽거렸다.
“내가 돈이나 명성에 욕심을 낼 인물이었다면 벌써 정체를 밝혔겠지.”
돈이나 명성에 욕심내는 사람. 맞다. 사실 나 돈이랑 명성 끝내주게 좋아한다.
근데 일단 대외적으로는 정체를 숨기고 지구를 지키는 최강의 히어로. 뭐 그런 이미지 아닌가? 나 정도면 캡틴 코리아지. 즉 아닌 척 능청을 떨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럼 피차 바쁜 거 서로 귀찮게 하지 말고 나중에 보자고. 게이트에서 만났을 때 괜히 아는 척하지 말고.”
그래. 3공대 애들이 맞춰 입은 그 야잠 진짜 구리더라. 다른 공대는 안 그러던데 여기 애들만 그거 입고 다닌단 말이지. 홍보가 주 임무인 공대라서 그런가.
우득.
뭐 씹는 소리가 크게 났다. 나는 웃는 얼굴로 말없이 욕을 하는 반서준을 향해 차분하게 중지를 올려 주었다. 스위치가 올라갔는지 눈이 시퍼렇게 빛난다.
와장창-!
동시에 식당에 있는 유리창이 깨져 나간다. 나는 그와 동시에 사라진 인기척을 곱씹으며 물었다.
“낙원인가?”
“그래.”
낙원의 네가정말좋아가 쥐새끼처럼 낮말과 밤말을 다 듣고 다니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 나는 조만간 네정좋을 다시 볼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이거 내가 할 말은 아니긴 한데.”
진짜로 내가 할 말은 아니긴 한데.
“남한테 뭐 해 달라고 할 거면 보수부터 보여 주고 해 달라고 해라. 원래 인간은 돈 보면 눈이 돌아가는 법이잖아.”
솔직히 저 혹할 만한 보수 먼저 들었으면 고민 좀 해 봤지 않았겠냐? 근데 너무 멀리 와서 지금 들어도 안 혹할 것 같다, 야.
나름 신중을 기하고 한 말이었건만, 다른 사람들 표정이 가관이었다. 특히 가관인 건 반서준이었는데,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이 참 끝내줬다.
“그럼 진짜 간다.”
이미 망가진 이미지는 수복할 방법도 없다. 나는 그냥 이상한 인간을 하기로 했다. 뭐 사람이 살면서 이상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나야 우리 마님 앞에서만 착하고 성실한 우리 강아지 하면 되는 거 아니겠어?
“맞다.”
생각해 보니 여기, 역삼동이었다.
“너 버스비 있냐?”
집에 가려면 버스나 지하철 타야 함. 농담 아님.
* * *
그리하여 상황은 지금으로 돌아온다. 생각해 보니 낙원이랑 안 붙는다고 했는데 지금 낙원 왔네.
하지만 사람이 늘 내뱉은 말을 지키면서 살 수는 없지 않겠는가. 허구한 날 방 청소한다고 해 놓고 안 하는 게 사람인데.
그리고 낙원은 어차피 한 번 왔어야 했다.
웨이브면 모를까, 던전은 폐쇄적인 공간. 이번에 낙원이 나선다면 그들이 그 안에서 무언가 일을 친다는 것과 다름없는데, 나는 협회 따까리로서 착실하게 일을 해야 했다.
그러니 저 인간들이 그 안에서 무슨 짓을 할지 미리 알 필요가 있었다. 다른 곳이라면 뭐. 아는 전국구 블퀴벌레한테 정보를 모아 달라고 부탁할 수 있겠지만, 낙원은 궤를 조금 달리하지 않는가.
이 동네는 끝내주게 폐쇄적이어서 겉에서는 아무리 털어도 먼지 한 톨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 접촉하면 좋을까 생각 중이었는데, 마침 잘 됐지.
“전하. 문 열게요.”
굳게 닫힌 문을 똑똑 두드린 네정좋이 문을 연다. 문 안쪽에는 여전히 적응 안 되는 얼굴과 러브리스, 그리고 뉴페이스가 있었다.
“삼라만상의-”
“옙. 수고하십니다. 근데 입은 다물어 주세요.”
문이 열림과 동시에 소파에 앉은 그들이 벌떡 일어나 이상한 인사를 시작한다. 나는 썩은 표정으로 그들의 인사를 쌩깠다. 들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사람을 정말 꼴 받게 하는 인사다.
“시간이 없으니 본론으로 들어가죠.”
나는 일부러 비워 둔 것 같은 상석에 털썩 앉으며 입을 열었다. 기호에 맞게 카프리 썬을 내미는 러브리스가 무안해 보였지만, 사이비 일짱 이짱 삼짱 사짱이랑 하하 호호 다과 나눌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번에 열리는 상급 게이트에 가신다면서요.”
“네. 그럴 예정입니다.”
“무슨 속셈이신데요?”
나는 러브리스가 건넨 음료 팩에 빨대를 푹 꽂으며 물었다. 그러자 잔잔하게 미소 짓고 있던 극야가 입술을 옆으로 살짝 올리며 입을 열었다.
“저희는 전하가 생각하시는 것처럼 뒤에서 간계를 꾸미지 않으며, 지금 전하의 생각은 오해라고 말씀드린다면. 그럼 전하는 제 말을 믿어 주실 건가요?”
살짝 내리깐 눈 아래로 그의 하얀 속눈썹이 팔랑거렸다. 나는 오늘도 끝내주는 그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이리저리 머리를 굴렸다.
솔직히 나보고 저 인간을 믿을 수 있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No다.
그도 그럴 게, 믿을 사람을 믿어야지. 난 세상 모든 사람 중에 엄마만 믿자는 쪽이긴 한데, 쟤를 기준으로 말하면 새벽도 믿을 수 있을 듯.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기이할 정도로 꺼림칙했다. 나는 이 인조적 불쾌함이 어디서 온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머리에서 울리는 사이렌만큼은 거부할 생각이 없었다.
방 안이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고요하다. 나는 퍽 소리와 함께 팩을 가로로 뚫어 버린 빨대에 시선을 고정하며 대꾸했다.
“제게 전하라고 부르실 거면 행동도 신하처럼 하셔야죠. 믿을 거냐고 물어보시는 게 아니라 일단 믿음이 가게 행동하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빨대가 뚫어 버린 틈을 타고 주스가 줄줄 새어 나왔다. 나는 쥐고 있었던 주스 팩을 곱게 내려 두며 네정좋을 향해 손 뻗었다. 곧바로 티슈가 내밀어지는 게 아주 도라에몽 같았다.
왕 대접받을 생각은 없었는데, 이거 생각보다 편한데. 왜 얘들이 사이비 정점으로 사는지 알 것만 같은 기분이다.
나는 티슈로 손을 닦은 뒤 고개를 다시 들었다. 조명 아래에서도 선명한 극야의 보랏빛 홍채가 불길하게 일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