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죄송한데 제가 일반인이라서요-31화 (31/175)

제31화

국내 랭킹 2위, 저격수 새벽.

본인은 마탄의 사수라는 이명을 원했지만, 내가 총도 못 쏘는 게 어딜 사수냐는 식으로 시비를 걸어 저격수가 된 비운의 헌터.

지금은 잘 쏘는데, 옛날에는 진짜로 못 쐈다.

하긴 총이 군대 한 번 다녀왔다고 잘 쓸 만한 물건이던가. 게다가 저 인간은 각성 당시 군대도 안 간 상태였다.

그런데 저격수가 마탄의 사수보다 더 총 잘 쏘는 느낌 아닌가?

마탄의 사수 빠꾸 먹고 붙은 이명이 저거라니, 세상 참 아이러니하다.

“⋯⋯.”

엉거주춤하게 허리를 굽히고 손을 뻗은 반서준이 손을 거둘 생각도 하지 못하고 굳었다.

쟨 또 왜 고장 났어. 버근가?

평소엔 말만 잘 지껄이던 콩라인이 숨소리조차 죽이고 날 빤히 응시했다.

버그 난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군. 눈이 마주치니까 어떻게 하면 안 맞을지 머리 굴리는 게 훤히 보인다.

딱히 한 것도 없는데 쫄기는.

나는 반서준을 가볍게 무시하곤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반짝반짝 매끈한 바닥에 내 모습이 비쳐 보였다.

와, 바닥만 빛나는 줄 알았더니 내 머리카락도 빛나고 있잖아? 내 모자 벗긴 놈 누구야.

무어라 말 꺼내기 곤란한, 떡져서 기름이 반들반들한 머리가 바닥에 고스란히 비쳤다.

나는 어쩐지 반서준이 숨소리조차 내지 않은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더러워서인 모양이다.

미안하다.

내가 어그로 끌려고 머리 안 감은 건 아니다.

모자 쓰고 있으니까 어떻게든 될 줄 알았지. 그래도 내가 모자 막 벗어 던진 건 아니니까 뭐라고 하진 말자. 알지?

나는 굳은 반서준의 어깨를 툭 치곤 자리에서 일어나 내 모자를 찾았다.

그러자 저 뒤에서 한 마리의 모기처럼 벽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제라늄이 슬며시 다가와 모자를 건넸다.

흠.

“제 모자 누가 벗겼어요? 분명 헬멧 쓸 때도 쓰고 썼는데.”

“모자요? 아마 주무시는 데 불편하실까 봐⋯⋯.”

제라늄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나는 아직 바닥에 비치는 내 머리 꼴을 쳐다보며 험악하게 얼굴을 구겼다.

“누가 그랬어요?”

“넵. 서빈이가 그랬습니다.”

배신은 짧고 목숨은 귀하다.

제라늄은 모 길드의 차 모 씨처럼 인생 사는 법을 참 잘 알고 있는 헌터였다.

자기 동료 이름을 이렇게 술술 부는 것 보면.

반서준이 한 거면 욕이나 하려고 했는데, 그 병아리가 한 거라니까 화내기 뭐하다.

저 수집광 자식은 내 모자 털어 가려고 그랬을 게 뻔하지만, 다른 사람이 그런 거라면 무슨 의도로 그랬는지 알 수 없으니까.

나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받아 든 모자를 다시 썼다.

지이잉.

주머니에 넣어 둔 휴대폰이 이튿날을 알렸다. 나는 휴대폰을 든 채로 화들짝 놀랐다.

시뮬레이터라더니 리얼 타임이었어?

역시 인간의 기술력은 아직 많이 미흡한 모양이다. 날 우리 엄마의 등짝 스매시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걸 보면.

부재중 전화 열세 통, 카톡 한 개.

카톡이 여러 개도 아니고 한 개 와 있다니. 섬뜩한 기운이 등골을 타고 스멀스멀 올랐다.

엄마, 나 외박한 거 아니야.

사실 내 영혼은 우리 집에 있어. 여기 있는 건 우연희가 아니라 손가락테크닉입니다.

아, 그렇습니다. 그렇다니까요? 반박 시 머머리.

“X됐네.”

하지만 남을 머머리로 만든다고 내가 처한 상황이 아름다워지는 건 아니었다.

그리하여 나는 퍽 심각하고, 진중한 투로 혼잣말을 내뱉었다.

움찔.

냉동 참치 반서준과 배신의 귀재 제라늄의 어깨가 순간 흔들리는 게 보인다.

▶ 외박할 거면 말하고 하랬지.

아, 엄마.

내가 이게 외박을 하려고 외박을 한 게 아니라 본의 아닌 사고로 외박을 하게 된 거거든? 절대로 외박하려고 한 거 아니거든?

들어가면 반드시 무릎부터 꿇고 봐야지. 원래 잘못했든 잘못하지 않았든 무릎 꿇고 싹싹 비는 게 우리네 인생 아니던가.

그전에, 변명부터 좀 하고. 변명도 안 하고 집에 기어들어 갔다간 술 처먹고 어디서 굴러다닌 줄 알 것 아니야.

나는 휴대폰 화면을 톡톡 두드리며 고민의 시간을 가졌다. 조금 더 나은 방법 없을까? 변명? 굳이 변명을? 아니지.

분명 새벽 길드 구경하러 갔다 온다고 하고 나왔으니까 저 인간 중 아무나 데려가면 되는 거 아닌가?

나는 초조하게 화면을 두드리는 것을 멈추고 고개를 휙 돌렸다.

그러자 눈치 하나는 기막히게 빠른 반서준이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제가 처리할까요?”

“아뇨? 밥이나 차려 오세요.”

처리하긴 뭘 처리해. 처리하면 너 죽어.

보너스 점수를 따려고 저런 말을 내뱉었던 거면 꽝이다.

그런 식으로 굳이 상기시켜 주지 않아도 상황은 이미 개판인데.

머리는 기름졌고, 위장은 메말랐다. 적어도 두 끼는 걸렀으니 배가 안 고플 수가 없었다.

그래. 한국인은 밥심이라고, 일단 밥부터 얻어먹고 생각해 봐야겠다.

저 인간이 아까부터 굽신거리는 걸 보아 내게 용건도 있는 모양인데, 말도 들어 볼 겸 문제도 처리해 달라고 하면 좋을 듯.

나는 속으로 대충 결론을 내린 채로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자 길드장이 앞에 있어서 두 배는 빠릿빠릿해진 제라늄이 식당으로 안내하겠다며 후다닥 달려 나갔다.

* * *

얼굴을 뚫어 버릴 듯 강렬한 시선이다. 면접 볼 때도 이렇게 강렬한 시선을 받진 않았는데.

이런 시선을 받으며 태연히 밥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이야말로 철면피라는 칭호를 받을 만하다.

“어떻게, 식사는 입에 맞으세요?”

시선과 함께, 답지 않게 사근사근하려고 노력한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맞은편에서 휴대폰 게임을 하고 있던 우유 콤비가 나라 잃은 표정으로 반서준을 바라본다.

얼굴 꼴을 보아하니 어지간히 미친 일이 아닌 모양이었다.

“예? 뭐.”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수저를 고쳐 쥐었다.

이 자식은 대감집 종놈처럼 밥을 갖다 바치더니 이번엔 왕 앞의 간신처럼 살살거린다.

손가락테크닉, 제 쫄따구들한테 다 들었겠지.

나는 퍽 심오한 표정으로 수저를 빙글빙글 돌렸다.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는 건 둘째 치고 쟤가 무슨 생각으로 저런 비즈니스 미소를?

수저를 쉴 새 없이 놀리면서도 상상의 나래가 끝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그 새벽이다.

그 새벽!

‘24구역 정리 완료.’

‘아, 20번 대 구역에는 땅에 몬스터가 숨어 있으니 손대지 말라고-’

콰과과광-!!

‘-했었는데.’

‘⋯⋯.’

때는 전쟁 중반, 던전에서 재료를 수집하고 있었을 때.

조금 오래된 일이지만, 지금까지 회자되는 일이라서 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전쟁 중 각성자 인력은 늘 턱없이 부족했다. 사람들은 또 다른 각성자가 나왔다 하면 무조건 현장에 던져 넣기 바빴다.

막 단말기를 받고 상황에 투입된 반서준도 그랬다. 단말기 사용법은 모르지, 수준은 또 괜찮은 편이라 일은 턱턱 넘겨받지.

심지어 희극인지 비극인지, 본인도 의욕이 빵빵한 편이었다.

그래. 늘 문제지, 그놈의 의욕. 나는 미간을 좁히며 숟가락 끝을 지그시 눌렀다.

휘이잉.

모든 게 날아간 현장에 싸늘한 바람이 분다.

24번 구역이 터지며 연쇄적으로 폭발한 20번 대 구역들.

‘키에에엑-!’

몸뚱이가 핫하게 익은 몬스터들이 잿더미 속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세상에, 걸어 다니는 군고구마다. 나는 턱이 빠지게 입을 벌린 채로 백스텝을 밟았다.

조금 전의 폭발로 황량해진 던전 안이 땅에서 튀어나온 몬스터로 가득 찼다.

‘통신 없는 거 보니까 공대장 죽었나 본데.’

사장님 나이스 샷! 정말 끝내주는 업적입니다!

나는 입 밖으로 나오려는 욕지거리를 삼키며 이 상황을 만든 초보에게 현실을 알려 주었다.

그때 반서준이 무슨 대답을 했던가. 사실 그건 별로 중요치 않다.

중요한 건 결국 그 던전에서 살아 나온 건 나와 반서준뿐이고, 자기가 모두를 죽였다는 사실 때문에 쟤 멘탈이 나갔었다는 사실이지.

따지고 보면 반서준이 죽인 건 아닌데, 선빵 맞고 미쳐 날뛰는 몬스터들 때문에 모두가 죽었으니 결과적으로는 반서준 때문이 맞다.

이게 참 안타까운 게, 저 친구가 성격은 좀 그래도 인성까지 나쁘진 않다.

반서준은 다른 각성자들처럼 다른 사람에게 떠밀려서 게이트에 들어간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자처해서 게이트에 들어간 사람이다.

싸가지 없이 남에게 모진 말을 하고 다녀도 다 남 잘되라고 하는 말이라는 거지.

저 거지같은 성격만 고쳤어도 지금보다 일곱 배쯤 인기 많았을 듯.

나는 반찬에 포함된 진미채를 질겅질겅 씹으며 반서준을 빤히 바라봤다.

싱글벙글 웃는 얼굴, 자연드림 아줌마도 울고 갈 존댓말. 뭔가 있었다. 저렇게 티 내는데 모르는 게 바보였다.

대체 무슨 용건이길래 네가지 국밥에 말아먹은 인간이 저렇게 굽신거리는가.

나는 시선과 의문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입을 열었다.

“저기요”

“네.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무슨 꿍꿍이죠. 그쪽 길드원들 실려 나가기 전에 말씀하시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끄트머리가 구부러진 쇠 수저가 꽁꽁 얼어붙은 3공대 헌터들을 가리켰다.

반서준이 고개를 돌리자 다들 어색하게 웃는 꼴이 꼭 동물의 왕국을 연상케 했다.

저기 한 무리의 새벽 길드원들이 있습니다. 길드장만 보면 맥을 못 추리는 사람들이죠.

답지 않게 웃는 얼굴을 고수하던 반서준이 비뚠 자세를 바르게 고쳐 앉았다.

턱 괴고 있는 꼴을 보니 자연드림 아줌마가 심어 놓고 간 꼰대력이 튀어나올 뻔했는데, 그전에 멀쩡해져서 다행이다.

사람과 사람의 커뮤니케이션은 진심이 통하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그런 내 진심이 통했던 걸까. 반서준의 의미 모를 하늘색 눈이 곧장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러자 119를 부르는 건지 애타게 폰 화면을 톡톡 두드리던 제라늄이 얌전해졌다.

다른 새벽 길드원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사방이 고요했다.

띵똥.

주머니에 찔러 둔 구단말기 화면에 보라색 아이콘이 떴다.

새벽 길드에 오기 전에 얼핏 보고 무시했던 협회 직통 메시지였다.

“정식으로 인사 드리겠습니다, 헌터님. 저는 새벽 길드의 반서준이라고 합니다.”

역시 답지 않게 예의를 차려 말한 반서준이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나는 숟가락을 조심히 접시 위에 내려놓으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이콘이 옷에 눌렸는지 화면 가득 메시지가 펼쳐졌다.

“며칠 뒤, 한국에 상급 게이트가 출현할 예정입니다.”

[상급 게이트 출현 경고. -헌터 협회 본부-]

“도움을 요청하고 싶습니다, 손가락테크닉 님.”

반서준이 티비에서나 보이던 비즈니스 미소를 지었다.

한없이 무해한 얼굴이었으나, 나는 저 인간의 말속에서 지울 수 없는 악의를 발견했다.

아, 그러니까.

손가락테크닉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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