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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한데 제가 일반인이라서요-30화 (30/175)

제30화

알 수 없는 감각이 전신을 타고 내달렸다. 나는 소름이 오스스 돋은 팔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돌렸다.

불구덩이에 처박힌 지옥의 왕이 핏기 없는 손을 들었다.

나는 내 턱을 쥘 듯 뻗어 오는 손을 잡아냈다.

남의 턱을 잡는 건 유교 국가 도리에 어긋난다. 잘 알아 둬라. 외계인 새끼.

“데이터 주제에 진짜처럼 말하네.”

【“내 ‘눈’은 어디든 볼 수 있다. 이런 조잡한 허상에 간섭하는 것 정도야 어렵지 않지.”】

세게 움켜쥔 손목이 꺾이지 않았다.

우리가 왕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들은 외부 차원의 가장 강력한 외계인이다.

일방적으로 침공당하고 있는 지구의 헌터 따위가 맞먹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촤악.

푸른 손톱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머리채가 한 줌 나풀나풀 아래로 떨어졌다.

떨어진 살점이 보이는가 싶더니 상처에서 피가 흘렀다. 푸르스름한 손톱에 약간의 살점과 피가 묻어 있었다.

시체처럼 창백한 남자가 돌연 권태로운 얼굴을 한다.

나는 그의 팔을 놓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베인 상처에서 부식이 시작되고 있었다.

“가짜에 볼일 없어. 얻을 것도 없는데 그만 돌아가지.”

【“얻을 게 없기는. 너와 접촉했다는 걸 알면 그 퇴물이 또 미쳐 날뛸 게 분명한데.”】

남의 뺨을 그어 놓고서 말하는 꼴이 퍽 느긋했다.

누가 보면 멍멍이 데리고 동네 마실 나와서 다른 견주 만난 줄 알겠네.

나는 못마땅한 얼굴로 혀를 찼다. 기분도 나빴지만 걸리는 점도 있었기 때문이다.

‘네가 바로 그 퇴물의 새 목표물인가.’

‘그 퇴물’. 저 뻔뻔한 낯짝의 나태왕은 ‘그 퇴물’이란 자를 몇 번이고 언급했다.

저 괴물은 우리 차원을 침공한 외부 차원의 가장 강력한 일곱 중 하나였다.

그런 괴물이 내게 관심을 둔다?

이건 내 인생 장르가 외계인과 찍는 뜨거운 로맨스 판타지가 아닌 이상 불가능한 개연성이었다.

세상은 참 넓고 놀라운 일은 많지만, 인생 장르가 코미디가 아니라 로판인 점은 참으로 어메이징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내가 죽었다 깨어나니 악역에 빙의?! 같은 전개는 참 재밌지만, 현실성이 없다. 신뢰도가 제로다.

그래. 신뢰할 수 없다면 믿지 않는 게 맞지. 나는 그래서 이 괴물의 입에서 나온 ‘퇴물’에 주목했다.

아마 그 퇴물이 이 괴물이 내게 관심을 가진 이유의 전부일 것이다.

아니면?

아니면 뭐⋯⋯ 외우주에 사는 외계인이 상대인 최초의 로판 하나를 찍을 수 있겠지⋯⋯.

“퇴물이 누구지?”

표백한 것처럼 하얀 낯에 조소가 떠올랐다.

나는 점점 심해지는 뺨의 고통을 참으며 파티원들의 상황을 확인했다. 현재 498마리. 얼마 남지 않았다.

【“지나가는 벌레만도 못한 널 지금처럼 쓸 만하게 만든 위인이지.”】

음흉하게 찢어진 입술 너머로 날카로운 이가 보였다.

나는 시큰거리는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며 눈썹을 위로 휙 추켜세웠다. 어불성설이다.

“난 처음부터 강했는데.”

【“아니. ‘처음’의 넌 벌레만도 못했지. 네가 기억할 리야 없겠지만.”】

“처음? 처음이 언젠데. 각성 때?”

전 세계에 일제히 게이트가 열리고 몬스터가 비처럼 쏟아진 그날. 나는 재앙의 날에 각성했다.

몬스터한테 맞아 죽기 전에 각성했고, 각성한 뒤엔 몬스터에게 주먹을 날려 그 머리를 부숴 버렸다.

막 각성한 각성자들이 물리치지 못하는 강한 몬스터들.

나는 처음부터 그 몬스터들을 물리칠 힘이 있었다.

주먹을 내지르면 건물이 부서졌고, 발차기를 날리면 몬스터가 쓸려 나갔다.

산이 무너지고 바다가 갈라졌다. 나는 죽음의 위기 앞에서 순식간에 무협지 고수가 되었다.

【“아니.”】

인간 흉내를 내어 웃는 괴물의 눈동자에 내 모습이 비쳤다.

상처 부위를 중심으로 얼굴 피부 반이 녹아내려 근육을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죽도록 아팠으나, 내색할 정도는 아니었다.

원래 팔이 잘리고 다리가 잘려도 몬스터가 있으면 싸워야 하는 게 헌터였다.

종이에 손가락 끝만 베여도 구르던 스물의 우연희는 이제 팔이 잘려도 내색하지 않는 스물여섯의 손가락테크닉이 되었다.

“그럼?”

그리고 스물의 우연희면 모를까 스물여섯의 우연희는 쫄지 않았다.

현실이었으면 모르겠으나 여긴 가상. 죽어도 상관없는 환경이었다.

보스인 크루쉬는 이미 잡은 상황.

개입이 자유로운 왕이란 족속들은 게이트의 일부로 치지 않는다.

기존 데이터를 베이스로 만들어진 이곳도 마찬가지다. 지금 카운트는 511마리, 목표물은 579마리.

내가 죽어도 나머지 파티원이 지옥 산양을 다 잡으면 끝나는 게임이었다.

물론 내가 죽었을 때 이 치가 파티원들마저 죽이러 간다면 난 여기 영영 갇히게 되겠지.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특정 존재의 성격을 가끔 확실히 단언하고는 했다.

【“그건 내가 굳이 답할 이유가 없는 것 같은데. 답해 줄 이는 네 주변에도 둘이나 있지.”】

이번에도 그저 그런 이유였다.

【“머리 못 굴리는 건 천성인가. 몇 번을 봐도 달라지지 않는군. 그래, 네가 그랬던가. 주절주절 떠들다 후퇴하는 꼴이 꼭 게임 속 스토리 진행 NPC 같다고.”】

심연을 닮은 검은 눈에 푸른 기운이 섞였다.

뻗어 오는 손가락 끝 역시 푸르스름한 기운이 담겨 있었다.

우리 엄마는 늘 이상한 걸 먹지 말라고 했지만, 이상한 꼴을 볼 바에야 이상한 걸 먹는 게 낫지 않겠는가.

나는 프라가라흐를 휘두를 시간도, 고개를 뒤로 젖힐 시간도 없이 뻗어 온 손가락을 향해 입을 벌렸다.

우득.

인간의 것을 그대로 본뜬 손가락 관절이 가공할 힘에 뚝 부러졌다.

퉤. 뱉어 낸 손가락이 놋쇠 바닥에 떨어졌다.

까만 눈동자에 눈을 있는 힘껏 치켜뜬 내가 보인다.

잘린 손가락을 바라보는 나태왕의 눈동자에 알 수 없는 종류의 희열이 비쳤다.

그는 이 상황이 몹시 유쾌한지 미친놈처럼 처웃다가, 사방으로 반투명한 검은 손을 뽑아냈다.

나는 재빨리 프라가라흐를 휘둘러 손들을 쳐 냈다.

생성되는 검은 손을 자른다. 손이 수 개에서 수십 개가 된다.

수십 개에서 수백 개, 수백 개에서 수천 개가 된다.

다리가 잡힌다. 팔도 잡히고 머리도 잡힌다. 이내 목까지 잡혔다.

가시로 변한 검은 손이 복부를 꿰뚫는다. 배에 구멍이 나는 감각이 지독할 정도로 선명하다.

하얀 손이 목을 조른다. 머리채를 잡고 지척에서 웃는다.

나는 내가 죽지 않을 걸 안다. 저쪽 또한 내가 죽지 않을 걸 안다.

【“늘 그랬듯이, 이번에도 내가 말해 주지.”】

검은 손의 왕이 죄수를 매다는 간수처럼 웃는다.

검은 손이 잡은 몸뚱이 곳곳이 흐물흐물 녹아내리고 있었다.

【“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웃는 이를 경계해라. 가장 저열하고 죄 많은 괴물을 피해 도망쳐라. 이번에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통째로 뜯어 먹히기 싫다면.”】

숨이 모자라 헐떡이자 고통이 전신을 타고 흘렀다.

모든 게 녹아내리는 와중에도 안구와 신경은 녹지 않았는지 내 앞에 선 괴물의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그는 지금 제 행동을 아주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제 딴에 베푼 선의의 행동을 자랑스러워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검은 손이 왼팔을 뜯어내고 목덜미에 상처를 낸다. 저번과 같은 부위다.

영영 잊지 못할 기억은 아주 복잡한 환경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반복과 고통은 학습의 가장 큰 요소다.

【“그러면 다시 보도록 하지.”】

가장 저열하고 죄 많은 괴물이 저속하게 웃었다.

아. 왠지 주절주절 떠들다 후퇴하는 꼴이 꼭 게임 속 스토리 진행 NPC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당신은 사망하였습니다.]

[던전 클리어 시까지 영체 상태로 던전에 남아 있게 됩니다.]

[던전 클리어 목표: 보스 ‘크루쉬’(1/1), 지옥 산양(551/579)]

* * *

“⋯⋯님.”

“⋯⋯가 ⋯⋯데?”

자고 있는데 주변이 소란스러웠다.

아, 엄마⋯⋯. 나 독서실 끊었다니까. 이제 오락실 안 간다니까⋯⋯.

“핑거킹 님. 일어나세요. 핑거킹 님!”

“야, 넌 왜 손가락테크닉 님을 깨우고 그러냐. 길마 형 알면 난리 남.”

“너무 안 일어나시는데 깨워야 하는 거 아니야? 자는 게 아니라 쓰러지신 거면 어떡해?”

속닥거리던 목소리가 커졌다.

나는 물먹은 솜처럼 늘어진 채로 머리를 굴렸다.

아무리 봐도 엄마 목소리가 아닌데. 우리 엄마는 저렇게 목소리가 굵지 않은데.

“헐. 길마 형 오셨어요? 아직 안 깨어나셨는데 조금 이따 오시지.”

“됐어. 그런데 왜 바닥에 계셔? 자는 데 불편하실 거 아니야. 침대 가져와.”

“침대라면 누나랑 형이 가지러 갔어요. 근데 침대를 가져오는 것보다 이대로 들어서 모셔 가는 게 낫지 않나요? 여기서 자다 깨면 바로 그냥 낯선 천장이다, 아니에요?”

자기 전에 술 처먹고 잤나. 왜 헛것이 들리지. 라디오를 틀었나. 내 방에 라디오 없는데.

“그래?”

단단한 바닥을 밟는 구둣발 소리가 들렸다.

라디오나 티비 따위는 흉내 낼 수 없는 현장감.

이게 만약 기계가 내는 소리라면 나는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로 온 게 틀림없다.

숙취가 온 것처럼 정신 나간 몸 상태가 걸렸다. 나는 한없이 무거운 눈꺼풀과 씨름하며 힘없는 몸뚱이에 힘을 실었다.

“헐.”

눈꺼풀 위로 그림자가 지자마자 눈이 번쩍 뜨였다.

저기 옆에서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폰을 만지작거리던 제라늄이 짧게 감탄사를 뱉었다.

“거기서 뭐 하세요?”

나는 엉거주춤하게 허리를 굽힌 인간을 보며 시큰둥한 투로 물었다.

쩍쩍 갈라진 목소리 때문인지, 갑자기 눈을 떠서 그런 건지.

허리를 굽힌 장본인인 반서준은 퍽 당황한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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