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화
[‘지옥 산양의 번제’의 보스 몬스터, 제사장 <크루쉬>가 나타났습니다.]
성인 남성보다 두 배는 큰 몸집의 산양이 두 발로 서서 울부짖었다.
크루쉬는 인간과 산양의 키메라처럼 생긴 몬스터로, 두 번밖에 안 봤지만 여전히 불쾌한 골짜기를 자극하는 친구였다.
신전에 침입자가 발생한 것도 모자라 신성한 제단에 침입자가 쳐들어왔다.
크루쉬 입장에서는 당연히 화날 만한 문제.
나는 날아오는 불덩이를 피해 움직이며 저 산양의 공격 패턴을 곰곰이 되짚었다.
아, 그래.
미안하다. 이거 보여 주려고 어그로 끌었다.
이곳 보스의 패턴은 이 한마디로 축약할 수 있다.
일단 있어 보이는 광역기로 상대의 혼을 쏙 빼놓는다.
범위도 넓고 간격도 촘촘하며 심지어 비주얼까지 끝내 주는 광역기를 애써 피해 놓으면, 한숨 돌린 상대의 빈틈으로 초라한 공격 하나가 날아온다.
모두가 방심해서 그 공격을 얻어맞아 주고는 하는데, 여기서 명심하자.
진짜는 그 한 방이다.
지이잉-
알 수 없는 수식이 빼곡하게 들어찬 마법진들이 허공을 수놓았다.
붉게 달아오른 마법진들은 화염 줄기를 갈래갈래 뿜어내며 화력을 과시했다.
러브리스가 긴장한 채로 한기를 끌어올리는 광경이 보였다.
몸이 약하면 저걸 맞고도 화상을 입겠지만, 내 특성은 기본적으로 신체 강화였다.
두 번째로 날아올 공격마저 내겐 치명타가 아니다.
나는 쏟아지는 화염을 푸른 불꽃으로 감싸 소멸시키며 앞으로 나아갔다.
본래 내 것이 아니었던 내 두 번째 특성, ‘색욕왕의 화형’은 부정한 것을 소멸시키는 불꽃이다.
색욕왕이 내린 권능인 만큼 ‘부정한’ 것의 범위엔 색욕왕의 권속이 아닌 모든 것이 들어간다.
그러니 이 특성은 내게 적대적인 특성이었다.
쓰면 쓸수록 호흡이 느려지고 움직임이 둔해진다.
감각이 사라지고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린다.
「“네가 원하는 것을 알고 있다.”」
허공에 부유하는 목소리는 이제껏 몇 번이고 들어 왔던 내용을 읊는다.
나는 끈덕지게 달라붙는 목소리를 떨쳐 내고 앞으로 돌진했다.
「“나의 것이 되어라. 이 우주의 모든 영광을 내게 바치면 네가 원하는 평화를 주겠노라.”」
푸른 불꽃이 한쪽 팔을 집어삼킨다.
육중한 무게가 몸뚱이를 짓누르는 감각이 생경하다. 무리하면 늘 겪는 감각이었으나 오늘따라 더 낯설었다.
“전하!!”
보는 사람이 있어서 그런가. 아무래도 그런 모양이다.
콰과과광-!!
러브리스의 외침과 동시에 아주 작은 에너지 볼트가 빈틈을 노리고 들어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가 서 있던 곳을 스치고 지나간 그것은 허공을 날아 벽에 부딪히자마자 거대한 폭음과 함께 폭발했다.
러브리스가 만들어 낸 거대한 얼음벽이 폭발의 여파를 막지 못하고 깨져나갔다.
파열음이 고막을 찢을 듯이 뒤흔들었으나, 과도한 특성 사용으로 청각이 무뎌져 버틸 만했다.
러브리스처럼 귀에서 피를 흘리진 않으니 다행이라고 해야겠지.
정화의 불꽃은 불꽃의 소유주를 정화해 온전한 색욕왕의 권속으로 만든다.
반대로, 내 특성 신체 강화 또한 몸 안의 불순물을 밀어내고 항시 정순한 상태를 유지한다.
정리해 보면, 정화의 불꽃이 육체를 좀먹으려 하면 신체 강화가 밀어낸다.
내 주 특성이 신체 강화인 터라 끝내는 신체 강화가 이기지만, 색욕왕의 불꽃으로 그 한계를 넘으려고 한다면 끝이 어떻게 될진 그 누구도 모른다.
우리 엄마는 늘 인생에 공짜는 없다고 말했지. 동감하는 바다.
심심하면 휘두르는 프라가라흐가 제법 묵직하게 느껴졌다.
부정한 것을 태우는 푸른 불꽃이 플레어처럼 흐드러진다. 결코 예리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검신에 푸른 불꽃이 휘감긴다.
지팡이를 위로 번쩍 올려 든 크루쉬가 알 수 없는 주문을 왼다.
“■■왕■■여, ■■■■의 ■■■■■ 강,림■■■.”
콰직!
뼈가 으스러지고 절단면이 뭉개지는 소리가 선명했다.
뿔 달린 검은 산양의 머리가 텅텅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구른다.
나는 손을 적신 피를 털고 제단을 걷어차 부쉈다. 알 수 없는 생물의 뼈로 만들어진 제단이 우르르 무너졌다.
[(Player1) <이면(裏面) 네가정말좋아>(S)가 ‘공간 절단’을 발동합니다.]
[‘지옥 산양’(411)이 소멸합니다.]
[(Player7) <서빈>(B+)이 ‘관통력 강화’를 발동합니다.]
[‘지옥 산양’(412)이 소멸합니다.]
[*지옥 산양의 번제 - ‘지옥 산양’(412/579)]
[*지옥 산양의 번제 - ‘제사장 <크루쉬>’ 처치 완료(1/1)]
[행동 데이터 수집을 완료하였습니다.]
처리해야 할 산양 숫자, 579마리. 지금까지 처리한 숫자, 412마리.
원래대로라면 보스 몬스터를 물리치고 나온 영혼석으로 게이트를 닫았겠지만, 연습용인 만큼 모든 몬스터를 처리해야 하는 모양이다.
나는 보스가 떨어뜨린 영혼석을 주워들고 무너진 제단을 뻥뻥 걷어찼다.
저 검은 산양들 축제의 기본은 인신 공양이다. 우리 차원 입구를 열어젖힌 것도 다 저 인신 공양 때문이고.
뼈와 뼈로 이루어진 제단 곳곳에는 불길하고 읽을 수 없는 문자로 그려진 마법진이 즐비했다.
붉게 빛나는 이 마법진들은 제물을 고통 속에 죽어 가게 만드는 마법진이다.
그리고 개중 하나는 나태왕을 직접적으로 부르는 마법진이었다.
저번엔 패턴을 몰라 얻어맞아 가면서 싸우다가 너무 늦어서 나태왕이 등장했다.
이번에는 신속하게 처리했으니 마법진도 빠르게 처리하자.
오래되어 쿰쿰한 내가 나는 핏자국이 발에 채여 하늘을 날았다. 뼈 부수는 소리가 신명 나게 보스 방 안을 채웠다.
뼈 주인들에겐 미안하지만 뭐 어떡하겠어. 지금 산 사람이라도 살아야지.
[(Player1) <이면(裏面) 네가정말좋아>(S)가 ‘공간 이동’을 발동합니다.]
[‘지옥 산양’(423)이 소멸합니다.]
띠링.
지옥 산양이 소멸하는 소리가 연신 들렸다.
이쪽 파티가 무사히 보스를 때려잡은 것처럼 저쪽 파티도 순조롭게 지옥 산양을 처리하는 모양이다.
역시 네정좋을 남겨 두고 오길 잘했지.
제단을 가득 메운 마법진을 모두 파괴한 후 저쪽에 합류한다.
지금 합류해도 문제될 건 없지만, 나태왕의 등장이라는 후환을 만들어 두고 싶지 않았다.
지금까지 ‘왕’을 본 헌터들은 어지간히 정신력이 뛰어난 게 아니면 모두 미쳐 버렸으니까.
퍼석.
말라서 뻣뻣해진 뼛조각이 밟혀 부스러졌다.
나는 마법진을 걷어차 망가뜨리며 뒤로 고개를 슬쩍 돌렸다.
얼굴에 말라붙은 핏자국이 남은 러브리스가 곳곳에 박힌 얼음 조각을 뽑아내며 출혈 부위를 지혈하고 있었다.
낙원의 S급은 수많은 전장을 거쳐 온 베테랑이다.
게다가 서리꽃은 길드장 극야의 최측근. 그녀의 조치는 새벽 제3공대보다 훨씬 능숙하고 간결했다.
내가 관여할 부분은 딱히 없는 것 같아 보였다. 그녀 또한 그걸 바라지 않을 테고.
[‘네가정말좋아’가 지옥 산양의 목을 가릅니다. 지옥 산양이 소멸합니다.]
[‘제라늄’이 지옥 산양을 불태웁니다. 지옥 산양이 치명타를 입었습니다.]
[‘달콤한멜로디’가 축복 지대를 펼칩니다. 외부 타격이 40% 감소합니다.]
리더 마크를 달았다는 것 하나만으로 파티원들의 행동이 모두 보였다.
기술이 발전했다더니, 정말로 게임같이 만들어 놨네.
하긴 그편이 낫지. 전장을 게임이라고 생각하면 현실 도피라도 할 수 있잖아.
[(Player7) <서빈>(B+)이 ‘약점 파악’을 발동합니다.]
[(Player7) <서빈>(B+)이 ‘정밀 조준’을 발동합니다.]
[‘지옥 산양’(450)이 소멸합니다.]
[특정 조건을 만족하였습니다.]
[<번영의 제단>이 본모습을 드러냅니다.]
【검은 땅의 주시자가 근면의 권좌 위에서 눈을 뜹니다.】
【<번영의 제단>이 저장된 수식을 불러옵니다.】
【일곱 죄악 중 나태의 죄악을 두른 왕이 강림합니다.】
쿠구구궁-!!
발밑의 제단과 놋쇠 신전이 거칠게 뒤흔들렸다.
뭐야, 이 후룸라이드 타려다가 T타는 서프라이즈는.
나는 다시는 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광경에 입술을 잘근 깨물며 고개를 돌렸다.
주저앉아 상처를 살피던 러브리스가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러브리스 님, 당장 나가서 일행이랑 합류하세요!”
“네? 그러면 전하는 어떻게 하시려고요?”
“그러니까 가라고 말씀드린 거예요. 이제부터는 저도 어떻게 될지 몰라서 러브리스 님을 지킬 수 없어요.”
사실 그녀를 지킨 기억은 없다. 배려 없이 닥돌한 기억만 있지.
하지만 그녀 또한 낙원의 미치광이였다.
그러니까, 약간 핀트가 나가 있단 소리다. 극야의 측근인 그녀는 내 말에 문제를 제기할 이유가 없었다.
그저 듣는다. 그리고 따른다.
그들의 행동은 이토록 단순했다. 생각하지 않는다. 눈 뜨지 않는다. 귀를 열지 않는다. 끝내 맹신한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무사하세요.”
그녀의 행동은 예상과 다르지 않았다.
나는 내가 던진 영혼석을 받아 들고 총총 뛰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팔짱을 꼈다.
【“이번이 두 번째로군.”】
기척은 이미 느꼈으나, 피할 수 없었다.
【“허상을 통해 나를 불러낸 건가?”】
마주하고 있는 건 우리 차원의 상식이 통하지 않은 존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