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화
두 길드가 뒤섞여 뒤죽박죽이던 서열은 내가 손가락테크닉임을 밝히자 단번에 정리됐다.
“러브리스 님, 저거 얼려요.”
“네, 전하.”
싱글벙글 웃는 낯의 러브리스가 가볍게 발을 굴렀다.
그러자 홧홧하게 달아오른 대지가 파르스름하게 물들었다.
단단하게 언 땅 위로 두 발이 가볍게 미끄러진다.
“이제부터 신전으로 진입할 거예요. 조는 돌격과 후방, 두 개로 나눌게요.”
일곱 쌍의 눈이 일제히 날 바라봤다. 나는 오른손을 펼쳐 대충 손가락셈을 하며 돌격조를 호명했다.
“일단 돌격조는 저랑 러브리스 님.”
정체를 안 깠으면 러브리스와 네정좋을 메인 딜로 놓고 한 파티를 운영해야 했겠지만, 정체를 까발린 지금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
인원수가 많을수록 챙겨야 할 인원이 많아지니 귀찮아진다.
“나머지는 후방을 맡아 주세요. 후방이라고 뭐 딱히 할 건 없고, 그냥 뒤로 가는 몹만 잡아 주시면 돼요.”
내 단말기에 저장된 정보를 바탕으로 구현된 던전이니, 보스 패턴은 저번과 같겠지.
게다가 이 산양 통구이 신전은 구조가 퍽 단순한 편이었다.
몹을 죄다 쓸어버리고 보스 방에 들어가면 보스가 나온다.
더 생각할 것 없이 불타는 산양을 그대로 패면 그만이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점은, 이게 내 단말기 정보를 그대로 가져왔다는 점인데.
그래서인지 그닥 반갑지 않은 기억이 떠올랐다.
‘네가 바로 그 퇴물의 새 목표물인가.’
나이가 지긋한 노인이 굽은 허리를 펴며 말했다. 머리 위로 곧게 솟은 뿔 끝이 위협적인 빛을 띠었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은 굽은 허리를 펴자마자 냉담한 인상의 청년으로 변했다. 어깨 밑으로 내려 묶은 검은 머리칼이 창백한 피부와 대조됐다.
동공과 구별이 안 될 정도로 시커먼 홍채는 뻥 뚫린 지옥의 구멍 같았다.
까만 눈이 쓸고 지나간 자리가 모두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렸다.
촤아아악.
푸르스름한 손톱에 쓸려 나간 살점에서 핏방울이 튀었다. 분명 다 녹아내렸으나, 녹아내리지 않았다.
나는 환각을 보고 있었다.
‘싹이 보이는군. 조금 장난을 치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핏기 없는 입술 끝이 음흉하게 찢어졌다. 꼴에 왕이라고 초면에 반말을 쓰는 몬스터다운 표정이었다.
단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혀끝이 쓰다. 치료한 지 오래되어 상처조차 찾아볼 수 없는 목덜미가 화끈거린다.
왼손이 잘린 감각이 뇌를 잠식한다.
몹시 불쾌했으나, 이보다 더 불쾌한 건 따로 있었다.
나태왕은 이름처럼 지독히도 나태했고, 제 부하들을 쳐죽인 벌레를 짓누르지 않았다.
그 뻔뻔한 낯짝의 괴물은 긴 머리채를 싹둑 잘리고도 웃었다.
히죽히죽 올라가는 입꼬리가 잔상처럼 눈앞을 스쳤다.
“전하.”
클리어가 늦으면 분명히 다시 만나겠지. 어쩌면 클리어가 빨라도 다시 만날지도 모른다.
본래 왕이란 그런 존재들이었다. 권속의 눈을 빌려 모든 것을 보는 존재들.
“전하?”
그러니 나태왕을 마주할 인원은 될 수 있는 대로 줄이는 게 좋았다.
사실 나 혼자 이 신전을 돌파해도 상관은 없었다.
열기 때문에 짜증 나긴 하겠지만, 살점이 녹아도 결국 데이터일 뿐이다.
현실에 영향이 가는 건 아니다.
영향이 가도 문제가 있는 건 아니지. 그냥 힐러한테 가면 되는 거니까.
“전하. 제 말 듣고 계세요?”
뼈마디가 긴 손이 얼굴 앞으로 불쑥 들이 밀어졌다.
나는 양갓집 규수가 따로 없는 그 손을 잡아 치웠다.
네정좋은 나라 잃은 대왕 토끼 같은 표정을 지은 채로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제가 왜 후방이에요? 저도 전하 따라가고 싶어요.”
“쓸모없어서요. 괜히 귀찮게 하지 말고 뒤에 계세요.”
러브리스도 데려갈까 말까 고민 중인데 제일 귀찮은 사람을 뭐하러 데려가.
게다가 두 사람을 같이 데려갔다간 재앙이 일어날 확률이 높았다.
“저 일 잘해요. 맡겨 주세요.”
“뒤에서 일 잘하세요. 필요 없으니까.”
나라 잃은 대왕 토끼가 우주를 잃고 무너졌다. 나는 뒤에서 쑥덕거리는 차세형과 제라늄을 스치듯 흘겨보곤 피어싱을 더듬었다.
지옥의 주둥이로 유명한 것들이 쫄아서 말 못 하는 게 참 우스웠다. 괜히 힘 있으면 다인 게 아닌 법이다.
“전하가 저한테 어떻게 이러실 수 있어요.”
우수에 찬 눈빛 사이로 훌쩍임이 들렸다. 누가 보면 배신이라도 당한 줄 알겠네.
나는 혀를 짧게 차며 낙원 측 파티원들을 향해 턱짓했다. 달콤한멜로디가 조용히 네정좋을 끌고 갔다.
저 멍청한 친구는 지금 자기만 안 데려간다고 징징대고 있지만, 이건 다 자기 업보다.
왜냐하면 우리 파티는 두 트롤의 트롤링으로 고대 신의 가호를 받지 못했으니까.
그러니 일단 버퍼인 달콤한멜로디는 돌격조에서 제외.
내구도 약한 새벽 측 파티원들은 달콤한멜로디의 버프가 없으면 안에서 버티지 못하니 그들도 제외.
그다음, 저 유령.
실드 능력의 저 유령 친구는 인간 됨됨이는 몰라도 능력만큼은 쓸모가 있었지만, 유령이 된 관계로 그 일말의 쓸모조차 없어졌다. 아웃.
이 파티에서 지옥 산양을 무리하지 않고 잡을 능력자는 단 두 명뿐이다. 러브리스와 네정좋.
그러니 한 명을 데려가면 한 명을 놓고 가는 게 맞았다.
“전하아아⋯⋯.”
저쪽은 납득이 안 가는 모양이지만 말이다.
[지옥 산양 군단 침공 개시까지, 34:11:41]
더럽게 말 안 듣는 파티원 끌고 오느라 줄어든 시간이 조용히 깜빡거렸다.
나는 타이머를 보며 신단에서 챙겨 오지 못한 아이템과 버프로 올라갈 난이도를 가늠했고, 네정좋은 그새 징징거림을 멈췄다.
네정좋의 징징거림이 멈추자 주변이 물을 끼얹은 듯 일순간 조용해졌다.
깨지 못하면 죽는 던전의 본진에 입장하는 순간이다. 긴장하지 않는 게 더 용했다.
“러브리스 님은 괜찮아요?”
“네?”
“두 명만 가는 건데 괜찮으시냐고요.”
나는 스쳐 가듯 그녀의 상태를 물었다. 그 누구보다 이지적인 청보랏빛 눈이 확신을 담고 날 향했다.
“저는 믿어요.”
[(Leader) <군신(軍神) 손가락테크닉>(S++)과
(Player2) <서리꽃(霜花) 러브리스>(S)가 ‘보스 스테이지 - 놋쇠 신전’에 진입하였습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로 실패하지 않으실 것을요.”
끼쳐 오는 열기를 쏟아지는 냉기가 막았다. 지글지글 끓어오르는 바닥이 끔찍한 한기에 꽁꽁 얼어붙었다.
아, 그렇구나. 나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그 눈은 이지적인 것이 아니었다. 또한, 어디선가 많이 본 눈이기도 했다.
“저는 제가 맡은 바를 다할 뿐입니다.”
그녀가 눈을 깜빡이자 청보랏빛 홍채가 가려졌다 나타나길 반복했다.
나는 얼마 전 저 눈을 본 적이 있다.
‘당신만을 위한 낙원을 만들 거예요.’
우수에 찬 멜로 눈깔의 뒤편에 있던 그것.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그것.
나는 그녀가 깐 얼음 위에 발을 올려놓기 전, 모두가 있는 뒤를 돌아보았다.
걱정과 우려, 안도가 섞인 눈동자들 사이에 홀로 이질적인 것이 섞여 있었다.
아까의 모습은 온 데 간 데 찾아볼 수 없는 진홍색 눈이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순진하고 멍청한 얼굴 위로 맹신자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갔다.
‘이번에는 당신이 그런 선택을 하지 않도록.’
그 누구랑 아주 비슷한.
* * *
쿵, 쩌저적-!!
바닥에 굳게 깔린 얼음이 내딛는 발에 갈라졌다. 곧이어 빠르게 쇄도한 창이 몬스터의 머리를 찔렀다.
순식간에 머리뼈가 박살 나고 뇌수가 흩어진다.
러브리스의 전투 방식은 사뭇 무식하게 보일 정도로 닥돌이었지만, 실력만큼은 나무랄 데 없었다.
허공에 터지는 얼음 트랩이나 바닥에 깔리는 얼음만 봐도 그녀가 얼마나 대단한 실력자인지 알 수 있었다.
특성과 몸을 동시에 쓰는 건 남들 생각처럼 쉬운 게 아니다.
콰앙-!
대검으로 몬스터 하나를 찍어 뭉갤 때마다 신전 전체가 진동했다.
푸르스름한 불꽃이 푸른 혈관에서 피어올라 손목을 타고 손끝으로 올랐다.
손끝에 이는 불길은 곧 주변으로 번져 산양의 털을 살라 먹는다.
숯불 산양 구이 쇼의 시작과 함께 주변 온도가 후끈하게 달아올랐다.
조금 화끈하긴 한데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이 신전, 놋쇠로 만들어진 주제에 이차원 놋쇠라 일반적인 녹는점에서 녹지도 않았다.
물론 그냥 놋이 녹는점만 되어도 인간은 이미 죽었겠지만.
새파랗게 튀어 오른 불꽃이 밤하늘의 별처럼 번졌다.
푸르게 산개하는 화염은 앞길을 막는 모든 것을 씹어 삼키며 전진했다.
각성자들은 다양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각성자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이 특성은 각성자에게 우호적이기도 했고, 적대적이기도 했다.
내가 쓰는 군단장의 특성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힘을 가져다주었지만, 그만큼 인간에게 해로운 영향을 끼쳤다.
치이이익-
화염이 스친 자리를 러브리스의 얼음이 겨우 덮었다.
압도적인 차이는 상성마저 찍어 누른다.
제라늄이 자신의 불꽃으로 그녀의 얼음을 녹이지 못했던 것처럼 그녀의 얼음 또한 이 불꽃을 잠재울 수 없다.
바닥을 메운 얼음이 빠르게 다시 녹았다.
열기와 잿더미가 흩날린다. 나는 누군가와 함께 싸우는 법을 모른다.
앞으로 나갈 때마다 러브리스가 기를 쓰고 쫓아오는 게 보였다.
그러나 몬스터가 미친 듯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기다려 줄 시간은 없었다.
찍어 뭉개고 가른다. 대검은 무게 중심을 잡는 게 중요하다.
무기 특성상 절삭력은 감소하지만, 파괴력은 증가한다.
때문에 몬스터 사체는 꿈에 나올 만큼 끔찍한 꼴이 됐다.
한 번도 배려해 주지 않는 게 억울할 만한데도 러브리스는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그녀의 이지적인 청보랏빛 눈은 악전고투하는 와중에도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역시 낙원이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쪽은 다들 어지간히 비범했으니까.
게다가 이쪽도 신하를 자처하는 또라이였다.
“보스 방으로 진입할게요.”
뒤로 흘러드는 몬스터는 남은 사람들이 처리한다. 나와 러브리스는 고속으로 전진해 보스 방 문을 열었다.
지옥 산양을 때려잡은 카운트가 계속해서 띠링띠링 올랐다.
꼴이 엉망이 된 러브리스가 보스 방 문을 걷어차는 내게 물었다.
“전하, 얼음이 다 녹았는데 일행이 무사할까요?”
“네가정말좋아가 적당히 조치를 했겠죠. 괜히 두고 온 게 아니니까요.”
사실 괜히 두고 온 게 맞았다. 조 편성엔 사심이 살짝 섞여 있었지.
난 두 사람을 붙여 놨을 때 무슨 꼴이 일어나는지 몸소 체험하고 싶지 않았다. 구경도 사양이었다.
부서진 보스 방 문 너머로 서리가 사뿐사뿐 내려앉았다.
거대한 제단을 등진 지옥 산양 군단의 군단장이 제단 앞에 서서 외계어를 외치고 있는 게 보였다.
“■■■ ■■■■ ■■■■…!!”
단말기는 어지간하면 번역 서비스도 제공하는데 저쪽 동네 언어는 아직 분석 안 한 모양이다.
하긴 내가 이 동네 박살 내고 왔지.
다른 헌터들이 저 산양 통구이들을 다시 보려면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야 할 것이다.
리자드맨과 리자드맨 주술사같이 지옥 산양 대빵도 주술사였다.
나는 지팡이를 들어 올리는 보스를 보며 잠시 과거를 회상했다.
‘다시 돌아오게 될 것이다.’
어쩐지 기분이 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