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화
세상에는 다섯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다.
멍청한데 부지런한 사람, 똑똑한데 게으른 사람, 멍청하면서 부지런하지도 않은 사람, 똑똑하면서 부지런한 사람, 그리고 마지막으로⋯⋯.
“상황 수습 어떻게 할 건데요.”
“아잉.”
사람을 완전 빡치게 하는 사람.
“사랑해요, 전하. 제 마음 아시죠? 머리 박을까요?”
네정좋이 되지도 않는 애교를 부리며 옆구리에 엉겨 붙었다.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겠다며 무릎을 꿇고 두 팔을 든 러브리스와는 정반대의 태도였다.
사하라 사막을 남극으로 만들 뼈 시린 페이스로 아양을 떠는 네정좋의 모습에는 어쩐지 사람의 심장을 얼어붙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나는 모 군단의 아이스 용머가리가 된 기분으로 오른손 검지를 반으로 접어 보였다.
당장 떨어지지 않으면 네놈의 슈퍼주니어를 반으로 접어 버리겠다는 의사 표현이었다.
타고난 용모를 이용해 주변 사람의 정신력을 뒤흔들던 네정좋이 패닉 상태에 빠졌다.
“저희가 받아야 하는 고대 신의 가호는 유물 열다섯 개 복구가 조건인데, 샛별 누나랑 유주하가 유물을 마흔다섯 개 부숴 먹었네요! 이 정도 수치면 고대 신의 신전을 밀어 버리고 나태왕의 신전을 짓는 게 훨씬 빠르겠어요. 누가 알겠어요? 저희가 얌전히 고대 신의 신전을 밀어 버리고 개종하면 나태왕도 오냐 하고 받아 줄지. 의외로 나태왕이 몬스터계의 동탁일 수도 있어요.”
분위기가 다운된 틈을 타 똑똑한데 게으른 놈이 거침없이 입을 놀렸다.
홀로그램화 된 후로 더는 죽지 않게 되어 무서운 게 없어진 인간이었다.
“레터 님.”
“예?”
“그렇게 입을 놀리시면 밖에 나가서 묻히는 수가 있어요.”
불꽃 붙은 손가락이 반투명한 홀로그램 위를 스쳤다.
홀로그램이 되어 안 그래도 백설 공주같이 하얗던 그의 얼굴이 손가락이 스친 후로 마치 백지장같이 변했다.
누가 보면 19세기 납 화장 기술이라도 배워 왔냐고 감탄할 얼굴이었다.
던전이 마치 제집인 것처럼 입을 놀려 대던 인간이 입을 다무니 주변이 한층 평화로워졌다.
물론 지금도 저 산꼭대기에선 지옥 산양들이 불타는 헤드뱅잉으로 광란의 양 통구이 파티를 즐기고 있겠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이 좁은 구닥다리 신전이 신선이 오른 극락세계인 것만 같았다.
그때,
[(Player3) <레터>(B+)가 고대 신을 모욕하는 언사를 행하였습니다.]
[고대 신이 크게 분노하며 (Player3) <레터>(B+)에게 저주를 내립니다.]
[관전 상태로 전환된 플레이어에게는 저주를 내릴 수 없습니다.]
[고대 신이 파티원 전체에게 저주를 내립니다.]
[고대 신에게 업화의 저주를 받았습니다. 화염 계열 특성의 공격력이 3% 하락합니다. (누적 숫자: 1)]
시스템 창이 뜨기 전까지는.
“⋯⋯.”
반쯤 무너진 고대 신 겸 옛 지배자의 신전에 거센 북풍이 휘몰아쳤다.
건조 기후인 지옥 산양의 영토는 펄펄 끓는 놋쇠 신전으로 열대 기후가 되었고, 이번에는 공부의 신의 잘못된 언어 사용으로 한대 기후가 되었다.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이 보면 통탄해 눈물 흘릴 일이었다.
물론 욕을 쓰지 않았으니 킹 세종은 가엽고 딱한 자로다! 정도만 발음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게이트 시뮬레이터 견학으로 맺어진 조별 과제가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나는 지옥으로부터 도래한 암흑의 시대를 앞에 두고 깊게 고뇌했다.
망한 조별 과제의 끝에 있는 건 이름 빼면 안 된다는 교수님의 말씀과 처참하게 짓밟힌 학점뿐이다.
그 학점이 내 미래 밥벌이를 결정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이는 굉장히 심각한 사태였다.
죽음에는 총 다섯 가지 단계가 있다고 하던가.
나는 죽음을 목전에 둔 것도 아니면서 다섯 단계의 세 단계를 거쳤다.
부정하고 분노하고 협상하는 단계는 지났다.
나는 아파트 단지 앞 멍석에 깔린 고추처럼 널려 햇빛에 반건조되고 있었다.
흩날리는 시스템 창이 커플 가득한 여의도 봄의 벚꽃처럼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전하⋯⋯.”
그리고 우울한 사람은 나 하나만이 아니었다.
권력을 틀어쥔 리더로부터 손수 축출된 이 파티의 프롤레타리아, 얼굴만 믿고 까불다 밑바닥으로 추락한 네정좋이 우수에 차 바닥에 껌딱지처럼 들러붙어 있었다.
“잘못했어요.”
신전 돌바닥에 껌딱지처럼 들러붙어도 불구대천의 원수 러브리스는 마주 보지 않겠다는 것인지, 제라늄을 향해 머리를 뉜 네정좋이 슬픈 눈망울을 흔들었다.
로판 여주한테 ‘감히 내게서 도망가다니. 너는 영영 도망갈 수 없어, ■■■.’ 따위의 대사를 칠 얼굴로 버림받은 멍멍이의 눈빛이라니.
몹시 기이하고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같은 낙원 소속인 저기 차세형의 얼굴을 보라. 나는 지금 저 홀로그램의 턱이 쑥 빠져도 놀라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징징대는 네정좋을 옆으로 밀어 둔 채 수용 단계를 맞이했다.
여기에 갓 찐 시루떡같이 눌어붙어 있는다고 상황이 해결되는 건 아니다.
러브리스와 너정말ㅈ같아를 선두에 세우고 뒤에서 뉴비인 척을 하겠다는 방안이 실패했으니 다른 카드를 꺼내는 수밖에 없었다.
끝까지 쓰지 않으려고 고이 품어 둔 히든카드를.
“제 계획은 실패했어요. 원래 세운 계획은 러브리스 님과 저 인간이 메인 딜을 맡는 건데, 이래서야 죽지 않으면 다행이겠네요.”
“아니, 왜 편한 길을 놔두고 굳이 어려운 길로 돌아가시려고 하는 거죠.”
“너 그러다 나가서 생매장당해. 입 다물어, 세형아.”
트러블 메이커의 현란한 입놀림을 정상인의 표상인 달콤한멜로디가 막았다.
나는 그녀를 향해 성심성의껏 감사 인사를 했고, 그녀는 어색한 미소로 껌딱지처럼 바닥을 기는 네정좋을 흔들었다. 그만 일어나라는 소리인 것 같았다.
그러나 네정좋은 그녀의 상냥한 손길에도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못생긴 사람과는 말도 섞지 않는다는 그 기막히고 코 막히고 X같은 태도는 보는 사람의 마음을 짜게 식게 했다.
나는 결국 네정좋의 멱살을 손수 틀어쥐고 일으키는 수밖에 없었다.
이 싹수없는 새끼. 초등학교 바른 생활 교과서도 미처 떼지 못한 버르장머리였다.
저 자식이 조선 시대에 태어났다면 분명 사형감이었을 것이다.
“하나 말씀드릴 게 있어요. 아주 중요한 이야기예요.”
세상에는 비극적인 일이 은하수의 별처럼 많다. 이곳에서 나가지 못하면 영원히 갇힌다.
나는 나가서 해야 할 일이 은하수의 별처럼 많았다. 결코 여기 갇혀 있을 수는 없었다.
죽는 건 좋은 감각이 아니다. 불쾌한 감각이라고 하는 게 맞겠지.
아무리 가상 공간이라도, 죽는 건 불쾌한 일이었다.
“사실 저는,”
러브리스와 네가정말좋아를 이용해 세운 계획은 망했다.
나는 우울을 거쳐 찾아온 수용의 단계를 순순히 받아들였다.
S급 두 사람을 쓸 수 없다면 남은 건 내가 나서는 방법뿐이다.
나는 많은 걸 짊어진 히어로 영화의 히어로처럼, 아주 느리고 진중하게 입을 열었다.
“손가락테크닉입니다.”
그러나 나온 말은 전혀 히어로답지 않았다.
히어로가 정체를 드러내면 무릇 멋있어야 하는데 왜 내가 정체를 드러내면 이렇게 인터넷 소설 같은지.
내 인생 장르가 ‘세계 서열 0위 그녀, 일반인 분장하고 강제 고시.’ 같은 거라고 해도 믿겠다.
날 따라 한없이 진지한 분위기를 잡아 주던 파티원들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멍청하게 풀렸다.
내게 멱살을 잡힌 네정좋이 한없이 순진무구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전하. 전하가 전하인 거 전하 빼고 다 알아요.”
오지고 지리는 라임의 소유자, 네정좋이 붉은 입술을 슬쩍 올리며 미소 지었다. 고르게 난 치아가 붉은 입술 사이에서 두드러지는 존재감을 뽐냈다.
“원래 힘과 지능은 반비례하는 걸까요?”
네정좋은 대왕 토끼 같은 얼굴로 순진무구하게 물었다.
나는 그의 멱살을 놓지 않은 채로 눈썹을 추켜세우며 말했다.
“응. 그래서 네가 이렇게 멍청한가 보다.”
나대면 묻힌다는 걸 왜 모를까.
나는 그의 백치미가 하늘을 뚫는 백치미임을 확신하며 그의 오랜 친구를 흘겨보았다.
19세기 납 화장 홀로그램이 자신의 뒤를 따르는 악우를 보며 비통해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