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죄송한데 제가 일반인이라서요-26화 (26/175)

제26화

다섯 명이 모이면 네 명은 또라이다.

조별 과제의 심오함을 표현하는 이 문장은 한 문제를 해결하러 다수의 사람 이 모였을 때, 나만 빼고 모두 또라이라는 간결한 결론을 내린다.

‘아~ 조별 과제인데 무임승차자가 있다고요?’

그러고 보니 공부하던 시절에 본 차세형 영상에서 조별 과제 조언이 나왔었지.

나는 흐릿한 과거를 되새기며 기억을 끄집어냈다.

‘그냥 무임승차자 몫까지 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별로 어려운 것도 아닌데.’

빙그레 웃는 얼굴이 악마 같았다. 아, 저쯤에서 빡쳐서 한 번 종료했었고.

‘나 말고 다른 조원 모두가 무임승차자라고요? 나만 학점에 목숨 건다고요?’

굳은살이 박인 손가락이 볼펜을 휙휙 돌렸다.

툭툭. 책상을 치는 간격이 기이하게 일정했다. 거의 세슘 원자 시계 수준이었다.

“핑거킹 님, 서쪽 결계 또 깨졌는데요.”

“핑거킹 님, 동쪽에 친 결계 유주하가 깬 것 같아요.”

“핑거킹 님, 샛별 누나가 파티원 공격해요.”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 악마의 얼굴 같았다.

나는 고시생 시절에 골백번 들은 그 지긋지긋한 목소리를 현실에서 들으며 끔찍함에 몸부림쳤다.

‘그럼 내가 다 하면 되죠. 과제 뭐 별것도 아닌데. 제가 다 하고 학점 잘 받으면 그만 아니겠어요? 방해할 사람도 없고 좋네요.’

아니다, 이 악마야.

너무 성능 좋은 두뇌를 가진 나머지 일반인의 슬픔에 공감할 수 없게 된 악마가 개소리를 지껄이며 생글생글 웃었다.

“핑거킹 님, 저 죽었어요!”

그리고 심지어는 죽은 다음에도 제가 죽었단 사실을 해맑게 일러 주며 생글생글 웃었다.

나도 알아, 망할 놈아. 유령 상태로 내 몸 통과하지 마.

[(Player3) <레터>(B+)가 사망하였습니다.]

[사망 페널티로 기기 접속을 해제합니다.]

[접속을 해제할 수 없습니다.]

[관전 상태로 전환합니다.]

“우연 님, 레터 님! 괜찮으세요?!”

간발의 차로 함정을 피한 서빈&민주 조가 함정이 터진 이쪽을 향해 달려왔다.

쿵쿵 내려앉는 천장의 돌덩이를 요령 있게 피하는 모습이 몹시 인상적이었다.

“유령이다.”

유령이 된 차세형을 본 민주가 즉시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점점 사라지다 못해 이젠 발끝만 남은 시체 위로 반투명한 유령이 떠 있었다.

아니. 사실 다리가 있는 거로 봐선 유령보단 홀로그램이라고 말하는 게 더 옳을 것 같았지만, 인간을 홀로그램 쪼가리 취급하긴 좀 그렇지 않은가.

근데 진짜 하X네 미X 콘서트용 홀로그램 같다.

“어쩌다 그렇게 되셨어요? 아, 아니지. 돌덩이에 깔리셨겠구나.”

“맞아요. 실드도 무용지물이더라고요.”

차세형은 여전히 웃는 낯으로 답했다. 빙글빙글 돌며 몸을 살피는 것으로 봐선 유령이 된 자신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다른 분들은 잘 진입하셨을까요?”

서빈이 흰 후드 집업에 묻은 돌조각을 털며 물었다. 나는 눈앞에 뜬 창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Player1) <이면(裏面) 네가정말좋아>(S)와 (Player2) <서리꽃(霜花) 러브리스>(S)가 ‘히든 스테이지 - 고대의 신단’에 진입하였습니다.]

[(Player4) <달콤한멜로디>(A-)와 (Player5) <제라늄>(A)이 ‘히든 스테이지 - 고대의 신단’에 진입하였습니다.]

“잘 진입하셨어요.”

[(Player1) <이면(裏面) 네가정말좋아>(S)와 (Player2) <서리꽃(霜花) 러브리스>(S)가 ‘고대 신의 신상’을 파괴하였습니다.]

[고대 신이 크게 분노하며 (Player1) <이면(裏面) 네가정말좋아>(S)와 (Player2) <서리꽃(霜花) 러브리스>(S)에게 저주를 내립니다.]

“문제가 조금 있긴 하지만요.”

아무것도 안 하는 놈보다 못해서 다 망쳐 놓고 성내는 놈이 더 빡친다더니, 저 인간들이 딱 그 짝이었다.

“핑거킹 님 표정을 보니 보통 문제가 아닌가 본데, 유주하랑 샛별 누나가 사고를 친 모양이네요. 하긴 그쪽이 처음부터 아슬아슬하긴 했죠. 그러게, 길마님은 그 둘을 왜 같이 보내셨대. 평소에는 동행도 못 하게 하시더니.”

홀로그램 상태로 허공을 둥둥 떠다니던 차세형이 쉴 새 없이 입을 놀렸다.

정말로 방송에 특화된 인간이 아닐 수 없었다.

간략하게 말해 혼자서 원맨쇼를 잘한다는 뜻이다.

“핑거킹 님, 이제 뭘 하면 될까요?”

주변을 굴러다니는 돌덩이를 치운 민주가 고개를 들며 물었다.

나는 던전 맵 위로 점처럼 깜빡이는 두 파티의 위치를 확인하며 바위산 높은 곳을 보았다.

“내일은 보스 공략을 하러 가야 하니 서둘러 움직이죠. 신단에서 얻어야 할 물건이 있으니까요.”

과거 손가락테크닉이 닫은 평안도 지역 특급 게이트 던전, ‘지옥 산양의 번제’.

지옥 산양의 축제는 이틀 뒤 시작된다.

축제가 시작되면 나태왕이 공간을 찢고 도착할 테고, 그러면 못 볼 꼴을 다시 보게 되겠지.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뿔에 치여 바위산 아래로 굴러떨어질지도 모르고.

확실히 레터의 선례로 죽어도 죽지 않는다는 건 알았지만, 내가 죽으면 영영 이 디지털 세상에 갇힐지도 모른다.

[(Player1) <이면(裏面) 네가정말좋아>(S)와 (Player2) <서리꽃(霜花) 러브리스>(S)가 ‘신전의 아홉 기둥(4)’을 파괴하였습니다.]

[네 번째 파괴의 결정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나마 나 없이 저들끼리 클리어할 가능성이 1%라도 있는 게 네정좋이랑 러브리스가 협력하는 건데, 지금 저러는 거 보니까 그럴 수 있을 리가 없고.

지금도 충분히 개판인데, 나태왕이 등장하면 더 개판이 되겠지.

나는 저 둘이 나태왕 앞에서도 개같이 싸울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원래 인간이란 그렇다. 위기 앞에서 놀라운 기지를 발휘해 서로 협동할 인간이었으면 진작에 그랬을 것이다.

근데 지금 저기서 개판 치는 것 봐. 나 없었으면 얘들은 이미 끝났어.

다들 저기 있는 차세형처럼 하X네 미X가 될 운명이었다고.

물론 나 없었으면 이런 던전에 들어올 이유도 없긴 하다.

나는 꿋꿋하게 고개를 추켜들며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우리 엄마가 어디서 고개 숙이고 다니지 말라 그랬다.

보랏빛으로 불타오르는 해가 산등성이에 걸렸다. 나는 아래로 추락하는 해를 바라보며 무심코 생각했다.

[(Player1) <이면(裏面) 네가정말좋아>(S)와 (Player2) <서리꽃(霜花) 러브리스>(S)가 ‘신성한 수원’을 파괴하였습니다.]

[고대 신이 크게 분노하며 (Player1) <이면(裏面) 네가정말좋아>(S)와 (Player2) <서리꽃(霜花) 러브리스>(S)에게 저주를 내립니다(2).]

교수님, 저 그냥 혼자 하면 안 될까요.

* * *

?급 던전 ‘지옥 산양의 번제’의 주 몬스터는 ‘지옥 산양’이다.

지옥 산양은 파이어 브레스를 뿜는 몬스터로 불 속성 몬스터라고 할 수 있고, 역 속성은 물이다.

물이긴 한데 우리 파티에 한하여 얼음 또한 역 속성이라고 할 수 있다.

러브리스의 특성 랭크가 S인 것에 더해 버퍼 달콤한멜로디까지 있으니까.

바위산 꼭대기의 놋쇠 신전은 축제 기간이 되면 불로 뜨겁게 달궈진다.

지옥 산양들은 불 속성답게 고온에 내성이 있어서 수천 도의 신전에서도 띵가띵가 잘 지낼 수 있는데, 인간은 좀 다르다.

멋대로 들어갔다가는 골로 갈걸.

그래서 필요한 게 아이템 파밍이다. ‘지옥 산양의 번제’ 던전 안에는 잊혀진 옛 지배자, 몰렉의 신단이 있다.

지금 우리가 들어온 히든 스테이지 ‘고대의 신단’이 그것인데, 우린 여기서 고대 신의 손길이 닿은 아이템을 싹 모아서 저 산꼭대기로 쳐들어가야 한다.

왜냐하면 고대 신은 자길 배신한 지옥 산양들에게 분노해 있거든. 현 왕인 나태왕도 싫어하고.

[(Player1) <이면(裏面) 네가정말좋아>(S)와 (Player2) <서리꽃(霜花) 러브리스>(S)가 ‘황소 형상의 제기’를 파괴하였습니다.]

[고대 신이 크게 분노하며 (Player1) <이면(裏面) 네가정말좋아>(S)와 (Player2) <서리꽃(霜花) 러브리스>(S)에게 저주를 내립니다(13).]

그래서 고대 신의 가호 버프를 받아야 하는데 이 새끼들은 어디서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이래서 고대 신이 가호 내려 주겠냐.

“핑거킹 님, 진정하세요.”

유령 모습으로 옆에 찰싹 달라붙은 레터가 침착하게 말을 건넸다.

나는 그의 말에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며 주먹을 쥐었다. 그래도 똑똑한 인간 아니랄까 봐 그나마 도움이⋯⋯.

“저 둘은 저희 길마님도 포기하셨으니까 빨리 포기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저 둘이야말로 인간의 영혼을 파괴하는 영혼 탈곡기라고 할 수 있죠. 저는 핑거킹 님이 저 둘을 제어할 수 있을 거라는 일말의 희망을 품었지만, 핑거프린스 님의 멘탈 상태로 봐서는 불가능함이 틀림없어요. 그래도 걱정하지 마세요, 핑거테크닉 님. 저는 언제나 손가락기술 님의 1호 팬이니까요.”

는 개뿔. 너도 나가 뒈져.

나는 던전 진입 다섯 시간 만에 인성을 버렸다.

사람 다섯 명이 모이면 그중 날 제외한 네 명이 또라이인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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