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화
저 인간들은 노답이지만, 그래도 높은 레벨에 좋은 길드 소속이니까 괜찮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던 시기가 저에게도 있었습니다.
“전하, 책임져 주실 거죠? 낙원에는 언제 오실 거예요?”
블랙리스트 1번, 영앤리치앤핸썸앤빅 너정말ㅈ같아가 찰싹 달라붙어 말을 걸었다.
아까 선 줄 알고 기겁했는데 알고 보니 선 것도 아니었던 기막힌 사이즈의 소유자였다.
너정말ㅈ같아라는 별명과 정말 잘 어울리는 사이즈가 아닐 수 없다.
“핑거킹 님, 쟤 좀 버리고 와도 될까요?”
블랙리스트 2번, 낙원 파티의 리더인 러브리스가 허공에 얼음 창을 만들어 냈다.
내 앞에서 무릎 꿇고 자기를 아홉 번째 신하라고 소개한 낙원의 킹또라이 중 한 명이었다.
“일단 버리면 안 되는데요.”
“버리고 올게요. 감사합니다.”
러브리스가 활짝 웃는 얼굴로 쌍창을 고쳐 쥐었다.
나는 공간을 뛰어넘어 이곳저곳 뿅뿅 도망 다니는 네정좋과 그를 열렬히 추격하는 러브리스를 보며 뒷목을 잡았다.
너희 진짜 내 말 다 귓등으로 처듣고 있지.
“우연 님, 전방에 산양 셋이 보이는데 어떻게 할까요?”
“앞으로 뛰어나간 둘이 잡을 테니까 그냥 놔두세요.”
시력이 좋은 서빈이가 높은 바위에 올라 앞을 내다보며 물었다.
여기 있는 사람 중 날 유일하게 우연이라고 불러 주는 사람이었다.
[서쪽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Player3) <레터>(B+)의 ‘실드’가 파괴되었습니다.]
“핑거킹 님, 서쪽에 친 결계가 깨졌어요.”
“서쪽은 식물지대에요. 몬스터가 아니라 식물이 움직였을 수도 있어요. 루루룽 님, 확인 한번 해 주실래요?”
민주가 고개를 끄덕이곤 서쪽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낙원 길드의 레터는 실드 특성을 갖고 있어 인근의 적을 파악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
장담컨대, 내가 이 던전에 처음 들어왔을 때 저런 쫄따구가 하나 있었더라면 던전 클리어가 이틀은 빨라졌을 것이다.
[(Player1) <이면(裏面) 네가정말좋아>(S)와 (Player2) <서리꽃(霜花) 러브리스>(S)가 ‘축복 지대’를 이탈하였습니다.]
‘축복 지대’의 유지자 달콤한멜로디가 눈앞에 떠오른 창을 보며 얼굴을 구겼다.
보통 이런 창은 시전자한테만 뜨는데 왜 나한테도 뜨지? 내가 파티장이라 그런가?
딴 헌터랑 파티를 맺어 본 적이 있어야 뭘 알든가 하지.
나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홀로 싸웠다. 이렇게 큰 파티는커녕 옆에 동료조차 둬 본 적이 없었다.
[(Player6) <루루룽>(B+)이 ‘씨앗의 의지’를 발동합니다.]
[하급 식물종 <악마의 넝쿨>이 ‘씨앗의 의지’를 집어삼킵니다.]
악마의 넝쿨이 움직였다는 창이 뜸과 동시에 민주가 휘청거렸다.
나는 휘청이는 민주를 받아 일으키며 또라이 두 인간이 뛰쳐나간 앞을 보았다.
[(Player1) <이면(裏面) 네가정말좋아>(S)가 ‘그림자 베기’를 발동합니다.]
[‘지옥 산양’(3)이 소멸합니다.]
[(Player2) <서리꽃(霜花) 러브리스>(S)가 ‘성에꽃’을 발동합니다.]
[‘지옥 산양’(7)이 소멸합니다.]
[*지옥 산양의 번제 - ‘지옥 산양’(34/579)]
달콤한멜로디의 축복 지대를 벗어나고도 저렇게 쌩쌩하다니, 굳이 안 챙겨도 되겠다.
러브리스가 만든 얼음이 일대를 빼곡히 덮었다. 자욱하게 낀 안개가 뼈가 시리도록 차가웠다.
“죄송해요. 저희 애들이 너무 앞뒤 안 보고 싸우죠?”
마력을 소모해 일대에 버프를 거는 ‘축복 지대’의 유지자, 달콤한멜로디가 머쓱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바닥에 단단하게 깔린 얼음을 발로 툭툭 차며 던전 공략을 궁리했다.
실드에 버퍼, 그리고 강력한 냉기 능력이라. 조합이 나쁘지 않았다.
“저한테 죄송하실 게 뭐가 있어요. 제가 이 공대 공대장도 아닌데.”
“네? 그렇지만 핑거킹 님께서는 여기에서 유일하게 이 던전 공략법을 아시는⋯⋯.”
“그러니까 왜 자꾸 제가 핑거킹이라고 생각하시죠?”
지옥 산양은 산양 주제에 입에서 파이어 브레스를 뿜어내는 불 속성 몬스터다.
노예 시절에 그 불로 화로를 지키는 역할을 맡았다는데, 화로의 수호자 역할을 맡은 몬스터답게 한곳에 틀어박혀 안 나오는 습성을 가졌다.
더군다나 지금은 놋쇠 신전에서 공양 축제를 벌이는 중.
아마 이 던전 내의 지옥 산양 579마리 중 500마리는 저 바위산 위 신전에 있을 것이다.
그야말로 각개격파는 꿈에도 못 꾼다는 소리.
내 대답에 말문이 턱 막힌 달콤한멜로디가 발언권을 포기하고 얌전히 찌그러졌다.
핑거킹임을 인정하지 않는 핑거킹과 대화하고 있느니 차라리 저기서 멍청한 짓을 하고 있는 제라늄이나 말리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불이 얼음을 녹인다는 건 당연한 사실이지만, 등급이 높은 얼음은 불조차도 얼린다.
그러니까 제라늄이 지금 땅바닥에 쪼그려 앉아 하는 짓은 F급이 군단장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인 이야기다.
나는 민주에게 저기에서 원맨쇼 하는 제라늄을 처리하라고 지시한 뒤 허공을 보았다.
똑딱똑딱. 타이머가 있지도 않은 초침 소리를 내며 줄어들고 있었다.
[지옥 산양 군단 침공 개시까지, 69:54:12]
던전 게이트는 시간이 흐르면 웨이브 게이트가 된다.
저 몬스터들은 우리 차원을 침공하러 온 거지 우리를 외부 차원에 초대하러 온 게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이 아무리 판소같이 변했어도 본질까지 판소가 된 건 아니다.
게임처럼 던전을 공략하고 돈 벌러 던전을 뛰어도 거긴 결국 전장.
던전 게이트가 웨이브 게이트로 바뀌기 전에 던전 문을 닫고 나와야 한다.
시뮬레이션이니 인명 사고나 재산 피해는 없겠지만, 일단 웨이브 게이트가 되면 난이도가 급증하니까.
“우연 님, 앞의 두 분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뛰쳐나가시는데요?”
“그래요?”
“저거 그냥 둬도 괜찮을까요?”
러브리스의 냉기에 입술이 파랗게 질린 서빈이 말했다. 나는 활을 드는 그를 제지하며 불꽃을 피웠다.
“그냥 저대로 두세요.”
“하지만,”
“저 정신 나간 놈들은 미리 한 번 겪어 볼 필요가 있어요.”
저렇게 나대다가 지옥 산양 떼로 만나서 그 뿔에 들이받히면 얼마나 아픈지.
옷깃을 여미던 서빈이 활을 잡은 손을 아래로 내리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떨떠름한 얼굴의 달콤한멜로디가 레터와 귓속말을 속닥거리는 걸 엿들으며 발을 옮겼다.
하루 만에 끝나지 않을 레이드니 밤을 보낼 자리를 찾아야 했다.
“핑거킹 님 일코 상태 아니었어? 너무 자연스럽게 핑거킹 님 능력을 쓰시는데?”
“누님, 그냥 얌전히 계세요. 핑거킹 님 등급을 생각해 보세요.”
“S++급이지.”
“그렇죠. 그럼 새또놈이랑 양놈새키는요?”
“S+급이지.”
“바로 그거예요.”
달콤한멜로디는 레터의 말에 무언가 깨달은 듯했다. 저 대화 어디에서 납득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랬다.
“하긴 S급인 주하랑 샛별이도 정상은 아니지.”
“그렇죠. 등급이 높은 헌터일수록 정신상태가 영 아니라는 건 학계의 정론이에요. 핑거킹 님은 S++급, 그리고 세계의 원탑. 손가락테크니션 1기인 제가 봤을 때는 핑거킹 님도 그 또라이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신 것 같아요. 과연 우리 회장이 따라다닐 만하다고 해야 하나.”
“⋯⋯회장 누구? 길마님? 아니면 새또?”
“둘 다 해당되는 말 아닐까요?”
레터가 몹시 진지한 얼굴로 속닥거렸다. 손가락테크니션이면 내 팬클럽 이름 아니야? 쟤도 그 팬클럽 회원이었어?
“아무튼 지금은 핑거킹 님이 하라는 대로 따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누님. 아까 네정좋이 개처럼 따르는 거 보셨어요? 길마님 아닌 모든 길드원을 무시하는 그 친구가 개처럼 기었다고요. 무려 자기 장점인 슈퍼주니어를 어필하는 기막힌 모습까지 보였어요.”
“그게 왜?”
“저 친구는 한없이 마이웨이로 사는 것 같아도 가슴 깊은 곳에 동물의 본능을 새긴 친구예요. 누가 강한 놈인지 가장 잘 아는 놈이다, 이거죠. 제 예상에 따르면 이제 곧 핑거킹 님 옆구리에 딱 붙어서 아양을 떨기 시작할걸요? 최고 권력자의 총애를 받는 무리의 일원은 곧 무리의 이인자라는 소리죠. 저 친구는 타고나길 부르주아라 프롤레타리아의 삶을 견딜 수 없어요. 조만간 타고난 장점을 발휘해 핑거킹 님을 홀딱 꼬셔 부르주아의 자리를 쟁취해 낼 거예요.”
일곱 살에 방송에서 수능 문제를 풀고 만점을 받아 화제가 된 천재, ‘레터’ 차세형이 개소리를 지껄였다.
수학을 잡으면 필즈상 후보, 영화에 관심을 가지면 오스카상 후보, 언론에 관심을 가지면 퓰리처상 후보, 마음을 고쳐먹어 예쁜 삶을 살면 노벨평화상 후보가 될 게 틀림없다는 말을 듣는 만능형 인간의 예견이었다.
“어, 그래?”
현 낙원 파티의 유일한 정상인이자 연장자, 달콤한멜로디가 떨떠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딱 봐도 ‘이 새끼 또 시작이네’ 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네. 저 친구를 13년간 봐 온 제가 장담할게요. 타고난 장점을 아주 잘 사용하는 친구라고 할 수 있죠. 물론 수줍음 또한 많은 친구라 단 한 번도 타고난 장점을 사용하지 않은 친구지만, 핑거킹 님이라면 또 다르지 않을까요? 왕의 남자⋯⋯ 아니, 황제의 남자가 될 기회니까요.”
레터의 새카만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누가 보면 먹잇감을 발견한 사마귀의 눈빛인 줄로만 알 터였다.
“사용해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잘 사용하는 친구라고 할 수 있어?”
“쟤 원래 눈으로만 쓱 봐도 딴 사람보다 잘하잖아요. 그것도 잘하지 않을까요?”
“뭘⋯⋯?”
달콤한멜로디가 동공 지진을 일으켰다. 레터가 그런 그녀를 보며 히죽 웃었다.
“베갯머리송사요.”
쉣. 저걸 죽여 말아.
나는 치미는 살인 충동을 참으며 주먹을 쥐었다.
개소리의 장본인으로서 정말 빡치기 그지없는 말이었지만, 말한 놈이 말한 놈이다 보니 영 납득이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
“제가 저번에 쟤랑 땡땡이치면서 태양이 된 궁녀를 봤거든요. 아, 공주의 부마도 봤어요. 패왕사신기도 봤고 감히 괘씸한지고도 봤어요. 잠깐 따라해 보라고 시켜 봤더니 재능이 있어 보이더라고요.”
공부의 신 차세형. 문제 풀이 유튜브가 무려 100만 구독자에 달하는 학생들의 아이돌.
수능 예상 기출문제가 찐으로 수능 문제였던 탓에 수능 출제관들이 몇 년간 생고생을 하게 만든 공부 빌런.
…은 사실 사극 로맨스 드라마 광인이다.
수능, 공시, 자격증 등 모든 시험을 앞둔 사람들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근데 지금 보니까 개또라이네. 괜히 낙원 소속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