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죄송한데 제가 일반인이라서요-24화 (24/175)

제24화

비장미 흐르던 공간이 순식간에 개그콘서트 현장으로 변했다.

나는 숨죽이고 처웃기 시작한 네정좋 앞으로 다가가 네정좋 얼굴에다 내 모자를 끼웠다. 넌 닥치고 있어.

“제가 또 S+급 공간 특성의 소유자로서⋯⋯.”

<상세정보>

(Leaders) <군신(軍神) 손가락테크닉>(S++)

-> 특성: 신체강화(S++), ■■■■ ■■(?), ■■■■ ■■(?)

-> 월드 랭킹 1위, 대한민국 랭킹 1위.

-> 업적: 부동의 랭킹 1위, 왕과 조우한 자, 던전 정복왕, 웨이브 정복왕, 정보 수집왕, 권능 수집가, 명예 차원학회 회원, 세계 최초 상급 게이트 솔로 클리어, 세계 최초 특급 게이트 솔로 클리어, 세계 최단 하급 게이트 솔로 클리어, 세계 최단 중급 게이트 솔로 클리어, 세계 최단 상급 게이트 솔로 클리어, 세계 최단 특급 게이트 솔로 클리어⋯⋯.

-> 정복도:

<교만왕의 영토 정복도: 72.46%>

<인색왕의 영토 정복도: 47.91%>

<시기왕의 영토 정복도: 35.53%>

<분노왕의 영토 정복도: 69.125%>

<색욕왕의 영토 정복도: 95.86%>

<탐욕왕의 영토 정복도: 12.751%>

<나태왕의 영토 정복도: 55.945%>

“⋯⋯.”

누가 펼친 건지는 모르겠지만 걸리면 용서치 않겠다.

나는 화려하게 펼쳐지는 내 상세 정보창에 입을 꾹 다물었다.

모자를 얼굴에 뒤집어쓴 네정좋은 아주 숨 막혀 죽기 직전이었다.

국제 헌터 협회 총장의 따까리로, 돈도 못 쓰는데 던전을 다닌 손가락테크닉의 경력이 화려하게 펼쳐졌다.

협회가 소유하고 있는 외부 차원 정보의 대다수가 손가락테크닉이 굴러 얻어 온 정보라는 유언비어가 진실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아무튼 저는 손가락테크닉이 아니고요.”

“전하.”

“이 단말기는 제가 손가락테크닉으로부터 훔쳐 왔기 때문에-”

“추해요.”

사태 파악 못하는 네정좋이 자꾸 나댔다.

나는 앞뒤 안 보고 까부는 네정좋의 발을 지그시 밟으며 웃었다.

너 이 극야 같은 새끼. 진짜 뒈지고 싶나.

“저기, 손가락테크닉 님?”

“우연입니다. 손가락테크닉이 아닙니다.”

“네, 그러면 우연 님.”

투명한 얼음으로 만들어진 창을 든 러브리스가 고요한 침묵 속에서 입을 열었다.

나는 자꾸 나대려고 입을 여는 네정좋을 깔고 앉으며 대답했다.

러브리스가 곤란한 얼굴로 시스템 창을 가리키며 물었다.

“현재 서버 오류 때문에 로그아웃이 안 되네요. 아무래도 두 서버가 하나로 합쳐져서 오류가 난 모양이에요. 이러면 던전을 반드시 클리어하고 클리어 랭크를 남겨야 밖으로 나갈 수 있는데, 아시다시피 특급 게이트를 클리어하려면 헌터 수백만 명이 몰려가거나 손가락테크닉 님이 있어야 해요.”

그녀의 청보랏빛 눈이 진지하게 빛났다.

나는 내 밑에 깔려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내가정말좋아의 입을 막았다.

왜냐하면 사람을 패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우연 님이 손가락테크닉 님이 아니라면, 저희는 이 던전을 어떻게 클리어하죠⋯⋯?”

이 던전 시뮬에 휘말린 모두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손가락테크닉 단말기에 저장된 손가락테크닉이 아니면 깰 수 없는 던전.

하지만 깨지 못하면 나갈 수 없는 가상의 던전.

나는 그녀의 강렬한 눈빛을 피하며 산 위의 신전으로 고개를 돌렸다.

산 위에 우뚝 선 신전에서 알 수 없는 괴성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위대한 나태왕을 위해 지옥 산양 군단이 쌓아 올린 신전.

그들의 번제는 높은 바위산 위의 놋쇠 신전에서 이루어진다.

외부 차원의 옛 지배자들이 까마득한 무저갱에 봉인된 후 외부 차원의 지배자가 된 일곱 왕 중 하나, 우리식 이름으로 나태왕 벨페고르.

벨페고르의 42군단 중 으뜸인 지옥 산양은 고대 신 몰렉의 군단이 부리던 노예였다.

옛 지배자들을 위해 마련된 72개의 권좌 중 21번째 권좌의 주인, 몰렉은 뜨거운 놋쇠 우상에 어린 산 제물을 바치는 것을 좋아했다.

몰렉의 군단을 모시던 지옥 산양들은 나고 자랄 때부터 위대한 존재에게 공양하는 것을 신성한 행위로 여겼고, 그 끔찍한 풍습은 나태왕의 부하가 된 지금도 남아 있었다.

높은 바위산 위 뜨겁게 달궈진 놋쇠 신전, 그리고 그 놋쇠 신전에서 열리는 공양 축제.

최초의 귀환자 솔로몬 왕이 쓴 외우주의 수기에 적혀 있던 내용.

나는 평안도 특급 게이트에 들어가 광기의 축제를 벌이는 지옥 산양을 보았다.

시뮬레이션은 내가 그때 본 것과 똑같은 광경을 재현하고 있었다.

외부 차원계의 북부 대공 담당, 나태왕은 참 너그러운 왕이었다.

부하들이 축제 여니까 축제 장소로 몸소 납시고 그러더라고.

나는 그 부하들 조지러 놋쇠 신전 쳐들어갔다가 나태왕 뿔에 치이고 왔다.

하마터면 바위산 아래로 데굴데굴 굴러떨어질 뻔했다.

이래저래 많은 고생 했던 장소였던 만큼 저 위로 다시 가기가 죽어도 싫었다.

나는 엄청나게 북부 대공 같이 생겼던 나태왕의 인간형을 떠올리며 손을 거뒀다.

인간 트랙터같이 몸을 들썩이던 네가정말좋아가 얌전해졌기 때문이었다.

“저는 전하가 왜 그러시는지 잘 모르겠어요.”

“저는 헌터님이 절 왜 전하라고 부르시는지 잘 모르겠어요.”

“저번에 주하라고 불러 달라고 말씀드렸는데요.”

“자꾸 그러시면 묻어 버리는 수가 있어요.”

나는 어제 낙원 소속 또라이 네가정말좋아를 묻었다.

이유는 터무니없다.

녀석이 또 입을 털었기 때문이다. 저 녀석은 이걸로 입을 세 번째 턴 것이다.

특유의 뚱한 표정을 지은 네가정말좋아가 제 배와 허리 어중간한 곳을 깔고 앉은 날 툭툭 쳤다.

대놓고 내려오라는 소리 같아 나는 엉거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네가정말좋아가 몹시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까 거기 계속 앉아 계시는 건 상관없는데 뒤로 물러나시면 곤란해요. 저 오늘 추리닝 말고 딴 거 입었어요.”

네가정말좋아가 다소곳하게 무릎을 모으며 말했다. 나는 영 이해할 수 없는 그의 말에 미간을 팍 찌푸렸다.

“사랑하는 사람한테 제일 처음으로 알려 주고 싶어요.”

부끄러운 듯 귓가를 붉힌 네가정말좋아가 수줍게 웃었다.

나는 통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에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려 낙원 길드원들을 보았다.

하나같이 썩은 표정으로 현실 도피를 하고 있었다.

아니, 내가 뭘 했다고 반응이 그래.

나는 부끄러운 듯 몸을 배배 꼬는 네가정말좋아에게서 내려오려고 뒤로 몸을 빼다가, 이 새끼가 뭔 소릴 한 건지 대충 알아차렸다.

이 새끼는 얼굴만 로판 남주인 게 아니구나. 야, 이 소설 장르 판타지야.

쉣. 별로 알고 싶지 않은 네가정말좋아의 신체 사이즈를 알게 되었다.

나는 순결이 어쩌고저쩌고하며 울상을 짓는 네가정말좋아를 피해 도망쳤다.

러브리스가 바닥에서 장가 다 갔다고 우는 네가정말좋아에게 다가가 그를 뻥 걷어찼다.

“내숭 떨지 말고 일해, 변태 새끼야.”

그녀의 서리꽃만큼이나 냉정한 목소리였다.

그래. 내숭 떨지 말고 일해, 변태 새끼야.

나는 인간 로보트처럼 삐거덕거리며 병아리 헌터의 등 뒤로 물러났다.

여기서 네가제일좋아 다음으로 키 큰 인간이었다.

“핑거킹 님, 왜 그러세요?”

제라늄이 3세기 로봇이나 진화 못 한 미생물처럼 부자연스러운 날 보며 물었다.

나는 제라늄의 말에 돌연 진지해져서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제라늄에게 현실을 알려 주기로 했다.

“저 핑거킹 아닌데요.”

“와 아, 그 랬 지. 죄 송 해 요 핑⋯⋯ 우 연 님.”

제라늄이 대종말 시대의 고철 로봇처럼 녹슨 목소리를 냈다.

지금 저기서 찐 로판 남주 북부 대공같이 정뚝떨한 섹시 싸늘 가이 표정을 짓고 있는 네정좋만큼 기이한 목소리였다.

안 그래도 짜증 나 죽겠는데, 제라늄이 S++급 너무 멋있으니까 사인을 해 달라고 등짝을 내밀었다.

나는 네놈⋯⋯ 아니, 헌터님의 피로 사인을 받고 싶지 않으면 조용히 물러가라는 답변을 건넸다.

그러자 울상을 지은 제라늄이 혈서 쓰는 조직폭력배처럼 손가락을 아득 깨물었다.

쉐에에에엣.

나는⋯⋯ 찐 공포를 느꼈다⋯⋯.

새벽은 대체 뭘까. 손가락테크닉 사인 받으려고 손가락 깨무는 또라이 팬클럽?

아닌데. 민주랑 병아리 헌터는 멀쩡한데.

나는 제라늄을 끌고 가는 민주와, 제라늄을 따라 손가락을 깨문 네정좋을 향해 발길질하는 러브리스를 바라봤다.

아니 그냥 고랭크 헌터가 다 또라이인 걸 수도⋯⋯.

“보기 좀 그러시죠. 다른 곳으로 가실래요?”

내 한정판 실드, 병아리 헌터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병아리 헌터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나 손가락테크닉인 거 밝혀졌는데 너희 너무 태연하지 않아?

그리고 여기 특급 게이트에 종합 ?급 던전인데 너무 태평한 것 아닌가.

아무리 찐이 아니라고 해도 너무 풀어졌는데. 평생 여기서 살고 싶은 건가? 아니면 내 말 안 믿고 있는 것 아니야?

다들 마치 손가락테크닉이라도 있는 것처럼 행동하시네.

이런 내 속도 모른 채 레터과 달콤한멜로디가 네가정말좋아와 러브리스를 보며 평온하게 내기를 했다.

“전 10분에 걸게요.”

“그럼 난 30분.”

“낙원 길드원들은 다 저런대요. 그래서 형이 낙원 길드랑 같이 다니기 싫다고 하더라고요.”

“지금 여기 특급 게이트거든요. 초입인 데다 몬스터들이 한 곳에 몰려 있어서 당장 위험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말려야 하는 것 아닌가요?”

“괜찮아요.”

거지같은 새벽 야잠 대신 까만 목티 위에 살짝 긴 하얀 후드 집업을 입은 그가 웃었다.

아까 봤던 그 이상한 놈이 입은 것과 비슷한 가격대의 비싼 옷이었다.

“손가락테크닉 님이 계시니까요. 무사히 나갈 수 있겠죠?”

하얀 볼에 보조개가 쏙 파였다. 공식 석상에 선 새벽 길마처럼 눈웃음친 그가 부끄러운 듯 목덜미를 긁적거렸다.

나는 형이랑 다를 바 없이 생긴 그 얼굴을 보며 가만히 생각했다.

이 자식들 내 말을 다 귓등으로 처들은 게 틀림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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