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화
“뒤에 계신 분은?”
“새 S급 헌터님. 우리 길드를 견학하고 싶으시다고 해서 데려왔어. 뭐가 문제야?”
날 보며 잠깐 고개를 갸웃거린 제라늄이 그녀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문제 설명을 시작했다.
나는 급 어색해진 분위기를 피해 구석으로 슬금슬금 향했다.
저번에 한 번 봤다지만, 그래도 모르는 사람인데 여기 멀뚱히 서 있긴 조금 그렇지.
“이리 오세요.”
“네?”
“저희랑 같이 이거 쓰고 기다려요. 체험해 보러 오신 거잖아요.”
오늘도 변함없는 교복 차림의 식물계 헌터가 내게 손짓하며 말했다.
나는 그녀의 말에 따라 그녀의 옆에 가 앉았다. 이름이 민주였었나.
“또 뵙네요, 헌터님.”
그녀의 곁에 앉아 있던 새벽 제3공대의 다른 멤버가 해맑게 웃으며 인사했다.
새또를 제 형이라고 소개한 저번의 그 병아리 헌터였다.
두꺼운 헬멧 때문에 얼굴이 잘 보이진 않았으나, 목소리로 구분할 만했다.
“그거 그냥 쓰시고 기다리면 돼요. 저희는 써 본 적 없어서 헤매고 있었는데 예리 언니랑 상현 오빠는 써 본 적 있으니까 곧 작동할 거예요.”
“작동하면 어떻게 되나요?”
“실전하고 똑같다나 봐요. 대신 안에서 죽으면 랭크도 못 남기고 밖으로 바로 튕겨 나온대요.”
“오류 같은 건 없고요?”
“가끔 던전을 반드시 클리어해야만 나갈 수 있는 버그가 생긴다고 들었어요. 두 기기가 같은 서버에 동시 접속하면 그런 오류가 생긴다는데, 흔한 일은 아니니까 괜찮아요.”
헬멧 착용하는 걸 도와준 그녀가 부산우유 근처에서 도움은커녕 방해만 하는 제라늄을 불렀다.
제라늄은 자기도 할 수 있다며 열심히 입을 털다가 결국 부산우유에게 등짝을 맞고 쫓겨났다.
침울한 얼굴로 헬멧을 쓰는 꼴이 참 초라해 보였다.
“안녕하세요, 헌터님. 헌터님이 이번에 뜬 스급 헌터님 맞으시죠? 말씀 많이 들었어요. 낙원 길마를 뻥 까 버린 전설의 헌터라면서요.”
하얀색에 가까운 잿빛 머리칼의 제라늄이 쉴 새 없이 종알거렸다.
나는 말만 섞어도 기운 빠지는 감각에 말을 어물거리며 대답을 피했다.
내가 낙원 길마를 까든 말든 그게 대체 무슨 상관인데.
“제가 하도 신기해서 직접 물어봤는데, 까인 게 아니라고 현실 부정을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언젠가는 헌터님이 낙원으로 올 거라고 하는데, 제가 꿈 깨시라고 했어요. 헌터님은 새벽으로 오실 거니까요.”
옆에서 같이 말을 듣고 있던 병아리 헌터가 제라늄의 말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고개를 저었지만,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극야 앞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이야?
사실 이 세계관 최강자는 말 드럽게 많은 저 인간일지도 모른다.
“새벽이 좀 이상한 길드기는 한데, 그래도 새벽만 한 길드가 없어요. 물론 길마형 성격 생각하면 장난 없긴 한데 그래도 헌터님께서 들어오시면-”
“좀 닥쳐.”
얌전히 앉아 있던 민주가 더는 못 참겠는지 제라늄을 발로 뻥 깠다.
나는 차이고 입을 다문 제라늄을 보며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그러게, 입에 모터 단 것처럼 떠들지 말지 그랬어.
뒤에서 한참을 낑낑대던 초코우유와 부산우유가 일순간 환호했다.
나는 환호하는 그들을 보기 위해 고개를 돌리려다가 누가 뒤통수를 빡! 치는 감각에 몸을 앞으로 숙였다.
느리게 점멸하는 시야, 혀끝이 굳는 감각. 피부의 솜털마저 비죽 솟는 느낌.
나는 토할 것 같은 감각에 순간적으로 욕을 뱉으려다가, 누가 날 쑥 잡아 올리는 느낌에 눈을 번쩍 떴다.
나만 그런 게 아닌지 곳곳에서 신음이 난무했다.
“어우, 나 머리 깨질 것 같아.”
“참아.”
“괜찮으세요, 헌터님? 이게 왜 이러지. 접속할 때 아프거나 불편하지는 않다고 했는데.”
어느새 일어난 민주가 바닥을 구르는 제라늄을 일으켰다.
나는 날 부축하는 병아리 헌터의 도움을 받아 자리에 섰다.
땅에 발을 딛고 있었지만 바닥이 보이지 않았고, 상하좌우 앞뒤 모두 시커멓기만 했다.
“이거 원래 이래요?”
“아니요. 원래 들어갈 게이트의 등급을 설정하고 들어가는 건데⋯⋯ 잠깐만, 우리 게이트 등급 설정을 했나?”
민주가 굳은 얼굴로 제라늄에게 물었다.
그러자 제라늄이 흠칫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뭐야, 지금 상황이 어떻게 된 건데?
두 사람의 말에 병아리 헌터가 발을 동동 굴렀다. 나야 뭔 상황인지 모르니까 그냥 주머니나 뒤적거렸다.
카프리 썬 남은 거 없나.
음, 없군. 잡히는 게 지갑이랑 휴대폰이랑 단말기밖에 없어.
이건 뭐 단말기를 뜯어 먹을 수도 없고.
“우리 이제 어떡해? 여기 갇히는 거야?”
“갇히기야 하겠어? 오류로 아직 필드 구현이 안 됐나 보지. 기다려 봐.”
호들갑 떠는 제라늄을 멈춰 세운 민주가 침착하게 판단을 내렸다.
나는 여기서 제일 믿음직한 민주의 곁으로 슬금슬금 다가가 섰다.
아직 어린데 침착함이 짱이었다. 나중에 크면 대성할 상이야.
개판이 된 공간 내부에서, 졸지에 우리 파티의 리더가 되어 버린 민주가 허공에 대고 시스템을 연신 호출했다.
그러나 멍청한 쇳덩어리는
[■$£¥○$■※¿¡■$]
같은 창이나 내뱉었다.
나 저거 어디서 봤는데. 단말기 초기 시스템 창 형태랑 똑같네.
“저희 여기서 못 나가면 어떻게 돼요?”
나는 자리에 털썩 앉으며 물었다.
대답한 건 곤란한 얼굴로 시스템 창을 빤히 바라보던 병아리 헌터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안심시켜 주려고 애써 웃는 모습이 꼭 새벽 길마 같았다.
그 인간, 옛날에 전쟁하던 시절에 민간인을 구하겠다고 홀로 몬스터 사이에 남은 적이 있었다.
나는 그 당시에도 각성자였는데, 그 인간은 혼자 오해해서 무사히 밖으로 나가게 해 주겠다고 큰소리쳤지. 그러다 나한테 목숨을 빚졌다.
나는 제법 먼 과거를 회상하며 손에 턱을 괬다.
굃뚫쉟뛣 같은 미친 소리만 지껄이던 시스템 창이 갑자기 인간의 언어를 했다.
[<네가정말좋아>님이 접속하셨습니다.]
“오잉.”
[<레터>님이 접속하셨습니다.]
[<러브리스>님이 접속하셨습니다.]
“전하가 왜 여기 있어요?”
[<달콤한멜로디>님이 접속하셨습니다.]
…
[입장 대기 인원 (8/8)]
[난이도 선택: 랜덤]
[단말기와 연동 중⋯⋯.]
[단말기 정보 불러오는 중⋯⋯.]
[평균 랭크 측정 중⋯⋯.]
[파티원 랭크 확인.]
[(Leader) <군신(軍神) 손가락테크닉>(S++)
(Player1) <이면(裏面) 네가정말좋아>(S)
(Player2) <서리꽃(霜花) 러브리스>(S)
(Player3) <레터>(B+)
(Player4) <달콤한멜로디>(A-)
(Player5) <제라늄>(A)
(Player6) <루루룽>(B+)
(Player7)<서빈>(B+)]
[파티원 종합 능력치 측정 중…….]
[적정 게이트 랭크 측정 중…….]
[난이도 확정.]
[적정 난이도: SS+]
[특급 게이트 정보를 불러옵니다.]
[(Leader)<군신(軍神) 손가락테크닉>(S++)의 단말기와 연동합니다.]
[단말기에 저장된 나태왕의 영토를 구현합니다.]
[주변 환경을 구현합니다.]
[데이터 확인 중⋯⋯.]
[나태왕 벨페고르의 제1군단 ‘지옥 산양’.]
[게이트 랭크 S++]
[던전 랭크 SS+]
[몬스터 랭크 S+]
[보스 랭크 ?]
[종합 랭크 ?]
[?급 던전 - ‘지옥 산양의 번제’에 진입하였습니다.]
새카만 공간에 싸늘한 침묵이 흘렀다. 모두가 하나같이 고개를 돌려 날 쳐다보고 있었다.
“전하, 왜 그 단말기 가져오셨어요⋯⋯.”
희미하게 번져 가는 평안도 지역 특급 게이트, 지옥 산양의 번제.
나는 나 혼자 들어가 나 혼자 파괴하고 나온 게이트의 모조품을 보며 침묵했다.
형태를 점점 갖춰 가는 고요한 공간에 네가정말좋아의 투정만이 울렸다.
“저 지금 우주 최강 핑거킹 봤다고 좋아해야 해요, 아니면 물음표급 던전 봤다고 슬퍼해야 해요?”
낙원 길드의 서리꽃, 러브리스가 웃을 듯 울 듯 기묘한 얼굴로 말했다.
그건 저도 모르죠. 일단 저는 여기서 탈주하고 싶어요.
물에 떨어진 기름 물감처럼 선명히 번지던 풍경이 뚜렷해졌다.
아니… 잠깐만.
단말기 연동되는 거였어? 그런 말 한 적 없잖아.
사람이 어떻게 그런 기본적인 설명도 안 해 줄 수가 있지? 연동되는 줄 알았으면 진작 내뺐지!
나는 원망을 담아 새벽 길드원들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그들도 멍하니 나를 쳐다보았다.
마찬가지로 어이없다는 표정이다.
나는 다시 선 지옥에서 머리를 쥐어뜯으며 구형 단말기를 챙겨 온 날 저주했다.
아니 이건 뭐 단말기를 뜯어먹을 수도 없고. 시X.
헌터님들, 정체와 힘을 숨긴 찐따 세랭 1위가 갑자기 등장해서 많이 놀라셨죠? 저도 그렇습니다.
B급 셋에 A급 둘, S급 셋으로 이루어진 초특급 파티가 침묵의 공공칠빵을 시작했다.
나는 간밤에 돼지고기 김치찌개에서 돼지고기 건져 먹다 엄마한테 들킨 불초자식이 된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사실 저는⋯⋯.”
뭐라고 변명하면 좋을지 모르겠지만, 일단 안 되더라도 뭐든 지껄여 보자.
나는 근미래적 긴장감이 감도는 지옥에서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아, 그러니까 제가요.
“손가락테크닉의 단말기를 훔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