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화
우상을 덕질하는 팬은 기본적으로 우상에 대한 환상을 갖는다.
우리 형은 검은색이 어울리니까 시크하고 다크한 성격일 거야!
우리 언니는 누구랑 찐 사랑을 하고 있거든요?
모르면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 떠들지 마시죠?
이런 게 보통 팬들의 생각.
하지만 저걸 듣는 본인은 그 곤란한 망상에 이를 바득바득 간다.
누가 그러냐면, 내가 그런다.
그래서 익명으로 손가락테크닉 아닌 척 열심히 댓글 달고 다녔는데, 아무도 안 믿더라고.
손가락테크닉의 반가면, 타른헬름 모조품을 쓴 사람이 지나가는 게 보인다.
뺨에 문양이 없는 거 보니 모양만 같은 모조품인 게 확실하다.
손가락테크닉의 상징인 몽마의 가면, 타른헬름은 쓰면 다른 사람에게 그 사람의 이상형으로 보이게 된다.
여기에 더해 이 가면을 쓰고 남긴 지문이나, 타액 같은 것도 몽마의 것으로 판명되지.
완전 범죄를 위한 물건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이 가면은 내 정체를 숨기기 위한 물건이자 핑거킹의 상징이었다.
한창 전쟁이 벌어지고 있을 때, 각성자라면 물불 안 가리고 들러붙는 사람들에게 내 신상을 털리지 않기 위해 스미스 아저씨의 주선으로 비싼 돈을 들여 만든 건데, 그 모조품들이 건물 안 도처에 널려 있었다.
그리고 그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반서준의 핑거킹을 향한 광기의 산물 같은 모습을 보며 침묵했다.
곳곳에 보이는 손가락테크닉의 상징색인 블루블랙 컬러, 손가락테크닉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가면 모조품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 손가락테크닉의 검 프라가라흐 모양 열쇠고리를 달고 다니는 사람들.
내가 새벽이 아니라 손가락테크닉 팬클럽에 왔나. 나는 이해할 수 없는 광경에 침묵했다.
“헌터님,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저 잠깐 전화 받고 올게요.”
부산우유가 진동하는 휴대폰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끄덕였다.
동트기 전의 새벽만큼이나 어두침침한 낯빛의 직장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다 내가 직장인이 되면 재미 없어질 모습이었다.
프라가라흐 미니어처나 열쇠고리 사고파는 건 나도 봤는데 저렇게 정교한 건 또 처음 보네.
손가락테크닉 팬클럽 가입하면서 새벽 들어가면 저런 거 주나.
가면 모조품도 되게 정교하게 생겨서 누가 보면 진짜 손가락테크닉 가면인 줄 알 것 같다.
나는 분주하게 움직이는 그들을 구경하며 발을 까딱거렸다.
간혹 가면을 쓰고 다른 사람에게 장난을 치거나 하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그럴 수 있지. 나도 어릴 때 슈퍼히어로 코스튬 입는 거 좋아했다.
째깍. 분침이 한 번 더 움직였다. 부산우유는 통화가 길어지는지 생각보다 늦었다.
나는 후드 주머니에 넣어 놓았던 마지막 카프리 썬을 입에 물고 구석에 가서 섰다.
이건 비밀이 아니지만, 나는 할 일이 없어지면 휴대폰을 꺼내는 습관이 있다.
사실 우리나라 사람들 다 할 일이 없어지면 휴대폰을 꺼내 드는 습관이 있지.
나는 카프리 썬 사과 맛을 끝장내며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누가 내게 말을 건 것은 그때였다.
“안녕하세요. 저희 구면이죠.”
헌터들에게만 지급되는 새벽 야잠을 들고 손가락테크닉 가면을 쓴 남자.
셔츠는 모 명품 브랜드의 초고가 셔츠였고, 바지나 구두 또한 마찬가지였다. 반면에 얼굴은 아주 평범했다.
평범한데 준수한 얼굴.
못생겼단 말은 안 듣고 다닐 것 같은데 이상하게 평범해 보이는 얼굴.
엄마가 보면 딱 좋아할 것 같은 스타일. 그리고 느껴지는 기이한 감각.
나는 단번에 알아차렸다. 저건 내 이상형이고, 저 남자는 내 타른헬름과 비슷한 아이템으로 얼굴을 바꿨다.
물론 타른헬름 만큼 정교한 효과를 주진 못하기에 어색한 부분이 없진 않았지만,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가격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여기서 또 만난 건 아무래도 운명-”
“우연이요.”
나는 별말도 안 되는 플러팅을 날리는 인간에게 내 닉네임을 불러 주었다.
뭐야 이 돈 많고 위험한 븅신은.
무슨 생각으로 접근한 거야?
진짜랑 비슷한 기능의 모조품을 만든 것 보니까 길드 헌터들은 다 돈이 썩어 넘치나?
남자는 내 말을 듣곤 입을 굳게 닫았다. 나는 별 거지같은 걸 다 봤다고 중얼거리며 자리를 옮겼다.
남자는 따라오지 않았고, 금세 통화를 끝낸 부산우유가 나타났다.
“오래 기다리셨죠?”
급히 달려온 부산우유가 산발이 된 머리를 정리하며 말했다.
그런 그녀의 뒤로 그녀의 파트너 초코우유가 따라붙어 고개를 내밀었다.
통화 받으러 갔다가 파트너를 물어 오시네.
“어서 오세요, 헌터님. 저희 길드 견학 한번 해 보시겠어요, 아니면 바로 계약서 보러 가시겠어요?”
“보통은 어떻게 하나요?”
“보통은 견학해 보시곤 하죠. 왜냐하면 저희 길드 훈련장에는 그 비싼 게이트 시뮬레이터가 있거든요. 대한민국에 단 두 대뿐인 시뮬레이터라 견학 오는 헌터님들은 물론이고 다른 길드 헌터들도 호시탐탐 써 보려고 한답니다.”
초코우유가 새벽뽕 찬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오, 게이트 시뮬레이터? 그거 무진장 비싼 거잖아.
헌터 협회 본부가 부족한 예산 충당한다고 단 50개 예약 판매한 그거.
딱 50개만 만들 생각은 아니었는데 제작비가 엄청나게 들어가는데다가, 신경 접속 회로를 담당한 헌터가 갈리다 못해 앓아누워 한정품이 된 비운의 물건이다.
약간 20xx년의 스X치 동X의 숲 에디션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저 그거 한번 보러 갈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마침 오늘 저희 공대 사용 날이니 헌터님도 기왕 가는 김에 한번 접속해 보시는 게 어떠세요?”
“좋아요.”
새벽에 그런 엄청난 게 있었을 줄이야. 역시 최고를 추구하는 새또놈 답다고 해야 하나.
나는 한결 들뜬 발걸음으로 초코우유와 부산우유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부산우유와 초코우유는 중간중간 다른 곳에도 들르며 새벽 길드 자랑을 빠방하게 해 줬는데, 솔직히 말해서 다 귓등으로 들었다.
게이트 시뮬레이터!
나왔을 때 사고 싶어서 협회 본부 달려갔는데 길드 단위로 팔 거란 소리 듣고 절망한 그 물건!
그날 본부에서 마주친 레넌 타일러가 쓰고 싶으면 크라운 들어오라고 해서 엿 날렸던 그 물건!
레넌 타일러의 크라운이면 미국 길드 1위니까 굉장히 대단한 길드긴 한데, 이름이 너무 과자 회사 같았다.
물론 크라운이 뭔지는 알지. 근데 너무 과자 회사 같잖아.
그래서 나는 레넌 타일러를 죠리퐁이라고 불렀다. 헛소리할 때면 버터 와플. 짜증 나게 하면 쿠크다스.
보통 쿠크다스로 많이 부른다.
초코우유와 부산우유는 새벽 길드 6층에 마련된 제3공대의 훈련장과 간이 숙소, 회의실 등을 보여 주며 열정적인 영업을 했다.
내가 새벽 길드에 들어가게 되면 스스급이니 무조건 제1공대로 가게 될 텐데, 그러면 지하 1층과 2층에 마련된 훈련장을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고, 여기보다 훨씬 좋은 시설의 3층을 사용할 수 있게 될 거라고 한다.
구미가 당기는 말은 아니었다.
“게이트 시뮬레이터 전용 훈련장은 10층에 있어요. 그런데 저희 공대원들한테 먼저 접속해 있으라고 해서 잠깐 기다려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괜찮아요. 저는 외부인인데 권해 주신 것만으로 감사해야죠.”
내 말에 초코우유가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부드럽게 열린 엘리베이터 문 위에 10이라는 숫자가 쓰여 있었다.
“이쪽으로 오세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나를 부산우유가 이끌었다.
나는 괜히 이것저것 구경하다 길 잃는 사태를 만들지 않기 위해 부산우유의 옆에 찰싹 붙었다.
부산우유가 짚은 두꺼운 유리창 너머로 거대한 스크린과 VR게임기 같은 헬멧이 보였다.
안에는 저번에 합정역에서 봤던 나머지 두 사람과 입방정으로 유명한 새벽의 제라늄이 있었다.
“접속 안 하고 뭐 해?”
제3공대의 공대장인 초코우유가 훈련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며 물었다.
그러자 영 모르겠단 표정으로 기기를 만지작거리던 그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형! 오셨어요?”
“형, 길마 형이 아까 왔다 갔는데 무슨 설정을 하고 갔는지 작동이 안 돼요. 누나는요?”
“뒤에.”
제라늄에게 누나라고 불린 부산우유가 내 손을 잡고 훈련장 안으로 성큼성큼 향했다.
나는 부산우유에게 찰싹 붙어 훈련장 안으로 들어왔다.
복잡하게 생긴 메인 기기를 중심으로 선이 연결된 헬멧 다섯 개가 보였다.
아, 저 헬멧을 쓰면 시뮬레이션이 시작되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