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화
두 사람은 내가 집에 가서 산 걸 놓고 오겠다고 말하는 순간에도 초조한 듯 발을 동동 굴렀다.
안 가겠다고 한 것도 아니고 조금만 이따 가겠다고 했는데 왜 저러지.
새벽 길마가 빨리 안 데려오면 잡아먹기라도 한다고 그랬나.
나는 오면서 저녁과 두부는 물론이고 마트랑 된장찌개 전문점을 사 주겠다는(!) 소리를 하는 두 사람을 꿋꿋하게 무시했다.
아니 헌터 일로 돈을 많이 벌었다고 그런 식으로 돈을 흥청망청 쓰면 어떡해요.
노년에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는 데 노후 자금을 모아야지.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말 하기 좀 그렇지만, 저 두 사람은 굉장한 낭비를 하고 사는 것 같다.
아니면 헌터로 살다 언제 죽을지 모르니 열심히 즐기고 훅 가겠다는 식으로 사는 건가?
그러면 난 할 말 없고.
“엄마 나 잠깐 어디 다녀올게.”
“어디?”
“새벽 길드.”
나이가 계란 한 판을 넘은 두 사람이 나 하나만을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놀란 엄마의 말을 다 듣지 않고 현관문을 나섰다가, 너 머리 안 감아서 떡졌으니까 모자 쓰고 가라는 말에 백스텝을 밟았다.
세상에, 모자를 안 쓰고 바깥에 나갔다니. 충격적.
나 고등학생 땐 깜빡은 무슨 간식까지 야무지게 챙겨 갔는데, 언제 이렇게 됐대.
세월이라는 게 참 무서운 것 같다. 고등학생 때가 좋았지. 별걱정 없이 공부만 하고.
하지만 누가 그때로 돌아가게 해 준다고 해도 난 그때로 안 돌아갈 거다.
수능도 수능인데, 그때로 돌아가면 다시 게이트 열리는 꼴을 봐야 하잖아.
과거를 추억하는 건 그 과거가 바꿀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가 다시 미래가 된다면 그건 이제 추억으로 남을 수 없다.
언젠가 반드시 지켜야만 하거나, 바꿔야만 하는 현재가 될 테니까.
나는 맨날 쓰고 다녀서 살짝 때 탄 분홍색 캡 모자를 꾹 눌러쓰고 아파트 밖으로 나왔다.
주인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던 두 사람이 내 앞으로 쪼르르 다가왔다.
“기다렸습니다, 헌터님! 가시죠!”
“헌터님 당황하시잖아, 바보야. 이리 오세요, 헌터님. 제가 차 끌고 왔어요.”
차 키를 든 부산우유가 장난 아니게 비싸 보이는 차에 탔다.
되게 장난감 같이 생긴 슈퍼 카였는데, 생긴 것부터 영 심상치 않았다.
“이거 사실 저희 길드장님 차인데 제가 헌터님 모신다고 빌려서 끌고 나왔어요.”
차 겉면에 매끈한 잿빛 광택이 흘렀다.
딱 봐도 이 동네에 있을 차는 아닌데 왜 이런 누추한 곳에 저런 차를 끌고 오셨는지.
나는 오지고 지리는 클라스의 차를 보며 침묵했다.
“운전은 예리가 저보다 더 잘하니까 저는 먼저 돌아갈게요. 그럼 이따 다시 뵐게요, 헌터님.”
초코우유가 가볍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 그의 오른손 엄지에 자리 잡은 새벽 길드의 반지가 어스름한 빛으로 빛났다.
초코우유가 뿅 하고 사라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길드 사옥으로 이동할 수 있는 반지예요. 헌터님도 새벽 길드로 오시면 지급받으실 수 있답니다.”
내가 밖으로 나온 이후로 줄곧 싱글벙글 웃고 있던 그녀가 내게 손을 까딱였다.
나는 내가 탈 급이 아닌 것 같은 차를 보며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녀의 재촉에 못 이기고 차에 탔다.
이거 대체 얼마야.
차는 비싸 보이는 게 다가 아니었는지 몹시 매끄럽게 굴러갔다.
반면에 나는 갑자기 찾아온 외제 차 탑승 기회에 딱딱하게 굳었다.
당장에 내 귀에 덕지덕지 달린 피어싱이 개당 수백억씩 하는 건 아는데, 그건 손가락테크닉 통장에서 빼 쓴 거라 내 돈같이 안 느껴진다.
그 통장에서 빼서 쓴 돈이라곤 이런 수백억 수천억대 아이템이나 마님 주려고 산 건강 보조 식품 같은 것들이라서 적응이 안 되네.
나름 효도한답시고 평범한 홍삼으로 속여 마님에게 진상한 건강 보조 식품들도 죄다 게이트 산이었지. 그것도 0자가 엄청 많이 붙어 있긴 하지만.
그런 내가 이런 평범하고 대중적인 사치를 겪어 보다니. 세상에, 맙소사.
슈퍼 카를 아무렇지도 않게 모는 부산우유는 잔뜩 위축된 내가 마음에 걸렸는지 내 쪽을 자꾸 힐끗거렸다.
나는 그녀에게 붙일 말이 뭐 있나 대충 생각하며 눈동자를 굴리다가, 일단 아무 말이나 해 보기로 했다.
“헌터님, 길드장님 차를 막 빌려 와도 되는 건가요?”
“이 차요? 30억 정도밖에 안 하는데요, 뭐. 저는 이런 외제 차는 필요 없어서 안 사지만, 이 정도는 저도 충분히 살 수 있어요. 부수면 갚으면 돼요. 아, 그런데 전 세계 20대 한정으로 나온 차라 부수면 곤란할지도 모르겠네요. 흠.”
아니, 차를 몰면서 부술 생각부터 하시면 어떡해요.
긴장을 풀려고 한 말이었는데 되려 긴장을 하게 만드시네.
나는 머리 떡져서 캡 모자 쓰고 나온 내가 여기 타고 있어도 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 인생에 있어 소비란 카프리 썬과 리듬 게임 정식 구매뿐이었는데.
오락실 가서 500원 넣고 유비트 두들기는 그런 것뿐이었는데.
부산우유는 잔뜩 긴장한 날 보며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외모 버프 때문인지 주변에 깃털이 휘날리는 후광 효과가 일어났다.
“사실 이 차보다 아까 보신 그 반지가 더 비싸요.”
“네?”
“이건 30억, 그 반지는 50억. 반지에 가공한 고정석이 박혀 있거든요. 그러니까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정식 헌터로 살게 되면 아무렇지 않아질 금액이니까. 소⋯⋯ 아니, 그, 소액이라고 생각하실 거예요. 이제껏 써 왔던 돈 말이에요.”
부산우유가 어색하게 웃으며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렸다.
나는 이상하게 어긋나는 그녀의 시선에 의아해하다가 얌전히 신경 끄기로 했다.
그래, 이 사람들 얘기하는 것 보면 다 이 꼴인 모양이니까 가서 기죽지 않게 연습이나 해야겠다.
난 통장에 0 엄청 많이 찍힌 손가락테크닉이다.
손가락테크닉 단말기가 있어야만 쓸 수 있는 돈이지만, 아무튼 엄청난 부자 손가락테크닉이다.
우리 동네 오락실 리겜 1위 손가락테크닉이다.
다들 내 닉네임 보고 사칭인 줄 알지만 그래도 찐 손가락테크닉이다.
‘나는 손가락테크닉이다.’로 점철된 자기 세뇌는 생각보다 효과가 있었다.
나는 정말 손가락테크닉이 된 우연의 기분으로 팔목을 확인했다.
…아, 우연 단말기 두고 왔다.
“헌터님, 제가 단말기를 두고 왔는데 괜찮을까요?”
“단말기요? 음. 괜찮을 것 같아요. 길드를 둘러보고 계약 조건을 보러 오시는 거지 당장 계약하러 오시는 건 아니니까요.”
거칠게 브레이크를 밟은 부산우유가 빙그레 웃는 얼굴로 답했다.
나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감각에 숨을 쪼개어 쉬며 주먹을 꽉 쥐었다.
초코우유가 나한테 약을 팔았어. 이게 어디가 운전을 잘하는 거야. 난폭 운전을 잘하는 거지.
특급 게이트에서도 못 느낀 생명의 위협이 느껴졌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웃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당신을 시기왕보다 더 대단한 사람으로 임명합니다. 축하합니다.
“그런데 원래 갓 각성한 새내기 헌터에게 이렇게 잘해 주시나요? 길드장님이 차도 빌려주시고.”
“네? 그거야 당연히 소-”
말하다 갑자기 혀를 깨문 그녀가 왼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나는 몹시 아파 보이는 그녀를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그녀의 무릎에 카프리 썬 딸기 키위 맛을 올려놓았다.
나는 옛날부터 카프리 썬 먹으면 아픈 게 낫더라고. 그냥 카프리 썬 많이 좋아한다는 소리였다.
“소개를 받아서요. 사헌 길드장님한테요.”
눈가에 그렁그렁 맺힌 눈물을 닦은 그녀가 뭉개진 발음으로 대답했다.
아하, 그러시구나. 사헌 길드장님께 소개를 받으셨구나.
…왜지. 왜 소개를 해 주셨지.
나는 급격하게 혼란에 빠졌다.
날 영입하고 싶으신 게 아니라 날 새벽으로 보내 버리고 싶으셨던 건가.
아닌데. 자연드림 아줌마는 손가락테크닉만큼이나 새벽을 싫어했는데.
새벽 길마 새벽 반서준은 헌터들 사이에서 최악의 인기를 자랑했다.
왜냐하면 끝내주게 재수 없기 때문이다.
반서준은 자기가 인정한 실력자가 아니면 그 누구 앞에서든 매몰차게 굴었다.
가장 피해를 많이 보는 건 새벽 길드원들인데, 당연하게도 맨날 까인다.
근데 또 틀린 말은 아니라서 반박할 수도 없다. 그가 하라는 대로 하면 정말로 훨 나아지기 때문이다.
반서준은 자기 길드원만 깐 것도 아니고 다른 길드 소속 헌터들도 깠다.
상급/준상급 게이트나 웨이브가 열리면 어쩔 수 없이 다른 헌터들과 합동 토벌 작전을 펼쳐야 했는데, 그럴 때면 어김없이 습관이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반서준과 함께 합동 공략을 해 본 헌터들은 반서준 이름만 들어도 학을 뗐다.
자연드림 아줌마는 애새끼가 재수 없다고 맨날 욕했다. …사실 나보다 쟤가 더 욕먹었다.
새또나 새친놈 같은 별명도 다 그런 것 때문에 붙은 거다.
사실 새친놈은 나름대로 긍정적인 별명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핑거킹 덕질하는 반서준을 지칭할 때 보통 쓰이거든.
새또는 그냥 익명게에서 욕할 때 쓴다. 너정ㅈ만큼 안 좋은 별명이었다.
부산우유는 깨문 혀가 그렇게 아팠는지 한참 동안 어깨를 들썩거리다가, 드디어 괜찮아졌는지 카프리 썬을 가져가며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나는 그녀가 아파한 동안 사고가 안 났다는 것에 감사하며 카프리 썬 페어리 맛을 땄다.
딸기 키위 맛이 더 좋긴 한데 양심상 아픈 사람한테 양보했다.
매끄럽게 굴러간 차가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해 새벽 길드 건물 지하 주차장에 안착했다.
나는 그녀를 따라 차에서 내려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부산우유는 날 안으로 통하는 문으로 데려가더니, 초코우유와 마찬가지로 손에 낀 반지를 입구에 가져다 댔다.
반지를 인식한 입구가 부드럽게 열렸다.
“너무 놀라지 마세요.”
열린 입구 앞에 서서 잠시 머뭇거린 그녀가 짤막한 말을 남겼다.
너무 놀라지 말라고? 무슨 뜻이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를 따라 건물 내부로 들어갔다. 건물 안은 음, 뭐랄까.
반서준⋯⋯ 능력 지위 재산 다 가진 남자⋯⋯ 하지만 단양 우씨 32대손인 나 손가락테크닉은 가지지 못했지.
이딴 드립을 쳐야 할 것 같은 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