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죄송한데 제가 일반인이라서요-20화 (20/175)

제20화

철 지난 뉴스를 찾아봤더니 사헌 동호회의 사건 사고에 관한 괴담이 끝없이 쏟아져 나왔다.

산행 음주 과태료는 기본, 게이트 음주 과태료는 거의 경악.

사헌 동호회의 스케일이 너무 놀라워서 김밥이 목에 걸린 사람, 여기 있습니다.

사헌 동호회는 그 뭐지, 일반 동호회 같은 느낌이 아니라 ‘하하하! 우리는 인간의 한계를 시험할 생각이다! 우리와 함께 인간의 한계를 시험할 생각을 하는 너! 지금 당장 우리 동호회로 와라!’ 같은 느낌이다.

헌터는 초인이 아니라 특별한 능력을 각성한 사람들인데, 언제부터 다들 초인이 된 건지 모르겠다.

나는 이제 사헌 사람들이 팔굽혀펴기 100회, 윗몸 일으키기 100회, 스쿼트 100회, 그리고 런닝 10km를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한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머리가 다 가발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삼대장 동호회 중 등산 동호회가 에베레스트, 낚시 동호회가 심해인 거면 남은 바둑 동호회는 대체 뭘 하는 거지?

‘후후후, 두 녀석은 동호회의 최약체였지. 그래서 두 동호회가 메이저인 거다! 하드코어하지 않으니까!’ 같은 말이 나오면 어쩌지. 충분히 가능성 있을 것 같은데.

나는 사헌 길드에 대한 심도 깊은 고민 끝에 결론을 내렸다.

사헌 막내 레나가 모든 동호회 활동에 끌려가고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나는 사헌에 안 가는 게 옳다.

내 자아를 구성하고 있는 아싸력이 온 힘을 다해 사헌 길드를 거부하고 있었다.

“난 사헌 길드에 가지 않기로 했어.”

엄마가 좋은 생각 했다며 어깨를 토닥거려줬다.

나 어제 남극에서 얼어 죽을 뻔했는데 사헌 길드라면 이제 정복할 산이 없으니 남극이나 화성에 가겠다, 같은 말을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럼 남은 건 새벽이랑 일연이랑 백천인가?”

나는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며 티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까 튼 티비 화면 위로 익숙한 얼굴의 백천 길드 길마가 보였다.

우아하게 웨이브진 검은 머리칼, 타오르는 한낮의 태양처럼 밝은 금색 홍채.

30대지만 20대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은 미인이 사근사근한 미소를 지으며 기자들의 말에 답했다.

정오의 태양을 심볼로 삼은 길드, 백천.

길드장은 모 대기업 회장의 고명딸이자 A+급 헌터인 고인하, 조금 특이한 구조의 새벽이나 낙원과는 달리 정말 전형적인 수직 구조의 대형 길드.

백천에는 스급이 없으니 들어가면 바로 간부 자리를 꿰찰 수 있겠지.

그렇지만 백천은 정계나 다른 분야로도 얽힌 게 많아서 좀 그런데.

헌터가 카르텔이나 다른 계열에 끼게 되면 일이 복잡해진다.

그런 건 다른 나라의 일만 봐도 알 수 있는데, 끝이 참 허무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렇다고 일연에 들어가자니, 그건 또 싫다.

일연은 테이머로 이름 높은 길드장 안태욱과 그의 동료 몇몇이 같이 세운 길드였다.

공동 창업을 한 바람에 간부들의 힘이 아주 세고, 파벌 싸움이 심하다고 들었다.

내 목표는 얌전히 살기인데 그런 길드의 유일한 스급이 됐다간 개망하는 수가 있다.

그럼 일연도 제외네.

싫은 거 다 제외하니 남는 게 새벽밖에 없었다.

아, 그치만 새벽은 진짜 싫은데. 나는 손가락테크닉 팬클럽 가입 같은 거 하고 싶지 않은데.

“잘 먹었습니다.”

나는 그릇을 싱크대에 넣어 놓고 물컵에 물을 따랐다.

힘 안 들이고 쉽게 살려면 상하관계가 거의 없는 새벽에 가던가, 상또라이 판인 낙원에 가던가, 울 애기 오구오구 우쭈쭈 해 줄 사헌에 가야 했다.

일연에 갔다간 파벌 싸움에 얽힐 수 있고, 백천에 갔다간 괜히 복잡한 일에 휘말릴 수도.

그냥 길드에 들어가지 말까?

손가락테크닉 팬인 척 던전 스틸 무법자 해?

하지만 그랬다간 새벽 길마의 뜨거운 러브콜을 받을 수도 있다.

원래 손가락테크닉 팬 하면 저 인간이 대표 인물이니까.

그리고 지금은 반서준이 정보를 막아 주고 있다지만, 나중에 가서 모두 거절하고 결국 무소속으로 남는다면 더는 그래 주지 않을 것이다.

그럼 내 던전 스틸 때문에 엄마가 피해를 보겠지. 정말 곤란한걸.

“우리 공주, 할 일 있어?”

애호박을 탕탕탕 썬 엄마가 날 보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엄마의 말에 답했다.

“아니. 없는데.”

“그럼 나가서 두부 좀 사 와.”

“지금?”

“응. 엄마 지갑에서 카드 가져가.”

나는 바닥에 껌딱지처럼 눌어붙어 있고 싶은 욕구를 꾹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부 사면서 카프리 썬도 사야지.

창고형 마트 가서 두 상자 사 왔는데 벌써 다 마셨다.

나는 늘 챙겨 다니는 휴대폰과 지갑, 그리고 구형 단말기를 챙겼다.

신형 단말기는 아직도 메시지가 폭풍처럼 오고 있어서 차고 다니기 좀 그랬다.

“다녀오겠습니다.”

“빨리 갔다 와. 딴 길로 빠지지 말고.”

“내가 무슨 세 살 먹은 어린애야? 걱정 마.”

현관으로 마중 나온 엄마가 픽 웃으며 배웅했다.

나는 엄마를 향해 손가락 하트를 날리며 문을 열었다.

표정이 예전보다 훨 나아진 것 같아서 기뻤다.

* * *

사람을 미치게 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말을 하다 마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안녕하세요. 잠시 대화 좀 할 수 있을까요?”

엄마 심부름하는 사람 앞길을 막는 것이다.

나는 입에 문 카프리 썬 사파리 맛을 후루룩 마셔 버리곤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하지만 지나가겠다는 뜻이었다.

“잠깐만요, 헌터님. 저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

짱 구린 새벽 야잠을 걸친 초코우유가 초조한 듯 입술을 깨물며 따라붙었다.

그쪽 이상한 사람 아닌 건 저도 알죠. 옷부터가 새벽 야잠이잖아요.

하지만 나는 초코우유의 부름에 응답하지 못할 이유가 있었다.

왜냐하면 난 지금 엄마의 심부름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심부름은 굉장한 페널티를 가진 퀘스트로, 실패하면 이따 저녁밥을 못 먹는다는 페널티를 얻지.

“본론부터 말해야지. 누군지부터 밝히고.”

바람 부는 건물 옥상에 서 있던 부산우유가 나와 초코우유 앞에 폴짝 뛰어내렸다.

극야처럼 새하얀 머리카락이 그녀가 만든 바람에 하늘하늘 나부꼈다.

“안녕하세요. 저희는 새벽 길드의 부산우유랑 초코우유라고 합니다. 새벽 길드 유튜브 관리와 신인 영입을 맡고 있어요. 저번 합정역 웨이브에서 각성하신 헌터님과 길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잠시 시간 괜찮으실까요?”

나긋나긋 예쁜 목소리였다.

안 그래도 예쁜 얼굴로 유튜브에서 뜨거운 인기를 끌고 있는 그녀인데 웃기까지 하니 한 폭의 명화가 따로 없었다.

이 얼굴이면 지독한 얼빠 네정좋도 먼저 말을 걸겠지.

나는 약간 후궁에게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준 멍청한 왕이 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헉, 이러면 안 되는데.

“다른 길드에 이미 들어가셨다고 말씀하시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아직인 모양이네요. 다행이에요.”

“그런가요?”

“헌터님은 대한민국에 열 명도 안 되는 S급 헌터니까요. 다들 헌터님을 영입하고 싶어 몸이 달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물론 저희도 마찬가지예요.”

나는 지금까지 내가 얼굴 밝히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얼굴 예쁜 사람이 말하면 얌전해지는 것 같았다.

하긴 어제도 극야한테 홀랑 넘어갈 뻔했지.

곤란할 때마다 분위기를 깨는 네가정말좋아가 없었더라면 틀림없이 넘어갔을 거다.

걔는 소설 주인공같이 생겼으면서 대체 왜 그렇게 사는지 모르겠다.

“혹시 저희 길드 유튜브 보시나요? 아니면 SNS라던가.”

“아, 저는 고시생이어서요. SNS는 물론이고 유튜브도 잘 안 봐요.”

유튜브는 리듬게임 풀콤 영상 찾아볼 때 주로 켠다.

예솔이가 가끔 카톡으로 유튜브 알고리즘에 빠져서 마감을 못 했다고 징징대곤 했는데, 난 그게 뭔지 정말 궁금했어. 유튜브 알고리즘에 몇 시간이나 빠져 본 적이 없어서 말이야.

“그럼 저희 길드로 가시겠어요? 여기서 백 번 말씀드리는 것보다 한 번 가서 보시는 게 더 나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지, 현아?”

부산우유의 말에 초코우유가 고개를 끄덕였다.

초코우유 이름은 세 글자인 걸로 아는데 현이라니, 애칭인가.

하긴 닉네임부터 무슨 우유로 맞춰 지은 티가 났다.

유튜브 댓글에도 두 사람 커플 아니냐는 질문이 잦았던 걸로 기억한다.

유튜브는 잘 안 보는 게 맞는데, 새벽 같은 경우에는 새친놈이 하도 귀찮게 해서 조금 봤다.

새벽 길드보다 언니 얼굴이 더 재밌더라. 부산우유 얼굴 찬양은 매 편 빠짐없이 달리는 댓글 중 하나였다.

“죄송한데 제가 지금 바빠서요. 당장 갈 수는 없을 것 같아요.”

“네? 일정 없으시다고 알고 왔는데⋯⋯.”

“일정이 없었는데 생겼어요. 저는 지금 두부 심부름을 해야 해요. 빨리 가져가지 않으면 이따 제 저녁밥이 사라질 거예요. 저는 세 끼 꼬박 챙겨 먹어야 하는 한국인이라 이건 굉장히 중요한 일이랍니다.”

한국인 특성, 그건 바로 밥이지.

우리 민족은 싸패 집착남은 봐줘도 밥 안 먹이는 놈은 죽어라 욕하는 민족 아니던가.

엄마가 끓이는 건 분명 오늘 저녁에 먹을 된장찌개.

두부를 제시간 안에 가져가지 못하면 나는 저녁을 못 먹는다. 내 저녁밥! 놓치는 건 절대 못 참지.

나는 부산우유와 초코우유에게 고개를 꾸벅 숙인 뒤 다시 갈 길을 갔다.

부산우유가 다급하게 쫓아오며 딜을 했다.

“저녁 제가 사 드릴게요! 호텔에서!”

“저는 저희 엄마 밥이 좋아요.”

“그럼 제가 두부를 사 드릴까요?! 한 백 개쯤?!”

“두부 백 개 넣은 된장찌개를 먹고 싶진 않은데요.”

초코우유와 부산우유가 번갈아 가며 이상한 제안을 했다.

아, 그러니까 저는 그냥 심부름을 해야겠다니까요. 안 가겠다고 한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따라붙으시는지?

멍청한 레이스는 한동안 계속됐다.

나는 아파트 입구에 도착할 때까지 나를 졸졸 따라오는 그들을 무시했다. 어디서 개가 짖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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