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죄송한데 제가 일반인이라서요-17화 (17/175)

제17화

나는 왕에 관련된 안 좋은 기억이 있다.

아니 막 극혐하고 그런 건 아닌데, 아 좀⋯⋯ 그런 게 있다.

그건 코노 단골인 나머지 갈 때마다 사장님이 과자를 챙겨 주는 친구, 예솔이와 관련된 이야기다.

예솔이는 내가 한창 아빠 밑에서 방구석 곰팡이로 살던 시절에 만난 친구다.

중2병이 꽃피던 시절 근자감이 터져 버린 함예솔(만 14세, 빨간색 컬러 렌즈 소유자)은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풀풀 풍기며 우리 학교에 전학 왔다.

선생님 몰래 컬러 렌즈를 끼고 다니며 하얀색 신발 끈을 오른손에 칭칭 감아 붕대라고 우기던 참 웃긴 친구였지.

왼쪽 눈엔 빨간색 컬러 렌즈, 오른쪽 눈은 안대로 가린 예솔이는 반 구석에서 찌그러져 있던 내게 다가와 대뜸 외쳤다.

‘너! 왕이 될 상이로구나!’

아니 그땐 쟤가 대체 뭐다냐 했지. 뜬금없이 내가 왕이 된다고 하잖아.

나는 그때 예솔이가 하는 말을 헛소리로 치부하고 대충 넘겼는데, 예솔이는 그 뒤로도 끈질기게 따라붙어서 나보고 왕이 될 거라고 했다.

‘나 왕 아니야. 지금이 조선 시대도 아닌데 무슨 왕이야.’

‘아냐. 연희 넌 왕이 될 거야. 내가 장담할게. 서른 살 안으로 왕 된다.’

혼혈이라서 그런지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예뻤던 애였다.

예솔이는 길거리를 돌아다닐 때마다 캐스팅을 받을 정도로 예뻤고, 여섯 자릿수끼리의 곱셈을 1초 만에 계산할 정도로 똑똑했으며, 가끔 의미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나는 그런 예솔이를 보며 생각했다. 4차원인가 보다.

눈처럼 하얀 머리카락, 풀잎같이 맑은 녹색 눈.

예솔이는 하얀 머리가 너무 튄다며 옛날엔 매번 염색하고 다녔지만, 헌터들이 생긴 후로는 염색을 그만뒀다.

왜냐하면 헌터들이 생긴 후로 하얀 머리가 엄청나게 늘었기 때문이다.

헌터들의 눈 색과 머리 색은 그 사람의 특성과 한계를 알 수 있는 척도다.

눈 같은 경우에는 예를 들어 신체 강화인 나는 회색, 불인 자연드림 선생님은 적갈색, 관통 및 응집인 새벽 길마는 하늘색, 어둠 및 공간인 네가정말좋아는 진홍색, 영혼을 다루는 극야는 보라색.

머리 색 같은 경우에는 그 사람이 특성으로 한계를 보았을 때 바뀐다.

머리 색이 하얀 부산우유나 극야 같은 경우엔 지금 자기가 가진 특성이 한계까지 발전했다는 것이다.

한계까지 발전한 특성은 더는 발전하지 않고, 새 특성을 얻지 않는 이상 더 강해질 방법은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얀 머리칼의 헌터를 벽막이라고 불렀다. 벽(에)막(힘).

운수가 좋아서 한 계단 높은 새 특성을 줍지 않는 이상 그 랭크에서 발전하지 못할 사람들.

벽막들은 염색을 해도 한 번 싸우고 나면 머리색이 다시 하얀색이 된다.

그래서 보통은 염색하지 않고 그냥 하얀색으로 다니지.

자연드림 아줌마 같이 광고를 찍거나 그러면 어쩔 수 없이 염색 한 번 해야 하지만.

사람들은 다들 강해지고 싶어 하기 마련이고, 그건 각성자도 마찬가지다.

각성 이후로 발전을 거듭하다 한계를 본 헌터가 우후죽순 생겼고, 세상엔 하얀 머리인 사람들이 꽤 생겼다.

예솔이는 그때부터 염색하는 걸 그만뒀다.

염색 안 하고 다니니까 헌터인 줄 알고 부러워하는 게 그렇게 재밌다나.

나는 남들과 비교해 봤을 때, 썩 사교적인 편은 아니었다.

중학교 때 만난 예솔이는 나와 같은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나와 같은 대학교 같은 과에 입학했다.

나는 그래서 스물여섯 먹고도 친구가 예솔이 한 명밖에 없었다. 인생에 찐 친구 하나면 됐지 뭐하러 더 사귀어.

그리고 그 하나뿐인 친구는 나이 스물여섯 먹은 지금까지도 계속 왕 타령을 했다.

심지어 핑거킹 덕질을 하기로 했다며 반서준 제작 핑거킹 응원봉까지 사서 날 괴롭게 했다.

요즘 헌터 덕질만큼 핫한 덕질이 또 없는데, 그중에서 핑거킹 덕질이 제일 핫하다더라.

나는 예솔이 덕에 반서준 킬 포인트를 한 회 더 적립했다.

“전 사이비 안 믿어요.”

난 내가 살면서 왕 소리 들을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왕 적립 벌써 두 번째다.

아니다, 핑거‘킹’이랑 네정좋도 있으니까 네 번째.

아무튼 저 전국구 사이비의 마수는 내게 통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또 한 번 생각한 건 끝까지 밀고 나가는 신념의 소유자⋯⋯.

까지 생각했을 때, 극야의 멜로 눈깔이 갑자기 우수에 찼다.

살짝 긴 앞머리가 눈가로 떨어졌고, 지독하게 예쁜 얼굴이 울상을 그렸다.

아니, 진짜 신기하게 생겼네. 예솔이보다 더 예쁜 것 같아.

저렇게 생긴 사람이라면 사진 찍어다가 방 벽면에 붙여 놓고 아침마다 인사하고 싶겠다.

연예인이었으면 내 통장을 바쳐 사랑할 자신이 있는데, 유감스럽게도 사이비 종교 교주였다.

“그런 표정 짓는다고 제가 그쪽 헛소리 들어 줄 것 같아요? 그렇게 생각하셨다면 그건 절 우습게 보신 거예요. 제가 또 보육원 봉사 활동 500시간의 베테랑으로서, 울망울망한 표정에는 이미 통달이-”

“나의 왕은⋯⋯ 제 얼굴을 제일 좋아하셨는데⋯⋯.”

아래로 드리운 긴 속눈썹에 눈물이 맺혔다. 제비꽃 색 눈이 눈물 때문에 더 짙어 보였다.

붉게 물든 눈시울이 뺨 위로 눈물을 한줄기 떨어뜨렸을 때, 나는 진지하게 항복 선언을 하기로 했다.

여기 얼굴 맛집이네.

그래, 사람이 강함을 너무 숭상하면 지구 일짱한테 왕이라고 부를 수도 있지. 내가 잘못했네.

응어리진 악감정을 싹 날려 버리는 눈물이었다.

세상에는 못생긴 사람이 참 많으니까 미인은 고이 보존해야 한다. 저 유전자를 후대까지 널리 퍼뜨려 세계의 평화와 안녕을 기원해야 했다.

전 세계에 손가락테크닉 팬 다음으로 극야 팬이 많다더니, 왜 그런지 알 것 같아.

얼굴 가까이서 보니까 아주 그냥 빛이 나네. 저 정도면 얼굴로 재림 예수해도 되겠네⋯⋯.

라고 오징어1 우연희는 생각했다.

물론 저 얼굴에 맞설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냐마는, 그래도 새벽 길마랑 그 동생이랑 예솔이랑 네가제일좋아 정도면 시비는 걸어 볼 수 있지 않을까.

나머지는 몰라도 예솔이라면 세 판 중에 1승은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는 진지하게 고심하며 무릎을 꿇고 눈물을 떨구는 극야를 일으켜 세웠다.

경국지색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구나.

미인은 나라를 기울게 하고 세계 평화를 가져온다.

내가 진짜 왕이었으면 하렘 하나 세워 세계 평화를 도모했을 것이다.

나는 손등으로 눈물을 문질러 닦은 극야를 멀뚱히 올려다보다 고개를 돌렸다.

가구 그림자에 스며들어 있던 네가정말좋아가 극야의 미인계에 홀라당 넘어간 날 보며 절레절레 고개를 젓고 있었다.

야, 고맙다. 네 덕분에 나 정신 좀 차렸어. 내가 진짜 왕이었으면 널 기꺼이 신하로 뒀을 거야. 곤란하면 튀어나와서 분위기 깨라고.

축 처진 토끼 귀 하나 달아 주고 싶게 생긴 극야가 턱을 만지작거리며 고민하는 날 보며 입을 열었다.

나는 저 요망하게 생긴 놈이 이번엔 무슨 약을 팔지 긴장하며 그의 말을 기다렸다.

“당신의 왕국에 제 자리가 없을 거라는 걸 알아요.”

“그야 당연하죠. 저는 왕국 같은 거 안 세울 거니까.”

“수억 개의 별을 건너 당신을 다시 만났으니, 이번만큼은 당신을 혼자 내버려 두지 않을 거예요.”

내 인생 장르를 로맨스로 만들어 버리고 있는 극야와 대왕 토끼처럼 팝콘을 냠냠거리고 있는 네가정말좋아.

나는 모노톤 방에서 때아닌 로맨스를 찍으며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아니 세계관은 양산형 판소 맞는 것 같은데 장르를 막 바꿔 버리고 그러시네.

인간극장이던 내 인생 장르가 핑거킹 이후로 코미디가 되더니 이젠 우주로 가 버렸다.

나는 다채롭고 오묘한 장르의 신비함을 느끼며 모든 걸 놓아 버렸다.

오늘 아주 좋은 정보를 얻었군그래. 사이비는 동문서답을 잘해.

“당신만을 위한 낙원을 만들 거예요.”

극야가 수줍게 눈을 내리깔며 속삭였다. 발그레하게 물든 뺨이 꼭 사랑에 빠진 사람 같았다.

“이번에는 당신이 그런 선택을 하지 않도록.”

하얀 속눈썹 아래 자리 잡은 보랏빛 눈에 사랑보다 더 큰 절망이 비쳤다.

얼룩덜룩하게 일그러진 보랏빛, 놓지 못해 억지로 그러쥔 감정, 검게 눌어붙은 타고 남은 재, 축축하게 습기 차 곰팡내 나는 장맛비 같은, 그런 것. 그리고 그 검은 동공에 비치는 내 모습.

날 보고 있었으나 날 보지 않고 있었다. 내 얼굴 위로 다른 사람을 투영하고 있는 것만 같은 모양새였다.

수십 수백 수천 수억 가지의 검은 유리 파편 위로 다시 사랑을 닮은 분홍색 천이 덮였다.

나는 순수한 어린아이처럼 해사하게 웃는 그를 바라보며, 무심코 내 목덜미를 쓱 문질렀다.

소름 끼치는 적막이 무채색의 공간 안에 내려앉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