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화
나 우연희, 아직 창창한 스물여섯 살.
솔직히 감방 가서 콩밥 먹을 나이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헌터가 감방 가면 헌터 전용 특수 교도소에 가게 되는데, 거기 가면 지옥의 끝을 볼 수 있다고 했다.
아는 전국구 블퀴벌레가 말한 거니 아마 진실일 것이다.
사실 신규 헌터 우연이면 몰라도 손가락테크닉으로는 감방 갈 일 많이 했다.
던전 스틸은 물론이고 불법 장비 제작, 남의 단말기 파괴, 랭크나 경고 무시하고 닥돌….
심지어 특급 게이트에 몰래 출입까지 했다. 무사히 닫고 돌아오긴 했지만.
그때마다 감방 갈 뻔한 날 도와준 건 스미스 아저씨였다.
어차피 가명인 거 아니까, 맨날 아서라고 부르라고 하긴 하는데 스미스 아저씨가 입에 아주 착착 감겼다.
스미스⋯⋯ 뭔가 특수 요원 같다.
과거에 목숨을 구해 준 인연으로 여러모로 많이 도움받았고, 도움 준 사이긴 한데 폭행죄로 감방 가면 과연 도와줄까?
…아니. 그건 아닐 듯.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도 잠시, 어둠 속성 공간 특성을 가진 네가정말좋아는 이번에도 날 정체 모를 장소에 떨구고 갔다.
불리하면 어둠이나 그림자에 숨고, 잡을라치면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심지어 다른 사람을 멋대로 잡고 이동시킨다.
하지만 저 자식을 마구잡이로 공격하지 못하는 이유는 나와의 상성 때문이었다.
순수한 힘이나 전투 센스는 내 쪽이 당연히 월등하지. 잡기만 하면 줘 패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다.
하지만 공간을 자유롭게 이동하는 비상식적인 특성 자체가 문제였다.
공간 이동 하는 공간 특성 헌터를 잘못 건드리면 주옥 된다.
그랬다간 신체 어딘가를 공간의 틈에 두고 나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교통수단을 이용하는 이유는 공간 특성 헌터가 극히 드문 데다, 잘못하면 우/연/희 같은 꼴이 될 수 있으니까 그런 거고.
그래서 하위 랭크 공간 특성 헌터들은 순간 이동을 안 한다.
잘못했다가 토막 나면 큰일 나지.
한순간의 잘못된 판단, 당신의 남은 인생을 망칩니다.
나는 공익 광고 같은 멘트를 던지며 주변을 살폈다. 푹신한 카펫이 깔린 복도가 냉기로 스산했다.
네정좋 이 자식, 날 대체 어디로 데려온 거야.
블퀴벌레들이 암살 의뢰도 받았나? 조만간 문의 좀 해 봐야지.
물론 공간 특성 S급 헌터라 의뢰 안 받아 줄 소지가 다분하다.
휘이잉-
어디선가 바람 부는 소리가 들린다. 눈앞으로 창문 하나 없는 복도가 길게 이어졌다.
나는 히어로 애니메이션의 악당 소굴 같은 복도를 걸으며 데자뷰를 느꼈다.
헌터 협회 총장실도 이런 구조로 되어 있던데. 요새 윗대가리들은 하나같이 악취미가 있나.
벽면에 음각된 수많은 몬스터의 모습이 자꾸 눈에 걸렸다.
저기 있는 건 분노왕의 군단장들, 그 옆에 있는 건 시기왕의 군단장들, 여기 있는 건 나태왕의 군단장들, 그리고 계속 이어지는 군단장급 몬스터의 나열.
개중에는 모르는 얼굴도 있었고, 인간의 형태를 한 것도 있었으며, 아는 사람과 소름 끼치도록 닮은 것도 있었다.
고대 유적지나 사원에 들어오면 꼭 이런 기분일까.
불쾌한 느낌이 목덜미를 서늘하게 스쳤다.
나는 벽에 새겨진 것들을 보지 않기 위해 고개를 꼿꼿이 세웠다.
그냥 헌터 등록하고 집에 가서 엄마랑 외식이나 하러 가려고 했는데 왜 이런 일에 휘말렸는지 통 모르겠다.
휴대폰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먹통이었고, 이 불쾌한 복도를 막 걷어차 부수자니 아까 일이 생각나서 그럴 수가 없었다. 나⋯⋯ 얼어 죽을 뻔.
낙원 이 지능범 새끼들.
까딱하면 건물 날아가고 얻어맞을 것 같으니까 남극으로 보내서 아무것도 못 하게 하는 것 봐.
각국이 한 오염 금지 조약을 이렇게 쾅 깨 버리다니.
걸리면 저 사이비 놈들은 물론이고 나라까지 곤란해질 사건이다.
이래서 사이비는 안 돼. 암, 그렇고말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복도 끝에 자리한 문을 벌컥 열었다.
무려 노크조차 하지 않았다!
이는 26년간 고이 간직해 온 정중함과 예의를 모조리 하늘로 날려 버리는 행동으로, 엄마한테 들키면 등짝 스매시를 맞을 기막힌 행동이라고 할 수 있지.
나는 작게 감탄사를 흘리며 방 안을 살폈다.
훈훈한 방 안은 느껴지는 온기와 다르게 무채색으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먼지 한 톨 없는 넓은 방, 검은색과 하얀색의 단출한 배색과 최소한의 가구.
나는 내 눈 앞에 펼쳐진 방의 모습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왠지 냉장고에 에비앙이 있을 것만 같은 방이었다.
…내가 장르를 잘못 찾았나?
“어서 오세요.”
나긋나긋 녹아내릴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줄곧 소파에 앉아 있던 남자가 웃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까 눈뽕으로 내 안구를 테러했던 눈처럼 하얀 머리칼에 짙은 보라색 홍채.
부하인 네가정말좋아와는 다르게 하얗게 바랜 머리칼이 눈에 띄었다.
사이비 종교 교주답게 새삼 거룩해 보이는 얼굴이 눈부셨다.
볼 때마다 생각하는 건데, 저런 얼굴이라면 광신도가 생겨도 이상하지 않겠다.
“삼라만상의-”
“거기까지 합시다. 제가 온라인 게임을 한 게 10년 전이라서 적응이 안 되네요.”
“그런가요? 제가 아는 당신은 인사받는 걸 좋아하셨는데. 인사할 때마다 얼굴도 붉히시고, 눈도 꽉 감으시고.”
“예?”
그건 좋아하는 게 아니라 쪽팔리고 부끄러워서 그런 게 아닌지.
삼라만상의 어쩌고저쩌고 인사를 받아서 좋아할 인간이 중2병 말고 또 어디 있겠냐고. 그것도 사이비 종교 교주한테 받아서.
그리고 ‘제가 아는’ 이라니. 나는 전 세계에 하나뿐인데 또 누가 있다고 저런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네정좋 말하는 거 보면 미래를 아는 것 같은데, 미래를 안다고 저런 말을 할 수 있나? 저건 지나치게 과거형 아닌가?
여러모로 알 수 없는 인간이었다.
혼을 보고 죽은 자를 일으키는 특성을 가졌으니 어지간히 돈 게 아니겠지.
원래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공포는 죽음이라고 하지 않는가.
죽음에 그 누구보다 가까운 인간이니 720°쯤 돌아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그래요. 그러면 그렇다고 칩시다.”
모든 걸 내려놓고 또라이와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속이 한결 후련해졌다.
절대로 들어가면 안 될 길드 리스트에 낙원 못 박아야지.
하긴 사이비 길드 고려는 무슨. 사이비랑은 상종도 하지 말아야 한다.
“저는 그런 오그라드는 인사 들으려고 여기 온 게 아닙니다. 솔직히 자의로 온 것도 아니긴 한데, 온 김에 물어보고 가는 게 좋겠네요. 제가 손가락테크닉인 건 어떻게 아신 거죠?”
내 말에 극야가 눈동자를 도르륵 굴렸다. 약간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수험생 같은 표정이었다.
“이상한 질문을 하시네요. 그렇게 철저한 비밀도 아닌데. 설명 다 듣고 오신 거 맞나요?”
“철저한 비밀 맞는데요.”
“그럼 설명을 제대로 안 듣고 오신 거네요.”
극야의 고운 얼굴 위로 소름 끼치는 무표정이 일순간 스쳐 지나갔다.
동시에 방 안 가구 그림자에서 네가정말좋아의 얼굴만이 불쑥 튀어나오더니,
“죄송합니다.”
란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뭔데. 저거 뭔데.
역듀라한이야 뭐야.
“혼자만 알고 계시는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데, 널리 소문내고 다니시면 곤란하거든요. 입 다물고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왜 정체를 숨기시는 거죠? 그 이름이라면 당신을 그 누구보다 높은 자리에 앉게 해 줄 텐데요.”
“아니, 상식적으로 손가락테크닉 같은 닉네임을 쓰면서 어떻게 고개를 들고 다니겠어요. 안 그래도 망측하단 소리 듣고 사는 중인데, 이게 전 세계로 퍼지면 두 배로 망측해진다고요. 그리고 정체 밝혀지면 새벽이 미친 듯이 들이댈 거 아니에요. 저는 그 얼굴 1년에 한두 번 보고 사는 걸로 충분해요. 다 큰 성인 남성이 수줍게 어필하는 모습 같은 건 보고 싶지 않단 말입니다.”
나는 아주 진지하게, 그리고 또 빠르게 내 인생 절망 편을 말했다.
안 말한 거 하나 더 있네.
정체 까면 쟤가 나보고 영화 찍어 달라고 할지도 몰라.
다큐멘터리 후편 제작할 거니까 인터뷰해 달라고 할지도 몰라.
그리고 어떻게든 새벽에 데려오려고 애를 쓰겠지.
놀이공원은 한 달간 무료 개장을 맞이하고, 열성적 활동으로 던전 수는 감소하며, 존경하는 핑거킹 님의 존안을 뵌 나머지 감격하여 길드원을 덜 갈구겠지.
그러다 보면 새벽에 평화가 찾아오고 우리나라에 평화가 찾아오고 세상에 평화가 찾아오겠지… 아니, 이게 아닌데.
핑거프린스 정체 공개가 세계 평화까지 갔다.
나는 내 무궁무진한 상상력과 발전 가능성에 감탄하며 현실로 돌아왔다.
“창조의 왕관이 당신을 따르는 건 늘 있던 일이었죠. 이번은 정도가 심한 것 같긴 하지만요.”
“정말 사이비 아니랄까 봐 사이비같이 말씀하시네요. 저번엔 좀 멀쩡하셨던 것 같은데 시간이 흐르면서 교주 자리에 더 심취하셨나.”
“사이비가 아니에요.”
막장보다 더 막장 같은 사이비 교주가 하해와 같은 미소를 지었다.
아니, 그런 말씀을 하셔도 너무 사이비 같은데 어떻게 사이비가 아니에요.
나는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무례한 말을 얌전히 삼켰다. 이미 오늘치 무례도를 넘은 지 오래였다.
“군신께서는 이 세계가 마치 소설 같다고 생각해 본 적 없으세요?”
“있죠. 딱 양산형 판소 같잖아요. 게이트 있고, 던전 있고, 웨이브 있고, 몬스터 있고, 길드도 막 있고.”
“그런 소설에는 늘 주인공이 있길 마련이죠.”
극야의 예쁜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나는 딱 주인공처럼 생긴 그를 보며 그쪽이 주인공 아니냐고 말하려다가, 사이비 교주가 주인공인 소설은 보통 없다는 걸 깨달았다.
무슨 몰매를 맞으려고 그런 걸 써.
“누군데요?”
나는 내가 물어 놓고 바짝 긴장하며 주먹을 쥐었다.
나보고 삼라만상 어쩌고저쩌고한 걸 보니까 내가 주인공이라고 말하고 싶은 모양인데, 나도 좀 그렇게 생각하긴 했어.
힘숨찐 랭킹 1위라니. 너무 주인공 같은 포지션이잖아.
그러자 제비꽃처럼 예쁜 빛깔을 뽐내는 극야의 눈에 아련함이 가득 담겼다.
나는 알 수 없는 감정이 뒤섞인 그 시선에 질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아니 시바 현실에서 멜로 눈깔을 장착하시면 어떻게 해요.
제 인생 장르는 로맨스가 아니라 코미디란 말입니다.
“수억 개의 별을 건너 당신을 다시 뵙습니다, 나의 왕.”
한쪽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린 그가 내 인생에 존재할 수 없는 말을 꺼냈다.
아까처럼 가구 그림자에서 불쑥 튀어나온 네가정말좋아가 [사랑해요☆손가락테크닉]이 적힌 현수막을 흔들고 다시 사라졌다.
이 새끼들은 정체가 대체 뭐지. 나는 무심코 그런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