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고시왕 우연희의 황금빛 인생! 과연 개막하는가?!
“선물이 과하신 것 같습니다.”
…는 과한 기대였던 모양이다. 줄곧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엄마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선물이 과하다고? 아니야. 안 과해!
엄마 나 태아 때부터 서울 킹물주가 꿈이었어! 그러지 마!
나는 창백해진 얼굴로 허둥지둥 말을 삼켰다.
이 여사님이 왜 여기서 초를 치는지 내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제 동생의 목숨 값입니다. 더 큰 걸 해 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부담스러워하실 것 같아 가장 작은 것으로 준비했습니다. 그러지 말고 받아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러자 어른의 포오쓰를 풀풀 풍기는 자연드림 선생님이 여유 넘치는 얼굴로 받아쳤다.
예, 선생님. 바로 그겁니다.
저는 선생님이 꼰대처럼 절 두들겨 팰 때부터 알아봤습니다. 선생님의 넓은 배포와 아량을요.
여유로운 자연드림 선생님, 그리고 그 동생분과 다르게 엄마의 표정은 아주 진중하고 심각했다.
나는 나도 성인이니 건물 받는 건 엄마가 결정할 문제는 아니지 않냐고 말하려다가 말았다.
몹시 불초자식 같은 발언이었어.
“TV에 나온 뉴스를 보았습니다. 연희가 추정 S급 헌터로 각성했다고요. 사헌이라면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의 최고 길드 중 하나인데, 그런 곳의 길드장께서 한낱 카페에 괜한 일로 들리신 건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분명 길드 가입 제의를 위해 직접 오신 것이겠지요.”
엄마가 중대한 자리에서만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엄마의 말투에 어색해하며 눈동자를 굴렸다.
엄마의 말 뒤로 사헌 길마의 말이 이어졌다.
“네. 저는 빚을 갚기 위해 온 게 맞지만, 따님을 영입하러 온 것도 맞습니다. B급 이상의 고랭크 헌터는 흔한 게 아니지요. S급이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럼 더더욱 이 건물을 받을 수 없겠군요. 지금 건물을 받게 된다면 연희는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사헌 길드에 들어가야 할 테니까요.”
소싯적에 얼음 여왕으로 유명했던 엄마의 날카로움이 빛을 발했다.
한 해에 열다섯 명한테 고백 받고 그 열두 명을 싹 다 차 버린 ○○대의 전설! 서 여사님 되시겠습니다!
하지만 얼음 여왕 서 여사님과 내 건물은 별개의 문제였다.
엄마는 저 관우 아줌마가 흑심이 있어 저걸 주려는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지만, 그건 절대로 아닐 터다.
물론 그런 생각이 아예 없진 않겠지.
가진 거 전혀 없는 일반인이 건물을 덥석 받게 된다면 사헌 길드에 초점을 맞추게 되거나, 사헌 길드에 들어가겠다고 마음먹는 게 보통이니까.
하지만 내가 또 누구던가.
손가락테크닉이었다.
서초동 관우를 5년간 본 손가락테크닉. 5년간 버릇없다고 까인 손가락테크닉.
아마 저 관우 아줌마는 순수한 의도로 내게 이 건물을 주겠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런 방면에서는 참 순수하고 깔끔한 사람이니까.
그리고 저 아줌마가 갑자기 이 건물을 살 이유가 뭐 있어.
날 주려고 산 거지.
그렇지만 이 건물을 줌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득에 관한 것은 당연히 계산했을 거다.
내가 사헌 길드에 들어갈 확률이 높아진다는 계산.
이 자리에서 나만이 모든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냉랭한 분위기를 깰 수 있는 것도 오직 나뿐이다.
그래서 나는 아주 진지한 얼굴로, 또 아주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건물 완전 좋아해요. 제가 26년 전부터 꿈이 건물주 되기였습니다.”
얼어붙은 분위기가 눈 녹듯이 풀렸다.
내 앞의 두 자매는 빵 터져서 육성으로 웃고 있었고, 엄마는 환장하겠다는 표정으로 내 등짝을 마구 내리쳤다.
아! 아파! 엄마 쫌!
“죄송합니다. 저희 애가 공부만 하다 보니 철이 없어서⋯⋯.”
“괜찮습니다. 꿈이 참 소박하고 귀엽네요.”
킹물주가 소박하다니. 사헌 길드장 화룡 자연드림, 충격 발언.
조물주 위에 건물주가 있다는 게 정론 아닙니까. 그런데 건물주가 되겠다는 내 꿈을 비웃다니.
이래서 가진 사람들은 바닥을 몰라! 조만간 사헌 길드 던전을 털러 가겠습니다. 두고 봅시다.
“그런 의도는 아니었으니 부디 받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연희 양을 스카우트하고 싶다는 마음이 없는 건 아니지만, 연희 양에게 부담을 주려고 드리는 건 아닙니다. 저는 연희 양의 의사를 존중합니다. 연희 양은 제 동생의 은인이고, 그러면 또 제 은인이기도 하니까요.”
우아하게 커피잔을 내려놓은 서초동의 관우가 내게 몰래 윙크했다.
아무리 봐도 건물을 주겠다는 의사 표시인 것 같았다. 사랑해요, 자연드림! 사랑해요, 사헌!
“보는 눈이 많으니 이야기는 여기서 끝내도록 할까요? 연희 양에게는 조만간 정식으로 초대장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제 동생을 구해 주신 것을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나는 아줌마를 보며 흐뭇하게 웃다가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들었다.
건너편 가게에 들어가 짬뽕을 시킨 초코우유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게다가 맞은편에 앉은 건 아까 박 터지게 싸우던 백천 길드 SNS 담당.
복잡하게 돌아가는 일련의 상황에 엄마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내게 몰래 윙크하는 아주머니에게 맞윙크를 해 주었다.
한쪽 눈이 아니라 두 쪽 눈을 깜빡인 것 같지만, 윙크인 건 알아보셨겠지.
윙크를 참 잘하는 자매여서 그런가 윙크를 못 하는 내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나 그래도 프로듀스 보면서 윙크 연습 열심히 했는데.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한 그녀가 동생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고개를 마주 숙여 인사하며 그들을 배웅했다.
법이랑 세금이랑 어쩌고저쩌고는 저쪽에서 다 알아서 처리하겠다고 했으니 킹물주의 꿈은 이미 이뤄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런 음악 없이 싸늘한 카페 안, 반대편 건물의 중국집을 배경으로 둔 엄마가 매서운 눈초리로 날 흘겼다.
나는 바짝 긴장하며 엄마한테 하려고 준비해 두었던 변명을 이것저것 떠올렸다.
아, 그러니까 엄마. 내가 있지⋯⋯.
그러나 그 변명을 쓸 타이밍은 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엄마가 기어코 눈물을 보이고 말았기 때문이다.
* * *
그렇게 대단한 가정사가 있는 건 아니다.
지금은 아빠가 없지만, 나는 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아빠가 있었다.
예뻤지만 집이 가난했던 엄마는 선생 집안에 대기업을 다니던 아빠랑 중매 결혼했다.
술버릇이 남을 폭행하는 것이었던 아빠는 얼마 안 가 회사 상사를 폭행했고, 그대로 회사에서 잘렸다.
합의금이 한두 푼이 아니었다고 했다.
당연한 수순으로 아빠는 빚을 갚기 위해 외국에 나가 일했다. 엄마도 아기인 날 키우기 위해 회사에 취직했다.
그러다가 그 방면으로 재능을 보여 회사를 차렸고, 회사는 운 좋게 제법 커지게 되었다.
외국에 나가 빚을 갚고 온 아빠는 바쁜 엄마 대신 집에서 날 보살폈다.
빨간 줄도 이미 그어졌고, 술만 먹으면 개가 되니 달리 취직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어릴 때 집에서 술만 퍼마시던 아빠의 손에서 컸다.
가장 많이 먹었던 음식은 라면이었고, 덕분에 아토피를 달고 살았다.
성격은 소극적이고 내성적이었고, 울지 않는 아이로 자랐다.
그래도 되돌아보면 아빠는 참 선비 같은 사람이었다.
공부하는 걸 좋아해 좋은 대학교에 갔고, 많이 배운 만큼 교양도 있었으며, 품성도 유약하고 고왔다.
요리를 잘하진 못했지만, 라면이라도 끓여 주려고 노력했고, 가끔은 볶음밥을 해 줬다.
엄마한테 꼬박꼬박 타서 쓰는 용돈을 쪼개 내 옷이나 장난감을 사 주기도 했다.
술 처먹고 개가 돼도 나를 때리진 않았다. 남을 때려서 그렇지.
시간이 흘러 엄마의 사업은 안정세를 되찾았다.
엄마는 그제야 가정을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아빠는 그때도 열심히 술 퍼먹고 개가 되는 중이었고, 나는 방구석의 곰팡이가 된 상태였다.
엄마는 손쓰지 못한 상황에 기겁하며 뒤늦게 이혼을 결심했다.
빠져나가는 합의금이랑 보석금도 한두 푼이 아니었고, 무엇보다 내 상태가 문제였다.
엄마는 나를 위해 돈을 벌었고, 나를 위해 살아왔다.
아빠가 그런 사람인 걸 알면서도 아빠와 이혼하지 않은 건 내가 아빠 없는 애 소리를 들으며 자라지 않길 원해서였고, 아빠를 가만히 내버려 뒀던 것도 나와 엄마만큼은 때리지 않아서였다.
날 돌보기로 결심한 이후, 엄마는 회사를 정리했다.
엄마는 나와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라고 말했지만,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아빠가 거금을 요구하며 그래야만 이혼을 해 주겠다 말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 선비는 무슨.
나는 그 일 이후로 아빠에 대한 정을 싹 갖다 버렸다.
아빠와 헤어진 뒤로 엄마는 회사를 정리하고 나와 작은 카페를 차렸다.
막 고등학생이 된 나는 엄마를 기쁘게 해 주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
그렇게 피 터지게 공부해서 내로라하는 대학에 합격했다.
하지만 기쁨은 잠시, 얼마 안 가 게이트가 열렸다. 그건 내 인생 최고의 악몽이었다.
전쟁 중에는 못 볼 꼴을 많이 봤던 것 같다.
전쟁 당시, 나는 서로의 생사도 모른 채 엄마와 1년이 넘게 떨어져 있다 다시 만났다.
그때 엄마는 비쩍 마른 몸으로 탈수 증세가 올 때까지 펑펑 울었다.
엄마는 늘 내 방패였고, 버팀목이었다.
내 앞에서는 언제나 강한 모습만 보여 왔던 엄마가 우는 모습은 내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렇구나. 억장이 무너진다는 것은 이런 감각이었던가.
나는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인 채로 엄마를 꽉 끌어안았다.
날 이토록 걱정하는 엄마를 앞에 두고, 각성자가 되었고 목숨을 걸고 전쟁터를 누볐으며,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는 말은 좀처럼 할 수가 없었다.
“엄마⋯⋯ 울어?”
엄마는 기본적으로 울지 않는 사람이었다.
내가 울지 않듯이, 엄마도 울지 않았다.
나는 살면서 엄마가 우는 모습을 단 세 번 봤다.
엄마가 방구석에서 썩어 가던 나를 보았던 그날과 우리가 다시 만났던 그날, 그리고 오늘.
나는 펑펑 우는 엄마를 끌어안고 어깨를 토닥거렸다.
건너편에서 줄곧 이쪽을 바라보던 두 헌터가 심각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게 보였다.
나는 두 헌터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입도 벙긋거렸다. 뭘 봐, 이 새끼들아.
“너무 걱정하지 마, 엄마. 나 이제 어른이잖아. 밥도 엄청 많이 먹잖아. 예전처럼 편식도 안 하고.”
“편식, 은 하잖아, 너. 맨날 고기만 먹으면서.”
“그건 고기가 맛있어서 그래. 그러는 엄마도 맨날 고기반찬 해 주잖아.”
안 해 주면 모르는데 맨날 해 주면서 그런다. 나는 엄마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말을 이었다.
“각성한 걸 마음대로 무를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나는 랭크가 높아서 이대로 신상 정보가 퍼져 버리면 큰일 날 거야. 차라리 길드에 들어가서 정보 차단을 요구하는 게 맞아. 아니면 엄마도 위험해질 수 있어.”
아니면 손가락테크닉같이 완전 세서 다 파괴하고 다니는 파괴신이 되든가.
그렇지만 지금 여기서 손테인 걸 밝히면 더 에바쎄바참치가 될 수 있다.
나는 아직 손테인 걸 밝힐 마음의 준비가 안 됐어.
지금 손테인 걸 밝혔다간 새친놈 새끼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새벽이든 일연이든 백천이든 사헌이든 낙원이든 어디든 들어가야 했다.
다른 곳은 안 된다. 저 다섯 곳 중 하나에 들어가야 했다.
“사헌은 마음에 안 들어? 거기 되게 끈끈한 길드로 소문나 있는데.”
“거긴 에베레스트 등반 갔다가 뉴스에 나오고 그러잖아. 연희 너 운동도 싫어하면서 에베레스트 등반에 끌려가면 어떡해.”
아. 그 일.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다섯 달 전 화제가 되었던 뉴스를 떠올려 보았다.
사헌 길드의 등산 동호회는 회장의 화끈함만큼 화끈하기로 유명한데, 하드함을 추구하다가 결국 에베레스트로 갔다.
그런데 거기서 마침 던전이 열린 거다.
그래서 사헌 길드 등산 동호회 회원님들은 에베레스트 간 김에 등정도 하고 던전도 파괴하고 왔다.
하도 웃긴 일이라 뉴스에서 한참을 떠들어 대던 사건이었지.
“그럼 사헌 길드는 보류하는 거로 하자. 당장 길드에 들어가야 하는 것도 아니니까. 정식 헌터로 활동할 거면 협회에 등록도 해야 하고.”
나는 티슈를 몇 장 뽑아 엄마에게 건네며 말했다.
맞은편 중국집의 두 인간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