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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한데 제가 일반인이라서요-11화 (11/175)

제11화

넋 놓고 있다가 이대로 망할 수는 없다. 나는 정신을 번쩍 차리곤 잽싸게 답장을 보냈다.

왜? 먼일 있어? ◀

▶ 사헌 길드 길드장이라는 분이 널 보겠다고 오셔서. 올 때 깔끔하게 입고 와. 평소처럼 꼬질꼬질하게 입고 오지 말고.

꼬질꼬질이라니. 내가 그렇게 꼬질꼬질하게 입고 다녔나.

아닌데. 내가 맨날 비슷한 옷을 입어서 그렇지, 나 그래도 깔끔하게 입고 다니는데.

아니면 머리를 매일매일 안 감는다고 면박을 주는 건가.

맨날 나가는 것도 아닌데 이틀에 한 번 감을 수도 있지.

내 방도 돼지우리인 게 아니라 다 나름의 규칙으로 정리된 거라고.

나는 치미는 억울함에 입술을 비죽 내밀며 머리를 감았다.

고시생의 길을 택한 이후로 단발을 고집하고 있는데, 머리 길 때랑 비교해서 얼마나 편한지 말로 다 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샴푸를 덜 써서 두 배로 좋지.

엄마가 깔끔하게 입고 오라고 한 데다 엄청난 사람도 온다니까 오늘은 진짜 멋있게 입고 가야겠다. 재작년에 산 정장 입어야지.

나는 머리를 탈탈 털어 말린 후 고데기를 잡았다.

대학교 졸업 이후로 단 한 번도 잡아 본 적 없는 고데기였다.

머리 세팅을 다 한 후에는 무려 색깔 있는 립밤도 발랐다.

역시 대학교 졸업 이후로 단 한 번도 발라 본 적 없는 거였다.

긴 앞머리는 핀으로 찌르고, 옷도 빈틈없이 점검했다.

여기에 사원증만 있으면 딱 회사원으로 보일 것 같았다. 사원증이 없는 게 문제지만.

엄마가 공채 통과하면 입으라고 사 준 옷인데 여기서 입게 되네⋯⋯. 양심이 푹푹 찔렸다.

그, 그래도 나 올해 1차 합격했으니까 괜찮아. 아마도.

1차 합격은 작년에도 했고, 재작년에도 했다. 이쯤 되면 괜찮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이미 2년을 버린 이상 내 길은 정해져 있었다.

진심으로 한 공부는 아니었지만 이대로 살기 위해서는 진심이 되어야만 했고, 우리 엄마 속 터지기 전에 나 탈백수 하는 모습은 꼭 보여 드려야 했다.

사실 내가 헌터고 그 손가락테크닉이라는 걸 밝히면 모든 게 해결되는 문제긴 했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었다.

그게 말처럼 쉬웠으면 내가 지금 이러고 있겠어?

나는 특급 게이트에서 딱 한 번 본 나태왕보다 우리 엄마가 더 무서웠다.

나태왕 뿔에 들이받히는 것보다 엄마의 등짝 스매시가 더 아팠다.

그러니까 어쩔 수 없지. 슬퍼도 이렇게 사는 수밖에.

초특급 슈퍼 헌터의 삶도 괜찮지만 행정 고시 입법 고시 2관왕의 삶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물론 가능하다면 말이지.

나는 정장에 맞지 않는 운동화를 구겨 신고 아파트 밖으로 나왔다.

신체 발달이 특히 두드러지는 신체 강화형 헌터의 시야에 퍽 익숙한 얼굴들이 잡혔다.

저기 풀숲에 은밀하게 숨은 사람은 일연 길드 유튜브 담당이잖아?

저기 아파트 옥상에서 옥신각신하는 사람들은 백천 길드의 SNS 담당이랑 새벽의 초코우유고.

세상에, 저쪽엔 낙원의 네가정말좋아도 있네.

다른 사람들은 홍보 담당이라 그렇다 쳐도, 네가정말좋아는 여기 왜 왔는지 모르겠다.

S급 헌터에 우리나라 4위인데 할 일도 없으신가?

바스락-

풀숲에서 뿅 튀어나온 네정좋이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찌릿하게 꽂히는 시선이 부담스럽다.

손가락테크닉이면 몰라도 우연희와는 맞지 않는 사람들이 몰려왔다.

나는 토할 것 같은 속을 달래기 위해 편의점에 들러 소화제를 하나 샀다.

카프리 썬도 하나 사고 싶었는데 눈치 보여서 살 수가 없었다.

카프리 썬 하나 산다고 내가 손테라고 생각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세상엔 혹시 모를 일로 벌어지는 사고가 참 많은 것 같다. 다음부터 주의하는 게 신상에 좋을 것 같았다.

그나저나 저 사람들은 언제까지 날 미행할 생각이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미행할 이유가 없는데 미행하고 있는 게 이상했다.

특히 허례허식을 버리고 속전속결을 외치는 새벽마저 저럴 줄이야. 대체 뭐지?

설마 4위인 네가정말좋아가 있기 때문인가?

아니, 그 네가정말좋아 마저 날 미행하고 있는 마당에 4위는 무슨.

분명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다른 무언가가.

나는 엄마 카페로 가기 위해 골목 안으로 들어섰다.

시내 골목 안에 위치한 엄마 카페는 역 앞 프랜차이즈 카페만큼 사람이 많진 않아도, 손님이 늘 몇 명은 있는 편이었다.

다 우리 엄마 제과 제빵 솜씨가 예사롭지 않은 덕이다. 꿈X 파티시엘 출연해도 될 정도지. 암, 그렇고말고.

엄마 카페의 유리창 너머로 정장을 단정히 차려입은 중년 여성이 보였다.

생활 근육과 전투 근육으로 다부지게 다져진 몸은 정장의 핏을 살렸고, 말끔하게 빗어 넘긴 갈색 단발은 요새 패피보다 더 세련돼 보였다.

하이고, 저 아줌마 저번에 봤을 땐 흰머리더니. 언제 또 염색하셨대?

팔목에 채운 게르마늄 건강 팔찌랑 던전 신물질 건강 팔찌가 없었으면 꼼짝없이 멋있는 중년 사업가 정도로 착각했을 듯.

하지만 저분은 중년 사업가가 아니지.

아니 중년 사업가는 맞는데, 고작 중년 사업가로 부를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CLOSE] 팻말이 걸린 카페 문을 조심히 열고 들어가자 문에 매달린 종이 짤랑거리는 소리가 났다.

금방이라도 말을 붙일 듯 날 따라오던 헌터 4대 천왕은 이제 보이지도 않았다.

다들 저 포스에 쫄아서 사라진 게 분명하다.

“어머.”

카페 문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그녀가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는 하늘같은 회장님 보는 신입사원처럼 쭈뼛쭈뼛 안으로 들어섰다.

손가락테크닉으로 몇 번 뵀는데 우연희로는 처음 뵙네요.

손테일 때는 누구든 무시하면 됐는데 신상을 다 까고 나오니까 그럴 수도 없고.

저 정말로 부담스럽습니다.

“아가씨! 우리 구면이지?”

그녀의 옆에 앉아 커피를 홀짝이던 아주머니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나는 아주머니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곤 그녀들의 맞은편에 앉은 엄마 옆에 슬쩍 엉덩이를 붙였다.

엄마 화났나 보다. 얌전히 있어야지.

“아가씨가 제 동생의 목숨을 구해 줬다는 그 헌터인가요? 어제 합정역에서 각성했다는?”

커피 잔을 든 자연드림이 커피 잔 안에 든 녹즙을 마시며 우아하게 웃었다.

이분이 갑자기 왜 이러시지. 제가 아는 선생님의 이미지랑 많이 다르신데요.

“네. 그렇습니다.”

사헌 길드의 화룡 자연드림이 그 누구보다 불같은 성격이라는 걸 모르는 헌터는 없었다.

그녀는 불의를 보면 언제나 그 누구보다 먼저 나섰고, 전장에 서면 그 누구보다 앞에 섰다.

그래서 그녀의 길드원들은 낙원 길드의 광신도들과는 다른 의미로 그녀를 광신도처럼 따랐다.

굳게 신뢰하는 길드원에게 뒤를 맡기고 무쌍을 찍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용맹한 장수와도 같아서, 그녀는 서초동 관우라는 별명을 얻었다.

나이를 얼추 먹은 중년의 각성자는 팔팔한 젊은이들이 뛰어다니는 헌터계에 발 디디기 쉽지 않다.

우리나라 길드의 정점인 새벽 길드만 봐도 40세가 넘는 길드원은 단둘뿐이고, 특이점인 낙원을 제외한 다른 오대 길드에도 40대 이상인 길드원은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힌다.

반면에 그녀의 길드인 사헌 길드에는 40대 이상의 중년 헌터가 많았다.

노장인 그들은 헌터로 일해야 하는 이유도 있었고, 헌터가 되어 지킬 것도 있었고, 다시 일하고 싶고, 또 꿈을 이루고 싶다는 의지도 있었다.

하지만 세상은 그들을 받아 주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그 상황에서 그런 그들을 받아 준 이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그녀였다. 서초동 모 아파트 부녀회장으로 이름 높던 자연드림.

그녀는 여러모로 노련한 중년 헌터들을 데리고 길드의 기반을 다졌고, 길드원과의 단단한 신뢰로 폭풍같이 성장했다.

어스름한 황혼을 나타내는 사헌 길드의 문장은 사헌 길드원 그 자체였고, 또 그녀 자체였다.

“제가 아가씨에게 정말로 큰 빚을 졌네요. 제 동생의 목숨을 구해 줘서 고마워요. 은인인 아가씨의 얼굴을 꼭 한번 보고 싶었어요.”

서초동의 용맹한 관우가 우아한 철면피를 깔고 웃었다.

그, 제가 손가락테크닉일 때는 초면에 어디서 가면을 쓰고 반말 찍찍 갈기냐고 꼰대질을 하지 않으셨는지.

이런 모습 굉장히 의외네요⋯⋯.

“그, 저도 뵐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감사 인사는 괜찮습니다. 해야 할 도리를 한 것뿐입니다.”

그래서 그런가 지나치게 격식을 차린 말이 나왔다.

예전에 한창 전쟁하던 시절에 저 아줌마랑 같이 싸울 일이 있었는데, 그때 피아 식별 안 하고 공격한다고 열심히 처맞은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로봇같이 뻣뻣하게 굳은 나 자신을 통제하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어른이, 그것도 엄마와 같은 연배의 어른이 때리니까 공격을 할 수도 없고, 살짝 밀어낸다고 밀었다가 죽거나 다치면 큰일 나고.

아무런 반격도 못 하고 얻어맞던 과거의 공포가 다시금 엄습했다.

“착한 아가씨네요. 아가씨 추정 등급이 S라더니, 이렇게 착해서 복 받은 건가 봐.”

쓰디쓴 녹즙을 꿀물처럼 호로록 마신 그녀가 입술을 위로 끌어 올리며 웃었다.

나는 회장님을 뵙는 신입 사원처럼 바짝 굳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 논리에 따르면 제가 또 세상에서 제일 착하죠. 왜냐하면 제가 지구에서 제일 강하거든요.

“빚을 졌으니 빚을 갚는 게 도리겠죠. 아가씨에게 어떤 보답을 해야 할지 꽤 오래 고민했답니다.”

인벤토리 역할을 하는 그녀의 반지가 살짝 달아오르더니 허공에서 서류 봉투가 쑥 하고 나왔다.

나는 그녀가 건넨 봉투를 받아 봉투 안의 서류를 꺼냈다. 건물 증여 계약서?

“이 건물을 아가씨에게 드릴게요. 아가씨를 사헌에 영입하기 위해 주는 게 아니라 어제 일의 보답이니까 그 점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사헌 길드 영입 제의는 계약서 작성 이후에 하도록 할까요?”

알 굵은 반지를 주렁주렁 낀 그녀가 손깍지를 끼며 말했다.

나는 예상도 못 한 결과에 입을 떡 벌리곤 멍청하게 눈을 깜빡였다.

아니, 선생님. 이게 대체 뭔가요?

고시 2관왕 장원 급제를 노리던 고시생 일대기인 내 인생 장르, 서울에 건물 있는 킹물주 일대기로 바뀌는가?

그야말로 놀랄 노 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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