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죄송한데 제가 일반인이라서요-10화 (10/175)

제10화

뭔가 잘못된 게 틀림없어. 오늘 만우절인 건 아니겠지.

나는 이불 안에서 침착하게 꾸물거리며 캘린더 앱을 켰다. 4월 22일.

만우절은 진작에 지났다. 그럼 아까 본 그 기사는 리얼리 진짜 기사라는 소린데.

부정맥 생긴 것처럼 심장이 쿵쿵 뛰었다. 이 정도면 심장으로 발전기 돌려도 될 것 같았다.

심장박동으로 발전기 돌리면 기네스북에 오르려나. 아니지, 이그노벨상 같은 거나 받겠지.

[합정역 웨이브에서 S급 각성자(추정) 등장. 새벽 길드 소속 헌터, “가루다 군단을 잿더미로 만들려면 최소 S-급.”]

[사헌 길드장 화룡 자연드림, “새로 등장한 S급 헌터에게 큰 은혜를 입어.”⋯⋯ 새 S급 헌터 우선 영입 선포.]

[합정역 B+급 웨이브, 사망자 188명에 부상자 297명. 게이트 전문가 이○○, “잘못된 게이트 측정기의 문제.”]

[새벽 길드장 저격수 새벽, “이번에도 S급 헌터를 데려가는 건 새벽 길드가 될 것.”]

[대한민국, 드디어 S-급 이상 10명 보유국이 되는가?⋯⋯ 새 S급 헌터 등장에 온 나라가 ‘들썩’.]

[낙원 길드장 극야, “새 S급 헌터는 이 세계에 새로운 지평을 열 것이다.”⋯⋯ 직접 영입 나서.]

[헌터 전문가 김○○, “이정도 화력이면 S-급이 아니라 S+급.” 새 S+급 헌터 등장 예고?]

뭐여, 이 이상한 기사들은. 사헌? 새벽? 심지어 낙원?

지금 고작 열두 시밖에 안 됐는데 다들 언제 인터뷰를 한 건지 모르겠다. 아니다. 열두 시나 된 건가.

나는 침대에 누워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방문을 벌컥 열고 나와 주방으로 가니 엄마가 냉장고에 붙여 놓은 메모가 보였다.

[엄마 먼저 나가니까 밥 챙겨 먹고 공부해. 밖에 나갈 생각은 하지도 말고.]

미역국 냄새가 나는데? 미역국 끓여 놓고 나갔나.

나는 보온 설정 된 밥통 코드를 뽑고 밥을 대충 펐다.

국그릇에 국도 대충 담았다. 김치 꺼내 오면 좋겠는데 귀찮아서 김치를 꺼내 올 의지도 없었다. 그냥 먹어야지.

미역국에 만 밥을 먹고 있자니 정신이 얼추 돌아오는 것 같았다.

미역국을 먹으면서 깍두기를 안 챙겨 오다니. 귀찮다고 깍두기를 패스해 버리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몽롱한 정신이 만들어 낸 결과는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신기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냉장고 문을 열고 깍두기 통을 꺼냈다.

젓가락은 설거지 늘어나니까 숟가락으로 퍼먹겠다.

엄마한테 들키면 혼날 테지만 지금은 엄마 없으니까 괜찮아.

윗집 화장실 공사하는 소리가 울리는 집 안에 깍두기 씹는 소리가 추가됐다.

저놈의 화장실 공사는 대체 언제 끝나는 거야?

일주일 전에 끝낸다면서 이번 주 내내 공사를 하네. 사람이 염치가 없지, 어떻게 사과 한 번을 안 하냐.

밤마다 쾅쾅 뛰어 대던 어린이가 이사 가니 이번엔 공사 빌런이 등장했다.

지긋지긋한 층간 소음, 대체 언제 끝날 것인가?

나는 미역국 국물을 후루룩 마시며 다시 휴대폰을 집었다.

기사 댓글 반응이 무서워 기사 누를 용기는 안 났고, 기사 제목만 계속 훑고 있었다.

[사헌 길드장 화룡 자연드림, “새로 등장한 S급 헌터에게 큰 은혜를 입어.”⋯⋯ 새 S급 헌터 우선 영입 선포.]

사헌이면 어제 그 아주머니의 언니 되는 아줌마가 길드장인 곳이다.

잘 말씀해 주신다더니, 정말로 잘 말씀해 주셨구나.

왠지 기사 제목부터 자연드림 아줌마의 포스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새벽 길드장 저격수 새벽, “이번에도 S급 헌터를 데려가는 건 새벽 길드가 될 것.”]

새벽은 늘 똑같다.

B급 이상의 고랭크 헌터가 신인으로 등장하면 그 누구보다 빠르게 접근해 도장을 쾅 찍는다.

저희는 B급 이상 헌터들만 있는 스페셜한 길드입니다.

게다가 조만간 손가락테크닉을 영입할 예정입니다.

그러니까 저희 길드로 오시는 게 좋을 겁니다.

성장, 지원, 특혜, 그리고 연봉까지 최고로만 준비해 드립니다.

예전에 길드가 크지 않았을 때는 다른 길드의 고랭크 헌터를 얍삽하게 쏙쏙 뽑아 오는 짓을 하더니만, 요즘에는 정책을 바꿨는지 고랭크 신인만 쏙쏙 뽑아 간다.

초기 랭크가 B급 이상이라는 건 A급이나 S급으로의 성장을 기대해 봐도 좋다는 뜻이므로, 향후를 보는 투자 계획인 듯싶었다.

새친놈 의외로 수완 있다니까.

[낙원 길드장 극야, “새 S급 헌터는 이 세계에 새로운 지평을 열 것이다.”⋯⋯ 직접 영입 나서.]

그리고 낙원⋯⋯ 은, 음⋯⋯.

나는 낙원 기사 제목부터 느껴지는 강렬한 사이비의 기운에 질색했다.

낙원은 새벽과 1위를 다투는 초대형 길드였지만, 사실 그 근간은 사이비 종교다.

왜, 게이트가 열린 날 내가 봤던 기사 있지 않은가.

‘모 사이비 종교 단체의 교주 이 모 씨, 모월 모일에 새로운 시공이 열리고 다른 차원과의 통로가 열리며 그로부터 나온 생명체로 지구가 멸망할 것이라 예언해⋯⋯.’

그 모 사이비 종교가 바로 낙원이었다.

당시에는 낙원교라고 새파랗게 젊은 교주인 이예단을 믿는 신흥 사이비 종교였는데, 지금은 사이비 종교 수준을 넘어 우리나라 헌터 산업의 한 축이 되었다.

길드 이름이 낙원인 이유도 낙원교로부터 길드 이름을 따서 그렇고⋯⋯.

낙원 길드의 길드장 극야는 낙원교의 교주 이예단의 헌터 닉네임이다.

낙원교의 이상향이 뭐라고 했더라. 끝없는 밤? 그래서 극야라고 지었다는 인터뷰를 봤던 것 같다.

처음에는 이거 순 미친놈들 아냐? 하고 생각했는데 몇 년 지나니까 생각이 좀 달라졌다.

저건 생각보다 더 신기 있는 미친놈이었다.

낙원 길드는 사이비 종교로부터 나온 길드인 만큼 지극히 폐쇄적이었다.

낙원에 들어간 사람은 있어도 낙원에서 나온 사람은 없다.

이예단으로부터 제의를 받아 낙원에 들어간 이들은 모두 이예단의 충실한 개로 낙원에 남았다.

암암리에 도는 소문에 따르면, 나가려는 놈들을 모두 총살했다던데. 아니면 말고.

저격수 반서준이 이끄는 새벽 길드는 자신들을 A급 이상의 고랭크 헌터만 있는 소수 정예 길드라고 말했지만, 사실 진정한 소수 정예는 낙원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낙원 길드는 이예단이 고른 사람만 들어갈 수 있고, 그 수는 지극히 적으니까.

낙원의 이예단은 알 수 없는 기준으로 길드원을 뽑았다.

개중에는 S나 A가 아닌 B나 C도 있었고, 간혹 D나 E, 심지어 F도 있었다.

그렇지만 낙원 길드에 들어간 이들은 거의 다 고랭크 헌터가 됐다.

특히 F급에서 S급 헌터가 된 낙원의 ‘네가정말좋아’는 전 세계에서 회자되는 일종의 신화였다.

낙원에 들어가면 고랭크 헌터가 아니라도 특별한 능력을 얻는다.

물질계 강철 속성의 어떤 헌터는 낙원에 들어가 특수 장비 제작 능력을 얻었고, 방출계 빛 속성의 어떤 헌터는 낙원에 들어가 치유 능력을 발현했다.

그래서 낙원 길드는 여러모로 말이 많은 길드였다.

사이비 종교 기반의 길드, 신기가 있는지 미래를 아는 길드장, 그리고 그 길드장이 뽑은 긁지 않은 복권 길드원들.

낙원 길드 내부 일에 대해 일절 발설하지 않는 그 길드 길드원들은 길드장 얘기만 나왔다 하면 찬양을 했다.

그분은 진정 미래를 아신다는 둥, 자기는 그분께 구원받았다는 둥, 지금 빨리 낙원을 믿어야 나중에 일어날 대멸망에서 목숨을 건진다는 둥, 거긴 온갖 광신도들의 성지였다.

오, 대단해라.

극야 걘 생긴 건 멀쩡하다던데 왜 저렇게 사는 거야.

우리나라 헌터계의 또라이 쌍두마차, 새친놈과 극친놈이 점찍은 새 S급(추정) 헌터.

저 S급 헌터의 길은 정해져 있었다.

새벽에 들어가거나, 낙원에 들어가거나, 아니면 저 두 길드의 압박을 막아 줄 나머지 세 길드에 들어가거나.

지옥 같은 인생의 파노라마가 눈앞에 펼쳐졌다.

나는 전투적으로 깍두기를 씹으며 지옥에서 탈출할 방법을 고민했다.

몬스터랑 1 : 100할 자신은 있는데 저놈들이랑 1 : 100할 자신은 없었다.

국물까지 다 마셔 말끔하게 빈 국그릇 위에 쇠 수저가 댕그랑 놓였다.

나는 싱크대에 그릇과 수저를 집어넣은 후 냉장고에 깍두기 통을 넣었다.

마침 문자가 왔는지 휴대폰에서 띵똥 소리가 울렸다.

▶ 엄마랑 얘기 좀 하자. 카페로 와.

엄마⋯⋯. 왜⋯⋯ 띄어쓰기를 했어?

엄마⋯⋯. 왜⋯⋯ 마침표를 붙였어?

왜⋯⋯?

나는 등 뒤로 엄습하는 불길함에 침을 꿀꺽 삼켰다. 뭔가 굉장히 X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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