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네. 그럼 일단⋯⋯ 헌터님께서.”
“헌터 아닙니다.”
“음.”
병아리 헌터가 곤란한 표정으로 침묵했다.
나는 싸늘한 정적이 맴도는 지하철에서 괜히 휘파람을 불었다.
이야, 오늘따라 휘파람이 잘 불어지네. 평소엔 바람 소리밖에 안 났는데.
“굉장히 강한 헌터님이 오셨다 가셨나 봐요. 탐욕왕의 가루다 군단은 속성 저항력이 강한 편인데 이렇게 잿더미가 되다니. 이건 선우 형도 못 할 거예요.”
“정말? 아가씨가 그렇게 강하게 각성했어?”
“네. 몬스터는 기본적으로 인간보다 단단하고 내구성이 강한 거 아시죠? 저희가 상대한 가루다 군단은 거기다 속성 저항력도 강하고, 외피가 단단한 게 특징이에요. 어지간한 화력으로는 데미지 주기도 쉽지 않아요. 이렇게 잿더미로 만들려면 적어도 S급 헌터는 돼야 할걸요?”
적어도 S급 헌터라는 말에 모두의 눈빛이 달라졌다.
아까는 막 각성한 운 좋은 각성자 정도로 보더니, 이제는 그냥 연예인 보듯이 봤다.
“잘됐다, 아가씨! 총각 말 들었어? 급이래, S급! 우리나라에 열 명도 안 되는 S급!”
“저기, 선생님. 저는 그러니까 각성한 게 아니라⋯⋯.”
“아가씨, 헌터 등록하고 나면 우리 언니 길드로 가지 않을래? 유명한 길드고, 내가 내 생명의 은인이라고 말하면 대우도 섭섭지 않게 받을 수 있을 거야. 아니다, S급이니 어서 오십쇼~ 하겠지!”
예⋯⋯? 이렇게 갑자기 스카우트하기 있기 없기?
나는 내 손을 꽉 붙잡고 눈을 빛내는 아주머니를 피해 고개를 돌렸다.
자연드림 아줌마 길드면 사헌이요? 사헌이라면 유명한 길드죠.
엄청 유명한 길드잖아요. 저어기 새벽이랑 같이 오대 길드에 속하는 초대형 길드잖아요.
“어때? 우리 언니도 분명 아가씨를 좋아할 거야. 그리고 무엇보다 언니 길드로 오면 나도 아가씨를 계속 볼 수 있을 테고.”
아주머니가 검은 속내 한 점 없이 활짝 웃었다.
생명의 은인과 계속 볼 수 있어 순수하게 좋아하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저기, 헌터님께서 가실 곳을 굳히지 않으셨다면 저희 길드는 어떠세요? 저희 길드도 아주 좋은 곳이고, 대우도 잘해 드릴 수 있어요. 저희 형도 분명 헌터님을 좋아하실 거예요.”
아주머니의 갑작스러운 길드 가입 제의에 이어 병아리 헌터의 길드 가입 제의가 이어졌다.
아니, 새벽 길드에 들어오라고요?
새벽 길드면 그 새친놈 있는 곳 아닙니까?
손테로 마주칠 때마다 끈질기게 달라붙는 그 새친놈 길드 아니냐고요.
그리고 아주머니는 사헌 길드장님의 동생이라 그런 제안을 하신다지만, 그쪽은 새벽 길드장님이랑 대체 무슨 관계길래 그런 영입 제안을?
그리고 그쪽 형이 절 좋아할 이유가 대체 뭐,
…가 있을까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의심 가는 게 하나 있다.
나는 일단 후드 주머니를 뒤적여 싸구려 딸기 맛 사탕 하나를 꺼냈다.
그러고는 그걸 내 바짓단을 잡는 새 나라의 어린이에게 건네며, 의심 가는 사항을 입 밖으로 꺼냈다.
아니다, 그전에 이것부터 말하자.
“일단 저는 헌터가 아니에요.”
“네. 그러시다고 하셨죠.”
“그리고 헌터님이 왜 새벽 길드 가입 제의를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이쪽 선생님께서는 언니분의 길드를 홍보하신 거지만, 헌터님은 아니잖아요.”
나는 아주 단호하고 딱딱하게 말했다. 그 모습이 마치 트랜스포머 같기 그지없었다.
아니면 자x스.
아니면 토마x와 친구들.
그것도 아니면 로보카x리.
아무튼 로봇과 기계의 그 어딘가.
병아리 헌터는 내 그런 태도에 머쓱한 얼굴을 했다.
좋아, 철벽부의 우연희 동무. 아주 잘했어. 그런 동무에게 오늘치 공부 대신 드라마 3화를 허락한다.
나는 이 곤란한 상황을 아주 현명하고 훌륭하게 대처한 내 전두엽에게 칭찬과 함께 포상을 내렸다.
요즘 보고 있는 드라마 ‘사랑의 던전길’의 주인공이 막 이러더라고. 던전만 갔다 하면 철벽을 쳐.
그래, 거 신성한 던전에서 연애질이 말이 돼? 정부 헌터면 시민 구출이나 할 것이지 연애나 하고 있어! 쓰읍.
하지만 내게 큰 깨달음을 줬으니 너희의 죄도 사하니라.
무엇보다 엄마가 그 드라마를 너무 좋아해서 뭐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물론 마음만 먹으면 그 드라마 종방시킬 수도 있겠지.
가면 쓰고 방송국에 단말기로 전화 걸어서 ‘어 그래, 나 손가락테크닉인데. 요즘 하는 드라마 그 뭐냐 사랑의 던전길 말이야, 그렇게 픽션이 많더라고? 드라마를 그렇게 만들면 쓰겠어? 엉?’ 이러면 그 드라마 종방은 확정이나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내 이미지도 같이 파탄 나겠지.
안 그래도 던전에서_카프리 썬_까먹는_핑거킹.jpg, 던전에서_스파이더맨_놀이_하는_핑거프린스.jpg 몬스터로_당구하는_손가락테크닉.jpg 같은 게 이미 수십 개였다.
모든 게 전 세계의 핫한 주목을 받는 탓에 인터넷 검색 조금만 해 보면 손테 짤 모음 이런 게 수두룩했다.
그러니까 저런 짓 했다가는 이상한 일화가 하나 더 추가되어 버린다.
[손테킹_방송국에_전화해서_시비_걸고_드라마_종방한_사건] 이런 게 퍼지겠지.
그럼 이제 손가락테크닉의 이미지는 더 우주로 가 버린다.
나는 몬스터 웨이브 안의 편의점 한 번 턴 이후로 [손가락테크닉이 왔다 간 편의점] 같은 피켓을 보게 되었다.
다른 곳도 마찬가지였다.
[손가락테크닉이 부수고 간 피시방], [손가락테크닉 몬스터 당구 놀이 탑재 당구장], [손가락테크닉이 출동한 놀이공원]⋯⋯.
“이런 말씀 드리기 뭐하지만, 사실 저희 길드 길드장님이 제 형이라서요. 형이 하도 인재 영입을 강조하니까 저도 그만 물들었나 봐요. 아실지 모르겠지만, 저희 새벽 길드는 B급 이상 고랭크 헌터만 속한 길드거든요.”
병아리 헌터가 어색하게 웃으며 자기 길드 어필을 시도했다.
아닌가. 저건 자기 자랑인가. 자기가 각성하자마자 B급을 받았다는?
새벽 길드의 또라이 길드장은 아주 유명해서, 모르는 헌터가 없을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다.
특히 그 새끼는 아무도 정체를 모르는 인물 손가락테크닉에 그렇게 관심이 많았는데, 어찌나 관심이 많은지 손가락테크닉이 떴다 하면 온갖 난리를 피우며 쫓아다녔다.
손가락테크닉이 왔다 간 편의점.
그건 저 새끼가 인수했다.
손가락테크닉이 부수고 간 피시방.
그것도 저 새끼가 인수했다.
손가락테크닉이 출동한 놀이공원.
당연히 저 새끼가 사 갔다.
특히 놀이공원은 ‘손가락테크닉 새벽 가입 시 놀이공원 한 달간 무료 개장’ 같은 엿 같은 이벤트를 만들었다.
손가락테크닉 집착광공 새벽 길장의 또라이 같은 행보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 새끼는 손가락테크닉의 손을 거친 모든 걸 사 모아 손가락테크닉 박물관을 만들었다.
나는 그 박물관이 세워졌을 때 몰래 박물관 구경을 하러 갔다가 본 걸 아직도 기억한다.
그 미친놈은 내가 던전에서 버린 카프리 썬 쓰레기를 죄다 모아 내 가면 모양을 만들어 놨다.
그때 하마터면 거기다 헥토파스칼 킥 날릴 뻔했다.
새벽 길드. 그래, 아주 좋은 길드지. 아주 좋은 길드⋯⋯.
나는 들끓는 마음의 평화를 되찾기 위해 자리에 주저앉아 염불을 외웠다.
사실 전쟁 터지기 전엔 우리 집 종교가 불교였다.
전쟁 터지고 난 이후에는 믿을 수가 없어서 그만뒀지만. 알고 보면 여기 신들이 저기 왕 같은 거면 어떡해.
고대에 돌아가신 부처님이 사실 살아 계신 거면 어떡해.
내 비극적인 인생이 알고 보면 이쪽 차원 갓과 저쪽 차원 갓의 스타크래프트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저 눈물이 났다.
한낱 인간은 아무것도 모르니 제발 안 그러길 빌어야 할 판이다.
“워매, 아가씨. 왜 그래? 내가 너무 부담을 줬나? 안 그래도 헌터 아니라고 부정하는 아가씨한테 너무 부담을 줬나 보다. 아이고, 미안해. 정말 미안해.”
“괜찮으세요? 죄송합니다. 너무 갑작스럽게 말씀을 드렸나 봐요. 막 각성하셔서 현실이 현실 같지 않겠지만, 조만간 적응하실 거예요. 저도 일주일 전에 헌터님 같았거든요. 일단 밖으로 나가실래요? 제가 도울 일이 있다면 얼마든지 도와드릴게요.”
내가 준 사탕을 입 안에서 도르륵 굴리던 아이가 눈 감고 염불을 외우는 내 옆에서 까르르 웃었다.
웨이브에서 어린이가 웃는 소리도 들어 보고, 나 살날 얼마 안 남았나 보다.
나는 결국 그렇게 염불을 외다 아주머니와 병아리 헌터의 손에 의해 강제 기상했다.
그 뒤에는 모두랑 역 밖으로 나갔고, 헌터 등록을 도와주겠다는 걸 거절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집에서 물 한 사발 떠 놓고 울던 엄마한테 등짝을 맞았다. 외출 금지령은 덤이었다.
분명 그랬는데. 진짜 그게 끝이었는데.
[합정역 웨이브에서 S급 각성자(추정) 등장. 새벽 길드 소속 헌터, “가루다 군단을 잿더미로 만들려면 최소 S-급”]
포털사이트 메인에 뭔가 이상한 기사가 떠 있었다.
그거 하나뿐만이 아니었다. 새로운 S급 헌터에 등장에 온 나라가 들썩였다.
뭐지, 꿈인가. 새로운 몰카인가.
나는 멍청하게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볼을 쭉 잡아당겼다.
완전 아팠다. 어제 맞은 맘스터치보다 더 아팠다.
아무래도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