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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한데 제가 일반인이라서요-8화 (8/175)

제8화

나는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다 타 버린 말벌 앞에 서서 고뇌했다.

음, 어떻게 얘기하면 좋지.

“사실 제가⋯⋯.”

돈 쓰지도 못하는데 세계 평화를 위해 일하는 손가락테크닉이라서요?

돈 벌어서 카프리 썬이나 사 먹는 손가락테크닉이라서요?

강제 소확행의 삶을 살게 된 손가락테크닉이라서요?

우주 최강 핑거킹이라서요?

뭐가 됐든 내가 핑거프린스라는 걸 밝힐 수는 없었다.

나는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재를 바라보며 침묵했다. 먼 산 찾기가 힘들어 택한 방법이었다.

“민주야, 오른쪽! 오른쪽!!”

“서빈아! 야! 너 어디 가, 임마!”

침묵에 잠긴 우리 쪽과 다르게, 헌터들이 있는 곳은 아직도 요란했다.

그러고 보니 붉은 용의 발악이 아까보다 심해진 것 같은데, 드디어 지원이 온 건가.

나는 몬스터가 몰려나오는 게이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육중한 생김새의 언월도가 불꽃과 함께 춤췄다.

주황색 등산용 선글라스를 낀 중년 여성이 등산복 차림으로 붉은 용 군단을 격파하고 있었다.

그녀의 불꽃이 얼마나 센지 접근조차 할 수 없어 새벽 제3공대와 남은 공무원 헌터들이 한낱 구경꾼으로 전락한 꼴이 보였다.

“지금 게이트 쪽에 다른 헌터가 왔어요.”

나는 상황 설명을 피해 재빨리 말을 돌렸다.

아주머니가 말한 언니가 바로 저분인가? 내 예상에는 저분이 맞을 것 같았다.

“그래? 각성하면 눈이 좋아진다더니 정말인가 봐. 누가 왔는데? 정부 헌터?”

“아니요. 언월도를 쓰는 불 특성 헌터요. 지금 몬스터를 혼자서 죄다 처리하고 계세요.”

“아이고, 우리 언니네! 우리 언니가 이제야 왔네!”

아주머니가 손뼉을 치며 뛸 듯이 기뻐했다. 나만 놀란 모양이다.

헐. 저 꼰대 노땅 헌터가 아주머니의 언니라고? 누가 봐도 저쪽이 동생으로 보이는데?

하긴 각성자는 노화가 느리게 진행된다고 했지.

각성 자체가 환골탈태나 다름없다 보니 가끔은 회춘하는 경우도 있었다.

땋아서 둥글게 틀어 올린 하얀 머리칼, 용의 형상을 띤 불꽃, 호쾌하게 휘둘러 적을 찍어 뭉개고 빠개 버리는 언월도.

우리나라에서 저런 전투 방식을 가진 헌터는 단 한 명뿐이었다.

국내 A급 헌터 중 가장 강력한 헌터, 곧 S급이 될 거라고 주목받고 있는 헌터.

국내 9위. 샛별과 대적할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인물, 화룡 자연드림.

“언니가 왔으니 이 웨이브는 금방 정리될 거야. 아까 그 착한 헌터들도 무사히 살아 돌아갈 수 있겠지. 잘됐다, 잘됐어.”

보통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한다.

‘그 헌터들이 우릴 끝까지 책임져 줬더라면, 우리는 죽을 뻔할 일도 없었을 텐데.’ 같은 생각.

만약 내가 진짜 일반인이었더라면, 틀림없이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공익을 위해 일하는 건 정부 헌터, 길드에 속한 헌터들은 모두 사익을 위해 일하는 헌터.

이러한 개념을 모두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들이 우리를 지켜 줄 거라고 당연히 기대하니까.

일반인들은 단말기가 없으므로 몬스터의 랭크를 모른다. 웨이브의 랭크도 모르고, 자기 몸을 지킬 방법 또한 없다.

그러니 헌터들이 공략 후에 떨어진 이익들을 위해, 날뛰는 고랭크 몬스터에게 달려가도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인은 그리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아! 쟤들이 우리 목숨보다 자기들 돈벌이를 더 중요히 생각하는구나! 그래서 내가 죽게 생겼구나!’

사람들은 헌터의 영웅 같은 면모에 환호한다.

그러나 그들의 이미지가 영웅에서 단 한 번이라도 어긋나면, 그들을 욕하고 비난한다.

지금은 죽은 그 사람들도, 죽기 전에 새벽 공대를 원망했겠지.

그들은 우리를 지켜 줄 필요가 전혀 없는데도, 그들이 우리를 지켜 주지 않아 제가 죽는다고 원망했을 것이다.

뭐, 원망하는 게 당연한 거지. 영웅이라고 이면이 없겠는가.

핑거킹 빠가 유명하듯이 핑거킹 까는 이도 끔찍하게 많다.

봐라. 지금 나만 해도 저 헌터들이 타이밍 놓치고 일 커졌다고 열심히 깠잖아.

“아가씨, 우리는 밖으로 나가는 길을 찾아볼 건데 아가씨는 어쩔 거야? 이제 막 각성했으니 힘쓰러 갈 테야?”

그래서 나는 이런 사람들이 신기했다.

위기 상황에선 힘 있는 사람이 당연히 자신을 지켜 줄 거라고 생각하는 게 보통인데, 그런 식으로 사고하지 않는 사람.

남을 돕고 남을 이해하고 위기 앞에서도 의연한 사람.

‘엄마! 대피소에 있겠다고 했잖아! 어디 갔던 거야!’

‘대피소 밖에 사람들이 쓰러져 있었어. 데려오지 않았다면 아마 다 죽었을 거야.’

‘그건 다른 헌터가 알아서 데려오겠지. 엄마가 거길 왜 가! 각성자도 아니면서!’

우리 엄마 같은 사람들. 나와는 다른 사람들.

“저도 같이 갈게요. 남아 있는 몬스터가 있을 수도 있잖아요.”

세상 사람이 다 이러면 좋겠는데, 이런 사람 찾기가 참 힘들다.

나만 해도 그런 사람 아니잖아. 내가 일반인이었다면 분명 그들을 버리고 갔겠지.

버리고 가서 애벌레의 한 끼 식사가 되었겠지. 이미 고깃덩어리가 된 그들처럼.

어른들 말 잘 들으면 나쁠 것 하나 없다는 게 괜한 말이 아니다.

다들 착하게 살라고들 하잖아. 착하게 사니까 이런 결과가 나왔잖아. 솔직히 다 운발이긴 하지만.

나는 어깨에 묻은 재를 툭툭 털며 모자를 벗었다. 모자 위에도 재가 한가득 쌓여 있었다.

어휴, 내가 이래서 전기는 안 쓴다니까. 적당히가 안 돼 적당히가.

나는 아주머니에게서 다시 휴대폰을 받아 들고 모자를 썼다.

아이 엄마는 어느새 울음을 뚝 그친 작은아이를 안았고, 큰아이도 엄마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럼 어느 쪽으로 가는 게 좋을까요?”

“일단 끝으로 가자. 보통 계단은 끝에 있으니까.”

자기를 지하철 탑승 경력 30년이라고 소개한 아주머니가 성큼성큼 앞장섰다.

지하철 탑승 경력 30년이라니. 30년 전통의 맛집 같은 거랑 비슷한 맥락인가. 왠지 신뢰가 안 가는데요.

나는 말벌의 사체 따윈 무섭지도 않다는 듯 플래시를 켠 채 앞서 나가는 아주머니를 뒤따라 걸었다.

게이트 쪽에서는 한창 불꽃으로 만들어진 용이 혀를 날름거리며 붉은 용 군단을 잡아먹고 있었다.

저 아줌마 대단한 건 알았지만, 동생까지 대단할 줄은 몰랐다. 이쪽도 대단하고 저쪽도 대단하다. 정말 대단한 자매야.

우리는 출구로 가는 동안 죽은 헌터들이 미처 처리하지 못한 말벌을 몇 번이고 다시 조우했다.

나는 그럴 때마다 조용히 앞으로 나가 말벌을 전기로 지졌다.

손가락테크닉은 신체 강화 특성에 불 속성으로 알려져 있으니 의심을 피하기 위한 대비로 볼 수 있겠다.

뭐, 누가 그 1위가 일반인인 척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겠냐마는⋯⋯.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번쩍이는 빛과 함께 겉만 바싹 탄 거대 말벌이 바닥에 쿵 하고 쓰러졌다.

나는 뒤이어 내게 돌진하는 말벌을 처리하기 위해 손을 들었다.

쏜살같이 달려드는 푸른 궤적, 공기를 찢고 말벌의 외골격에 틀어박히는 푸른 화살, 말벌의 안으로 파고들자마자 폭발하는 푸른 빛.

“다들 괜찮으세요?”

몬스터 몇 개체를 마저 쏘아 죽인 장본인이 전기에 겉껍질이 바싹 탄 몬스터에게 활시위를 겨눴다.

뒤이어 몬스터의 머리에 푹 꽂힌 화살이 폭발하며 몬스터의 머리도 같이 폭발했다.

“세상에⋯⋯ 저 헌터, 지금 우리 지키겠다고 다시 돌아온 거야?”

내 어깨를 쥔 아주머니가 입을 손으로 막으며 자그맣게 속삭였다.

나는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끼며 고개를 까딱였다. 아무래도 그런 모양인데요.

통구이 상태로 꿈틀거리던 몬스터를 확인 사살한 병아리 헌터가 활을 아래로 내리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표정이 이상한 걸 보니 아무래도 생존자 구성이 이상하다고 느끼는 모양이었다.

하긴 이상하긴 하겠지.

지금 모자에 선글라스 낀 고시생 하나랑 중년 아주머니 한 분이랑 어린아이 둘이랑 아이 엄마 하나만 살아남은 거잖아.

“혹시 다른 분들은⋯⋯?”

조금 전 본 궤적같이, 푸른 홍채가 눈동자와 같이 데굴데굴 굴렀다.

나는 무어라 말하려고 입을 여는 아주머니의 어깨 위에 손을 살짝 올려놓으며 선수 쳐 입을 열었다.

“다 죽었어요.”

“네?”

“그 사람들이 먼저 앞으로 갔거든요. 아이가 울면 몬스터에게 들킬 위험이 더 커진다고요.”

병아리 헌터의 얼굴 위로 예상치 못한 곤란함이 서렸다.

너도 이런 상황은 생각도 못 했지? 하긴 각성한 지 일주일 된 헌터가 뭘 알겠어.

보니까 던전에도 웨이브에도 휘말린 적 없어 보이는데.

“그럼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남으신 거죠? 가루다 군단은 탐욕왕 휘하의 백성이라 바로 다른 사냥감을 찾았을 텐데요.”

“저도 참 곤란한 상황이었다고 생각해요. 저희도 하마터면 깜빡 죽을 뻔했죠. 하지만 사람이 꼭 죽으라는 법이 있나요? 저희는 봤답니다.”

나는 약 파는 사람처럼 두 손을 꼭 모으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떴다.

날 바라보는 일행의 시선이 딱 ‘쟤 대체 뭐 하는 거야?’였다.

여러분도 제가 이상해 보이시겠죠. 하지만 저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나가는 초특급 슈퍼 울트라 헌터님이 이 일대의 말벌을 싹 뒤집어엎고 가시는 모습을요.”

나는 아주 진지하게, 또 엄숙하게, 그리고 진솔하게 말했다.

내 말에 어이를 잃은 다른 사람들이 반박했지만 나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저기, 아가씨. 말벌을 물리친 건 아가씨⋯⋯.”

“아니에요.”

“저기, 저도 아까 번개 치는 걸 봤는데⋯⋯.”

“아니라니까요.”

모두가 내가 했다고 말하는 상황에서 나는 꿋꿋하게 내 길을 갔다.

우리 엄마가 그랬다. 남한테 휘둘리는 사람은 리더가 될 수 없다고.

“아 그 제가 한 게 아니라요, 지나가는 초특급 헌터가 물리치고 갔거든요.”

너희 손테 위치 잡았다면서. 손테가 물리치고 간 거라고 생각해. 빨리! 그렇게 생각해!

나는 떫은 표정의 병아리 헌터와 눈싸움을 하며 내 주장이 틀리지 않음을 표현했다.

먼저 포기한 쪽은 저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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