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죄송한데 제가 일반인이라서요-5화 (5/175)

제5화

[내부 차원으로 몬스터가 출몰하였습니다.]

[주변 몬스터 데이터를 수집 중입니다.]

[데이터 확인 중….]

[교만왕 루시퍼의 제1군단 ‘샛별’로 추정.]

[분노왕 사탄의 제9군단 ‘붉은 용’으로 추정.]

[탐욕왕 벨제부브의 제6군단 제15사단 ‘가루다’로 추정.]

[추정 게이트 랭크 C]

[추정 웨이브 랭크 B]

[추정 몬스터 랭크 B+]

[추정 보스 랭크 B++]

[추정 종합 랭크 B+]

[추정 B+급 웨이브 -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있다’가 시작되었습니다.]

[1웨이브가 시작되었습니다.]

[헌터 여러분께서는 전투에 대비하여 주십시오.]

게이트가 열리기 전 게이트 랭크를 대략적으로 추정하는 방법은 게이트 규모를 보는 것이다.

평균적으로 게이트 규모가 작으면 쫄몹들이 조금 나오고, 게이트 규모가 크면 강적들이 대량 나온다.

그러나 직접 열어 보지 않으면 상자 안에 넣은 고양이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는 법.

게이트 또한 마찬가지다.

드문 확률이지만 규모와 정반대 난이도의 게이트가 출몰하기도 했다.

그런 게이트들은 열리기 전까지 어떤 몬스터가 나올지, 그로 인해 어떤 풍경이 펼쳐질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까 살다 보면 게이트의 규모 자체는 E급인 주제에 C+급 몬스터들이 나오는 경우도, 게이트 규모는 C급인데 까놓고 보니 B++급 보스 몬스터가 나오는, B+급 웨이브인 경우도 더러 있다.

왜냐고?

우리는 단지 규모로만 저 게이트를 판단했으니까.

“B+급⋯⋯.”

시민들을 대피시키던 헌터의 입에서 절망에 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B+급이면 A급 바로 아래 단계네.

A급부터 상급 게이트로 분류하니까 지금 열린 게이트는 준상급 게이트다.

아까 달린 댓글에서는 안 그래도 던전 독식 심한 5대 길드가 여길 왜 왔냐고들 했지만, 이 상황에서는 와 주셔서 감사하다고 해야 하는 거네.

두 길드는 높은 랭킹과 높은 프라이드만큼 소속 헌터들의 수준 또한 높으니까.

시민들의 대피를 종용하는 방송이 잡음과 함께 섞여 반복됐다. 나는 분홍색 캡모자를 위로 살짝 들고 선글라스를 뺐다.

전투를 위해 극도로 발달된 헌터의 신체가 어둠을 꿰뚫고 적의 위치를 잡아낸다. 덤으로 잽싸게 줄행랑치는 공무원 헌터 몇 명도.

“이봐! 어디 가! 당신들은 헌터잖아! 시민을 지킬 의무가 있다고!”

“나는 F-급이야! 일반인이랑 다를 것도 없다고!”

시민들을 통제하는 공무원 헌터 몇이 도망가자 장내가 혼란에 빠졌다.

고작 몇 명이라고 해도 의지할 사람이 떠난 것. 혼란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지.

철컹, 쾅-!!

게다가 그들은 도망가며 입구까지 막고 갔다. 위로 가는 출입구가 바리케이드로 막힌 게 이 거리에서도 보인다.

차례차례 줄 서서 나갈 수 있는 기회는 이미 떠났다.

줄 앞에 선 이들은 아까 도망간 헌터들과 함께 나갔지만, 줄 뒤쪽에 선 이들은 꼼짝없이 역사에 갇혔다.

길드에서 출동한 헌터, 그리고 도망가지 못한 이들과 함께.

장내가 소란스럽다.

“침착하게 대피해 주세요, 여러분! 아직 기회가 있습니다!”

“기회? 입구가 막혔는데 기회는 무슨 기회!”

“저리 비켜! 난 죽기 싫다고!”

저번에 예솔이랑 본 좀비 영화가 딱 이런 모습이었던 것 같은데. 현실은 원래 영화보다 다이내믹하다더니 지금이 딱 그 짝이다.

발이 밟고 밟히는 지하철 댄스장 안에서, 나는 침착하게 휴대폰 플래시를 켰다. 어두운 나머지 남의 발을 밟았다간 그 사람의 발을 작살 내 버릴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 다들 제 말을 들어 주세요!”

어두운 공간에 갑자기 환한 빛이 들이찬다. 나는 이 순간 조명발이라는 게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혼란스러우신 건 알겠지만, 살아 나갈 방법이 없는 건 아닙니다. 조금 전 길드와 연락해 지원을 보내 달라고 했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됩니다. 그러니 너무 두려워하지 마시고 질서를 지켜 주세요!”

히어로의 외침과 함께 허공에 반짝거리는 구체가 생겼다.

그와 동시에 빛을 이용한 스포트라이트로 모두의 주목을 단번에 가져온 히어로가 지팡이를 꽉 쥔다.

반짝이는 구체가 섬광탄처럼 터지며 주변을 뒤흔든다. 아악, 내 눈.

나는 욕지거리를 입 안으로 삼키며 귀를 틀어막았다. 하지만 쓸데없이 성능이 좋은 귀를 가진 탓인지 잡음이 훤히 들렸다.

“형. 근데 B+급이면 저희도 죽는 거 아니에요? 저희 연락도 아직이잖아요.”

“그건 지금부터 하면 돼. 어차피 교만왕의 정예군인 샛별이 나오는 건 가장 마지막일 테니, 얼마 정도는 버틸 수 있어.”

대충 시민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후라이를 깠다는 내용인 듯.

도망간 누구들보다 낫네. 저런 마인드라면 무사히 대피시켜 줄 테니 얌전히 있어도 되겠다.

나는 그들의 용기에 마음속으로 박수갈채를 보내며 눈을 깜빡였다.

선글라스를 올려 둔 탓에 빛의 여파가 아직도 남아 있었다.

“서빈아, 너 입구 쪽으로 한 방만 쏴라.”

하해와 같은 조명발로 모두의 히어로로 등극한 헌터가 옆에 선 헌터에게 지시했다.

새벽 길드 야잠을 입은 그 헌터는 지시에 따라 제 상체만 한 활을 당겼다. 짧은 조준 끝에 슝 날아간 화살이 굉음을 내며 터진다.

콰과광-!

앞을 가로막는 방해물을 모조리 날려 버린 화살에 이어 어디선가 나타난 거대한 식물 줄기가 무너지는 천장을 받친다.

바리케이드로 꽉 막혀 지나갈 수 없는 입구가 제 기능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은 웨이브 초입이라 몬스터가 얼마 없지만, 얼마 안 가 쏟아져 나오게 될 테니 다들 신속하게 대피해 주세요!”

헌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람들이 입구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비켜! 집에서 날 기다리는 가족이 있다고!”

“누군 가족 없는 줄 알아?! 뒤에 사람 많으니까 빨리 좀 가!”

“아악, 밟지 마세요!!”

와. 전설이다, 전설.

나는 갑자기 블랙 프라이데이가 된 입구 앞을 보며 짝짝짝 손뼉을 쳤다.

사지 멀쩡하고 속도에 자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입구로 달려갔고, 뒤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노약자.

한 층 더 올라가는 게 뭐가 그리 중요하다고 저렇게 난리인지 모르겠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은 지하 2층, 한 층 올라가 봤자 지하 1층.

지하 1층이라고 몬스터가 안 나오는 것도 아닐 텐데 저렇게 아득바득 기를 써서 올라가야 할 이유가 있나?

물론 그쪽에도 헌터는 있겠지만, 새벽 측 헌터만큼 강하지는 않을 텐데. 게다가 이쪽은 놀라운 쇼맨십까지 보여 줬다.

그러니까 내가 일반인이라면 위로 안 올라가고 헌터 옆에 찰싹 붙어 있겠다.

나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빠져나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투둑, 툭.

겨우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천장에서 돌멩이가 툭툭 떨어진다. 입구가 무너지는 건 그야말로 순식간.

제법 길게 버텨 주던 입구는 3분의 2에 가까운 사람들이 올라가고 나서야 무너졌다.

그리고 이 동네는 순식간에 초상집이 됐다.

“우측에 말벌 하나!”

“민주야, 이쪽으로 줄기 좀 보내 줘!”

몬스터들이 본격적으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키에에엑!!

푸른 화살이 허공을 가른다.

말벌의 배에 꽂힌 화살이 쾅! 소리를 내며 폭발한다.

조명이 죄다 나간 지하 공간임에도 어둡지는 않다. 저 앞에서 섬광탄을 펑펑 터뜨리고 있는 헌터 덕분이다.

말벌의 형상을 띄고 있어 가루다라 이름 붙여진 탐욕왕의 제6군단이 그들의 맹공에 연신 쓰러지고 있었다.

“서빈아, 이 근처에 랭커 없어? 지금은 가루다뿐이라 버티고 있는 거지 붉은 용이 나오기 시작하면 답도 없을 텐데.”

“일단 길드장님한테 SOS 쳤는데요, 지금 던전 안이라서 바로 못 오신다는데요.”

“아니, 그 인간은 왜 던전을 혼자 가고 그래! 내가 스물일곱 처먹고 세계 최고 공대왕이 되겠다는 꿈을 꾼다는 게 말이나 되냐고 몇 번을 말했는데!”

기다란 지팡이의 뾰족한 끝부분으로 말벌 하나를 찔러 죽인 남자가 열받는다는 듯 소리쳤다.

남자가 악에 받친 소리를 지를 때마다 주변을 비추는 구체가 더 세게 터졌다.

조명발 히어로답지 않게 많이 화가 난 모양이었다. 유튜브에서 볼 때랑은 또 다르네.

국내 랭킹 84위, 새벽 길드 제3공대 공대장, 초코우유. 빛 속성에 구현화 특성인 원거리 저격수.

희귀한 속성이라서 초반에 주목을 크게 받았는데, 성장치가 낮아서 B+급에 머문 헌터다.

헌터로서는 그리 유명치 않은데 같은 길드 소속인 부산우유랑 같이 유튜브를 해서 대중적인 인지도가 높은 헌터 중 하나였다.

“주변에 다른 랭커는 없어? A 이상으로.”

“글쎄요. 일단 제가 아는 분은 더 없는데…. 근처 단말기 확인이라도 해 볼까요?”

“빨리 해 봐. 그리고 가능하면 근딜로 불러 줘. 붉은 용 잡으려면 원딜보단 근딜이 나으니까.”

“샛별은요? 샛별 잡으려면 화력도 필요하지 않아요?”

“샛별은 어차피 아무나 못 잡아. 국내 10위권은 와야 잡을 수 있을걸. 그러니까 우리는 길장님 오실 때까지 버텨야 해. 아니면 다 죽어.”

초코우유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심각한 건 알겠는데, 아깐 그렇게 희망적으로 말하더니 지금 와서 초 쳐도 되는 것임?

가장 서열이 높아 보이는 헌터의 입에서 나온 말이 못 버티면 다 죽는다는 말이라니. 나는 실소가 터져 나오는 걸 애써 참으며 휴대폰을 쥐었다.

말벌이 나오는 지금은 첫 번째 웨이브. 가장 난이도가 낮은 구간이고, 그들이 노력한다면 지금 있는 인원만으로도 우리를 충분히 대피시킬 수 있는 구간이다.

그때 본 이 팀은 분명히 다섯 명이었다. 두 명은 처음부터 안 보였고, 한 명은 앞으로 뛰어갔다.

지금 우리 앞에 남아 있는 건 두 명이니까 나머지 셋이 다른 곳에 있다는 건데, 그 셋한테 라인을 맡기고 우릴 대피시키면 되잖아. 우리가 있으면 싸우기 더 힘들 텐데.

하지만 지금 이 팀의 리더는 저들끼리 뭔가를 해 보려는 게 아닌, 무작정 고랭크의 헌터만 찾고 있었다.

그래, 뭐. 이 사람들은 공무원이 아니니까. 목숨 걸 이유까지는 없다는 거겠지.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지만, 길드와 길드 소속 헌터들의 주목적은 인명 구조가 아니다.

그들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게이트 공략으로 얻는 부산물과 공략에 성공함으로써 따라오는 금전, 명예 같은 세속적인 것들이다.

그들이 고랭크의 헌터들을 선호하는 이유도, 고랭크 헌터와 함께할수록 더 안전하게 게이트를 공략하고 이득을 취할 수 있어서 그렇다.

대충 게이트를 공략하다가 조금 버거워진다 싶으면 지원을 부르거나 그조차도 여의치 않으면 냅다 도망가 버리는 게 보통의 헌터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이렇게 말이나 주고받고 있는 거고.

그리고 그건 주변의 시민들을 패닉에 빠뜨리기 딱 좋은 말이었다.

으아아앙-!

절망적인 말에 모두가 입을 딱 다물자 아까부터 줄곧 울던 아이의 울음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몬스터는 자연스럽게 시끄러운 곳을 향해 돌진했고, 시민들의 눈초리는 싸늘해졌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저들의 명을 짧게 만드는 것 같은 모양이었다.

이 한 많은 이 세상~ 어찌 살다 가리오~♪♬

설상가상으로 엄마 취향의 뽕짝인 내 벨 소리가 지하철역 내부를 크게 울렸다.

아이고, 벨소리 무음으로 하는 거 까먹었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주변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나 때문에 촌스러운 야잠 입은 헌터들이 바빠진 걸 보니 살짝 통쾌했다.

아까는 다 구해 줄 것처럼 대화하더니, 이제 와서 목숨이 아까워진 모양이지.

“여보세요, 엄마?”

나는 재빨리 화면 위 전화기 아이콘을 밀어 전화를 받았다. 요즘 핫한 아이돌 노래와 함께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 딸~ 엄마 오늘 일찍 갈 건데 이따 나가서 고기나 먹을까?

“엄마 미안한데, 나 지금 바빠.”

- 왜? 뭐 하고 있는데? 오늘 예솔이 보러 간다더니 노래방이라도 갔어?

“그건 아니고, 몬스터 웨이브에 휘말려서 지금 위기 상황인 것 같아.”

- 몬스터 웨이브? 너 설마 지금 합정역이니?

최대한 작게 말한다고 작게 말했는데, 이마저도 시끄러운 모양인지 주변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하는 수 없지. 통화를 끊는 수밖에.

“엄마 나 지금 소리 내면 죽을 수도 있으니까, 이따 나가서 다시 전화할게.”

- 뭐?! 연희 너는 대체 어쩌자고⋯⋯!

“응. 나도 사랑해.”

나는 대충 입으로 쪽 소리를 내곤 통화를 종료했다.

그러자 몰려오는 말벌 떼를 처리하던 헌터 하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날 내려다보았다.

“어머니께 그런 식으로 말씀드려도 되는 거예요?”

아니, 이분은 말벌 잡는 거 바쁘지도 않으시나. 쓸데없는 곳에 참견하시고 그러네. 자긴 얼마나 효자라고.

나는 비딱하게 나가는 말을 꿀꺽 삼키곤 헤프게 웃었다.

어차피 선글라스 껴서 표정 관리 안 해도 되지만, 싸우는 거 보아하니 관통형이니 혹시 모르지. 눈 엄청나게 좋을지.

“어차피 살아서 돌아갈 건데요, 뭐.”

“살아서⋯ 요?”

헌터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초코우유가 한 말 못 들었냐고 표정으로 말하는 것만 같았다.

아, 저도 들었죠.

지금 헌터님 바로 옆에 붙어 있는 게 누군데요. 이 거리에서 못 들으면 그건 헌터 이전에 인간이 아닌데요.

“저는 지금까지 제가 죽을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요.”

처음 몬스터를 맞닥뜨렸을 때도,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던전에 내몰렸을 때도, 스스로 특급 게이트에 들어가기로 결심했을 때도, 나는 단 한 번도 내가 죽을 거라고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죽을 거였다면 진작에 죽었겠죠. 그렇지만 지금도 멀쩡히 살아 있잖아요?”

쓰러져도 일어섰고, 죽기 살기로 덤벼들었다. 막 각성한 각성자들을 무작정 게이트 안으로 밀어 넣는 상황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애를 썼다.

그렇게 살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나는 왠지 크게 감격한 듯한 얼굴의 헌터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말벌을 쏴 죽이는 스냅이 빨라진 걸 보니 착각이라도 단단히 한 모양이다. 일부러 희망적인 말을 한 게 맞긴 한데 반응이 마음에 안 든다.

저는 제가 졸라 짱 세서 살아남은 거지, 지금 님이 지켜 주고 계셔서 살아남은 게 아니거든요. 뭔가 착각하고 계신 듯?

크게 감격한 헌터의 손놀림이 부지런해짐에 따라 말벌이 터져 나가는 횟수가 늘었다.

나는 푸르스름한 궤적이 수놓는 폭죽놀이를 구경하며 딴생각을 했다.

저 정도면 우리도 곧 대피할 수 있겠네. 웨이브가 끝나면 우리를 대피시켜 주겠지?

굳이 안 나서고 일반인인 척 얌전히 빠져나갈 수 있겠다.

엄마한테는 저녁에 집에서 밥 먹자고 해야지. 거대 말벌이 터져 나가는 걸 봤는데 저녁에 고기를 먹긴 좀⋯⋯.

나는 안 그래 보여도 비위가 굉장히 약한 사람이었다.

제가 또 왕년에 던전에서 곤충형 몬스터를 뜯어먹어 봤는데요, 중독돼서 사경 좀 헤매고 그랬습니다.

쏟아지던 말벌의 수가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줄어들었다.

몬스터 웨이브는 한차례의 몬스터가 쏟아진 후 잠시 휴식 시간을 갖는다.

그다음엔 더 많고, 더 강한 몬스터가 쏟아진다.

“서빈아, 랭커는 찾았어?”

저 앞에서 몬스터를 해치우던 초코우유가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그러자 내 옆의 헌터가 허둥지둥 활을 내리며 단말기를 들었다.

제가 계속 지켜봤는데 몬스터 저격하느라 안 찾던데요. 사람들 지켜야 하는데 그게 맞지.

그러나 저기 리더가 바란 건 그게 아닌 모양. 공격 말고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미숙한 티를 팍팍 내는 헌터가 공대장한테 까였다.

오, 반응 보니까 병아리 같은데 새벽 새 헌터 뽑았나 봐? 그럼 어제 그 던전에서 스틸 당한 게 제3공대인가.

새벽 3공대면 수준 엄청 높은데 첫랭이 고랭으로 떴나 보네.

나는 별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손안에서 폰을 굴렸다.

할 일도 없으니까 자유게시판이나 훑어볼 생각이었다. 합정역 A+ 게이트 터진 소식이 쫙 퍼졌을 테니까 새 게시글이 엄청 있겠지.

콰과과광-!

춥고 어둑한 지하에 거대한 폭음이 일었다. 검게 부스러진 모양의 게이트에서 거대한 도마뱀의 앞발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 2웨이브 시작이 조금 빠르네. 랭크가 높아서 그런가.

“서빈아! 아직도 못 찾았어?!”

마음 급한 초코우유가 사람을 재촉한다. 다급하다고 얼굴에 써 있다.

“형, 제가 잘못 본 걸 수도 있는데요, 지금 여기에⋯⋯.”

“여기에 뭐. 핑거프린스라도 나타났어?”

아 그놈의 핑거프린스. 나는 미간을 팍 찌푸리며 입술을 짓씹었다.

단말기를 쥐고 애써 침착한 표정을 지은 헌터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네. 그것도 아주 가까이에 있대요.”

[2웨이브가 시작되었습니다.]

[헌터 여러분께서는 전투에 대비하여 주십시오.]

휴대폰 액정 위를 스치는 손가락이 딱 굳었다.

나는 슬금슬금 주머니로 손을 집어넣어 단말기의 상태를 확인했다.

옷 위로 불빛 새어 나오는 거 보니까 안 껐네. 와, X됐다.

왠지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아주 진지하고, 아주 엄숙하고, 아주 침착하게 전원 버튼을 눌렀다.

핑거킹은 여기 없어. 미국 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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