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죄송한데 제가 일반인이라서요-1화 (1/175)

제1화

때는 바야흐로 20XX년, 한창 지구 종말론이 퍼질 시기였다.

아이고, 지구 종말론이 한두 개도 아니고 뭘 저런 걸 믿고 앉았어?

막 수능을 끝내고 운전면허 학원에 다니던 나는 심드렁히 인터넷 기사를 넘기며 걸음을 재촉했다.

와, 저 외제 차 봐. 저게 대체 얼마야? 내가 지금 운전면허를 딴다고 해도 저런 걸 바로 끌고 다니진 못하겠지?

끌고 나갔을 때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외제 차 사려면 얼마나 일해야 하려나.

…10년? 10년 일해서 살 수 있긴 하고?

당장 대학교 등록금이 문젠데 외제 차는 무슨.

나는 염불 외듯 영어 단어를 외우며 미세 먼지 가득한 밤거리를 걸었다.

머리 쌩쌩하게 굴러갈 때 토익 공부를 미리 해 둬야 나중에 고생을 안 한다.

조금이라도 젊을 때 고생해 놔야 노후에 편히 살지. 어른들 말 들어서 나쁠 것 하나 없다.

competent, 능숙한.

plausible, 이치에 맞는.

엿 같은 영어 단어들이 단어장 안을 굴러다녔다.

나는 수능 공부할 때처럼 모든 단어를 혀를 굴려 간드러지게 발음했다.

괜히 이러면 잘 외워지더라고. 기분 탓이겠지만.

아. 시험 보기 싫다.

시험에 시험이 연속인 망한 인생. 공부, 스펙, 취업, 돈! 뭐 하나 내 맘대로 되는 게 없었다.

다들 나중 가면 지금보다 더 힘들 거라지만, 나는 지금도 아주 힘들었다. 차라리 이 기사처럼 지구가 확 멸망해 버리면 좋겠네.

나는 노트를 찢어 만든 간이 단어장을 구깃구깃 접어 던졌다. 공처럼 구겨진 종이가 바닥을 통통 굴러 하수구 앞에 멈춰 섰다.

그때였다.

끼기긱-

유리를 긁는 듯한 기이한 소리가 났다.

세상이 안개처럼 흐리게 보였고, 공기가 조각나는 것 같았다.

피부 위에 내려앉는 기묘한 감각, 뒤틀리는 콘크리트와 깨져 나가는 유리창.

나는 육교 저편의 이변을 감지한 즉시, 아까 본 기사를 다시 확인했다.

- 모 사이비 종교 단체의 교주 이 모 씨, 모월 모일에 새로운 시공이 열리고 다른 차원과의 통로가 열리며 그로부터 나온 생명체로 지구가 멸망할 것이라 예언해⋯⋯.

검게 변해 소용돌이치는 육교 저편에서 듣기만 해도 섬뜩한 소리가 났다.

땅을 울리는 발걸음, 콘크리트 위를 스치는 철제 둔기, 위로 거칠게 솟은 송곳니와 벌어진 입 사이로 뚝뚝 떨어지는 침.

게임에서나 보던 몬스터가 그곳으로부터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뭐, 뭐야. 이거 꿈 아니지?

나 지금 게임 속에 들어왔거나 그런 거 아니지?

나는 멍청하게 눈을 깜빡이며 내 뺨을 잡아당겼다.

쓰읍.

아픈 걸 보면 꿈은 아니었다.

콰과광-!

몬스터의 손짓 한 번에 도로가 부서지고 건물이 무너졌다.

내가 아까 보며 침을 삼키던 외제 차 또한 철제 둔기에 맞아 산산조각이 났고, 운전자는 외제 차와 함께 뭉개졌다.

피로 떡진 둔기가 또 다른 희생양을 찾아 공기를 갈랐다.

미친, 이게 뭐야.

아니, 도저히 욕을 안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말도 안 되는 광경에 새파랗게 질린 채로 뜀박질했다.

수능 끝나고 얻은 1nn만원짜리 스마트폰을 떨구지 않도록 꼭 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얘 몸값이 내 몸값보다 비싸다.

쿠구궁-!!

육교가 내려앉았다. 눈앞이 번쩍이고 머리가 띵하게 울렸다.

푸르스름하게 반짝이는 통로 너머로 인간이 아닌 존재의 실루엣이 어른거렸다.

* * *

전 세계에 일제히 게이트가 열리고 몬스터가 비처럼 쏟아진 그날, 지구는 격변기를 맞았다.

수많은 도시가 파괴되고 수많은 사람이 죽었으며, 기술은 퇴보하고 문명은 낙후됐다.

그러나 이런 절망 속에도 희망은 있다고 말하는 듯이, 몬스터에 맞설 수 있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들을 그 당시엔 각성자라고 불렀고, 모든 게 안정화된 후엔 헌터라고 불렀다.

헌터, 사냥꾼.

몬스터를 전문적으로 사냥하는 사람들.

사람들은 보통 그날을 재앙의 날이라고 불렀으나, 어떤 사람들은 그날을 축복의 날이라고 불렀다.

헌터들이 가져온 몬스터의 부산물은 인류 문명을 한층 발전시켰고, 우리 사회를 조금 다른 모습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내 인생 또한, 그날을 기점으로 180° 바뀌었다.

왜냐하면 내가⋯⋯ 그날 몬스터에게 다진 고기가 되기 전에 각성했기 때문이다.

꿈에서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는데, 아무튼 그렇게 됐다.

음, 지금 회상해 봐도 몹시 implausible (믿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 * *

죽음의 위기 앞에서 각성한 각성자들은 몰려오는 몬스터들과 짧은 전쟁을 벌였다.

수많은 각성자가 죽었고, 수많은 일반인이 죽었다.

인류는 전쟁의 종식을 위해 게이트를 닫을 방법을 애타게 찾았다.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닫는 게 어려워서 그렇지.

각성자들은 수많은 희생을 치러 고위 몬스터를 쓰러뜨리고 게이트를 닫았다.

당시 전 세계에 있는 특급과 상급 게이트가 대략 30개였는데, 저걸 처리할 때 그렇게 애를 썼던 거로 기억한다.

- 헌터가 되기 위한 모든 것, 스타 학원! 20XX년 올 한 해 배출 각성자 20명!

번쩍이는 지하철 광고판 위로 학원 광고가 스쳐 지나간다.

그때 열린 특급과 상급 게이트를 모두 닫는 데까지는 약 5년이 걸렸다. 5년 동안 이어진 전쟁이 무색하게도, 세상은 빠르게 안정화됐다.

각국 정부는 사망자를 수습하고 도시 재건에 힘썼으며, 세계의 모든 나라가 평화 협정을 맺었다.

사실 안 맺을 수가 없긴 했다.

까딱 잘못했다는 그 나라에 또다시 특/상급 게이트가 터졌을 때 아무도 도와주지 않을 테니까.

뭐, 저걸 맺는다고 특/상급 게이트가 열렸을 때 게이트를 확실히 닫을 수 있는 것도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맺어 두면 좋지.

왜냐하면 저게 열리는 순간 나라가 망하는 건 확정이니까.

다른 나라의 도움을 받아서 국민들 대피라도 시켜야 하지 않겠어?

“델리만쥬 팝니다! 김밥, 만두, 호두과자도 있습니다!”

광고판 좀 봤다고 라떼는 말이야~를 시전하던 두뇌에 강렬한 어퍼컷이 들어왔다.

킁킁. 어디서 향기로운 냄새가 난다 했더니 저기에 노점이 있었네.

나는 홀린 듯이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노점 앞으로 다가갔다. 지하철의 명물은 역시 델리만쥬지.

가난한 고시생 지갑에서 삼천 원이 나가기까지 단 5초, 노점상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내가 정신을 차리고 다시 광고판 앞에 서기까지 5분이 걸린 것과 매우 대조되는 상황이었다.

크흠. 어디까지 생각했더라, 아무튼.

자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하급 게이트나 A급 이상의 헌터라면 혼자서도 닫을 수 있는 중급 게이트와 달리, 상급과 특급 게이트는 수많은 희생을 치러야 닫는 게 가능했다.

5년간 이어졌던 전쟁 중에도 유독 수많은 사상자를 낸 이 서른 개에 달하는 특/상급 게이트들은 한 나라를 멸망시킬 만큼 강력했고, 그런 곳에 목숨을 걸고 자처해 들어가려는 각성자는 당연히 없었다.

상급 게이트가 한번 열리면 C급 이상의 베테랑 헌터 수천이 죽는다.

특급 게이트가 한번 열리면 A급 이상의 고위 헌터가 싹 다 몰려가도 가망이 없다.

일반인 사상자는 그보다 더 많을 것이고, 부상자는 두 개를 합친 것보다 더 많겠지.

그래서 특급 게이트가 열리면 모두가 그 나라는 망했다고 봤다.

상급 게이트라면 나라를 거의 떼다 바치는 조건으로 다른 나라에서 헌터 파견을 받을 수 있었지만, 특급 게이트라면 모두가 학을 뗐다.

지금까지 열린 특급 게이트는 총 네 개였다. 그중 하나는 남태평양의 작은 섬나라에,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지금은 한국이 된 북한 평안도 지역에 열렸다.

그러자 모두가 북한이 망할 거라고 했다. 북한도 망하고, 한국도 망하고, 그 위의 중국도 타격을 입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한국은 망하지 않았다. 북한은 망했지만 한국은 망하지 않았고, 수많은 사상자를 내긴 했지만 특급 게이트 역시 무사히 닫혔다.

- ‘전 세계 던전 공략 1위’

-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갖춘 근접 계열 헌터’

- ‘SSS급 보스 몬스터를 단신으로 물리친 헌터’

- ‘특급 게이트로부터 나라를 구한 일국의 영웅’

- ‘헌터들이 뽑은 가장 존경하는 헌터 1위’

- ‘세계인이 뽑은 가장 유명한 헌터 - 1위’

……

지하철 광고판 위로 가면을 쓴 한 헌터의 영상이 재생됐다.

나는 광고 영상에 큼지막하게 붙어 올라가는 여러 수식어를 유심히 살피며 델리만쥬를 집어먹었다.

방금 막 사 따끈따끈한 게 아주 죽여주는 맛이었다.

역시 지하철 명물, 델리만쥬. 어째 다른 곳에는 가게가 있는 꼴을 못 봤다.

나는 마스크를 턱까지 내리고 턱관절을 열심히 움직였다. 고소하고 달콤한 냄새가 근처에 진동했다.

“안녕하세요.”

톡톡. 얼굴 모를 누군가가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다.

멀뚱멀뚱 광고판만 본 탓인가? 나는 고개를 돌려 옆을 보았다.

멀끔하게 옷을 차려입은 두 남녀가 상냥하게 웃고 있다. 길드 문양이 찍힌 옷이 대놓고 ‘나 헌터요’ 하고 말하는 것 같다.

“저희는 한라 길드입니다. 아까부터 쭉 지켜보고 있었는데요, 아무래도 각성하신 것 같아서요.”

“……?”

그 뭐냐.

요새 사이비들은 헌터를 동경하는 일반인들이 각성자다 뭐다 하면서 데려간다던데, 소문이 사실이었나 봄.

초딩들 장래 희망 1위가 유튜버가 아닌 헌터가 된, 대헌터 시대.

지하철 사이비들마저 새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변화해 가는 중이었던가. 정말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다.

“죄송한데 제가 일반인이라서요.”

하지만 열심히 사는 건 열심히 사는 거고, 사이비는 또 말이 다르지.

나는 몹시 유감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우리 엄마가 사이비랑은 상종하지 말랬는데, 그래도 그냥 무시하고 지나치긴 좀.

다 내가 너무 착하고 바람직한 인간상인 탓이었다.

“그래도 저희랑 함께 가셔서 각성 여부를 알아보시는 게⋯⋯.”

현란한 전단지를 쥔 여자가 거절에도 굴하지 않고 웃으며 말한다.

크와아앙-!

그리고 여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평화로운 지하철 저 끝에서 몬스터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오⋯⋯.”

삐빅-! 삐비빅-!

울음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외투 주머니에 대충 쑤셔 넣은 단말기에서 삑삑거리는 신호음이 울린다.

이건 지구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던전 게이트 근방의 헌터를 모조리 소집하는 일종의 알림이었다.

“지금 이 소리, 각성자 단말기 소집 신호 맞죠?”

몬스터의 울음소리에 말이 뚝 끊긴 여자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젠장, 큰일 났다.

나는 내가 헌터라는 걸 알아챈 두 사람을 쌩 지나쳐 달렸다.

아니, 하필이면 각성자인 척하는 사이비들한테 진짜 각성자인 걸 들킬 게 뭐람. 저런 부류한테 진짜 각성자만큼 먹음직스러운 상대가 또 어디 있다고!

“으악! 누가 자꾸 밀치는 거야!!”

“저기요, 제 발 밟지 마세요!”

“죄송합니다. 지나갑니다, 지나가요.”

게이트 때문에 지하철 내부가 완전 아수라장이었다. 그리고 그런 아수라장에서 도망가는 건 누워서 떡 먹기보다 더 쉬웠다.

던전 게이트 경보 때문에 다들 대피 중인 상황이라, 그냥 그들 사이에 섞이면 되니까.

나는 빨리 나가려고 아우성치는 사람들을 퍽퍽 밀치며 나아갔다.

밀쳐서 미안합니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음.

웨에에에엥-!

지하 공간에 울리는 사이렌 소리가 유독 크다.

나는 긴급 도주에 성공해 숨을 돌리곤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또 다른 지하철 광고판 위로 아까 본 그 광고의 마지막 장면이 흐른다. 대검을 붕붕 휘둘러 몬스터의 머리를 으깨 버리는 한 사람과,

[세계 랭킹 1위, 군신(軍神) 손가락테크닉]

한순간의 실수로 망한 내 닉네임.

나는 피눈물이 흐르는 심정으로 삑삑 울리는 단말기를 꺼내 들었다.

지하철 2호선에 하급 게이트가 열렸으니 인근에 있는 헌터들은 가급적이면 출동해 달라는 신호였다.

“저기요! 잠시만요!”

삑삑거리는 단말기가 조용해지기 무섭게 반갑지 않은 목소리가 들린다.

세상에, 저게 누구야.

고개를 뒤로 쓱 돌리자 저 멀리서 나를 향해 질주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까 사람 낚으려던 사이비들.

내가 이래서 착하게 안 산다니까. 무시했으면 끝났을 일이 착하게 살아서 이렇게 됐잖아.

아무튼 가급적이면 출동해 달라는 소리는 꼭 출동하지 않아도 된다는 소리지.

나는 달려오는 두 사람을 피해 다시 지하철역 안을 달렸다. 집착의 화신이 따로 없는 두 사이비가 계속 내 뒤를 쫓았다.

“당신 헌터죠! 혹시 저희 길드에 관심 있어요?!”

“아, 일반인이라니까요! 저 헌터 아니라니까요! 그리고 댁들 진짜 길드 아니고 사이비잖아!”

전쟁 때 대활약, 전쟁 이후에도 대활약, 평안도에 열린 특급 게이트를 혼자 닫은 전설의 헌터, 아무도 정체를 모르는 그 헌터.

군신 손가락⋯⋯ 아무튼 군신 선생님은 길드가 달리 없었다.

아까 그 광고에서도 군신 선생님은 아무런 장신구나 마크 없는 차림새였지.

모두가 왜 랭킹 1위씩이나 되는 사람이 아무런 길드도 없이 혼자 다니는지 궁금해했다.

그 이름과 명성으로 길드를 차리면 달려올 랭커가 수두룩하고, 특급 게이트를 닫은 그 능력 하나로 창업 군주가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닌데, 왜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지 궁금해했다.

왜 정체를 드러내지 않느냐니. 참 신기한 사람들이다.

너희라면 손가락테크닉 같은 닉네임 달고 정체 드러낼 수 있겠어?! 어?! 있겠냐고!

게다가 길드 들어가면 닉네임 밝혀야 하잖아! 내 정체 드러내야 하잖아! 인터뷰해야 하잖아! 그러면 왜 저런 닉네임을 지은 거냐는 질문 쏟아져 들어올 거잖아!

나는 날 쫓아오는 두 사람을 피해 바람과 같이 달렸다.

사이비 권유도 사절이고요, 진짜 길드 가입 권유도 사절입니다.

죄송한데 제가 일반인이라서요. 그리고 앞으로도 쭉 일반인일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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