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본 작품은 픽션이며 등장하는 인물 지명, 기관, 사건, 단체 및 직업 등은 실제와 어떠한 관련도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이렇게 뵐 줄은 몰랐네요.”
김태호도 어안이 벙벙했다.
도한모터스의 회장을 이렇게 조우하게 될 줄이야.
“회장님이 주변 공장의 현장점검 중에 꼭 김태호 사장님을 뵙고 싶어 하셨습니다.”
정한길은 그 말만 남기고 카페 바깥으로 나갔다.
양도한은 김태호에게 맞은 편 자리를 권했다.
“편하게 대화하게 잠시 빌렸다네. 이 늙은이에게 잠깐의 시간을 할애해줄 수 있다면 부디 앉아주겠나.”
“놀라긴 했지만 이런 자리를 감히 거부할 수는 없죠. 영광입니다. 양 회장님.”
김태호도 이런 기회를 그냥 넘겨버릴 사람은 아니었다.
“이런 자리를 준비하실 정도로 절 보고 싶어 하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재영공업이 현실적인 어려움을 딛고 일어난 것도 대단했지만, 이토록 뛰어난 기술력을 겸비한 것이 너무 대견했다네.”
양도한은 진즉 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한 이유에 대해서도 고백했다.
건일그룹과의 관계 때문이었다.
재영공업이 건일그룹 일을 진행하는 이상 직접 찾아가기란 쉽지 않았다. 자칫하면 재영공업에만 해가 될 수 있어서였다.
“그래서 잊고 지냈는데, 마침 정 사장의 뉴스를 봤는데 자네도 있지 뭔가.”
이때까지 참던 양도한은 거기에서 생각을 굳혔다.
정한길을 통해서 대화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였다. 그런데 의외의 소득을 얻었다.
바로 김태호와 이경민의 마찰이였다.
하지만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자신의 이야기를 할 뿐이었다.
‘대기업 총수마다 참 사람이 다르구나.’
대화를 할수록 김태호는 묘한 느낌이 들었다.
허용무가 타오르는 불꽃과 같다면, 양도한은 흐르는 물과 같은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양도한과는 편안하게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
둘은 공적인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그런데도 대화는 막히지 않았다.
주된 이야기는 회사를 경영하면서 생긴 소소한 일들이었다.
양도한의 시작도 작은 회사였다. 거기서 도한그룹까지 키워내는 기염을 토했다. 그랬기에 할 수 있는 그의 경험담은 김태호에게 뼈와 살이 되는 귀중한 가르침이었다. 그가 경청을 할수록 양도한도 더 경영에 도움이 되는 것들을 말해주었다.
우우우웅!
“이런······.”
“전화 받으시게.”
“실례 하겠습니다.”
그 중요한 가르침의 흐름이 끊겼다.
김태호는 자꾸 울리는 전화가 얄밉기만 했다. 걸려온 전화는 허용무였다. 평소라면 몇 마디 대화를 하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통화는 더 해도 되지 않나?”
“네. 괜찮습니다. 이따가 전화 드리기로 했으니까요.”
“그러면 다행이군.”
양도한도 누구의 전화인지 묻지 않았다.
둘의 대화는 1시간이 1분처럼 느껴질 정도로 흘렀다.
푸른 하늘이 점차 붉게 물들었다.
“이런! 내가 재능있는 젊은이의 시간을 너무 뺏었군.”
“전 괜찮습니다. 회장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어서 너무 큰 도움이 되거든요.”
“이곳도 너무 오랫동안 차지할 수는 없으니 진짜 하고 싶었던 사업 이야기는 정식으로 제안 하는 걸로 대신하겠네.”
“무조건적인 승낙은 할 수 없습니다만, 가능한 일이면 최대한 긍정적으로 검토하겠습니다.”
김태호도 공적인 일을 확답을 줄 수 없었다. 여기까지가 그가 할 수 있는 마지노선이었다.
“아! 혹시 오늘의 대화나 만남으로 불이익을 겪는다면 내게 말해주게. 이 바닥이 은근히 좁아서 허 회장이랑 친분이 있거든. 직접 건일에 말해서 오해를 풀겠네.”
“누구도 재영공업에 불합리한 피해를 줄 수 없습니다. 재영공업은 완전한 독립업체인지라 누군가에게 휘둘리지도 매달리지도 않으니까요.”
그 부분에서 김태호는 확고했다.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재영공업은 그곳과 인연을 이어나갈 생각이 없었다.
* * *
허용무의 사무실은 적막에 감싸였다.
갑자기 불려온 건일자동차의 임원들은 모두 고개만 숙인 채로 아무런 말도 못했다.
몇 분의 침묵.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마저 또렷하게 들렸다.
“김태호 사장은 나조차도 존중하는 사람이야. 그런데 어째서 금일의 사건과 같은 일이 일어났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
허용무의 눈이 이경민에게 향했다.
이경민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감히 두 눈을 마주칠 수 없을 정도로 허용무의 날카로운 눈은 분노를 담았다.
“김 사장과 친분을 쌓으려고 격의 없는 대화를 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도한모터스가 접촉을 시도해서 필사적으로 막으려고 했습니다. 다른 의도는 없었습니다. 회장님.”
“서남부발전소는 물론 앱티드의 일도 도와준 사람이야. 그런 사람에게 하청업체 다루듯이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나? 김태호 사장이 고작 그 정도 가치야?”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사람 대 사람으로 가치를 봐야지 왜 자꾸 사람을 회사의 크기로 보는 게야!”
허용무는 모든 과정을 알게 되어 더없이 불쾌했다. 그 답답함은 어떤 말로도 해소할 수 없었다.
“김 사장에게는 나도 전화를 할 거야. 만약에 일이 틀어지면 각오해. 알겠나?”
“알겠습니다. 회장님. 정말로 죄송합니다.”
이경민은 연신 사죄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건일그룹을 아는 이들이라면 매번 놀랐다. 재영공업에게 하는 우대는 그 정도 수준이었다. 그랬기에 국내의 경쟁자들은 감히 재영공업에 접근하지 못했다.
만약 접근하더라도 도한모터스의 정한길처럼 조심스러워했었다.
이번 일의 여파가 컸다.
건일자동차와 건일ADOS의 성과를 본 승냥이들이 침을 줄줄 흘릴 것이다.
건일그룹은 컸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더 좋은 제의를 할 수 있는 곳도 많았다.
“재영공업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 우리와의 일을 계속 할 수 있는 방안을 생각해. 지금 당장.”
허용무는 자신의 직원들을 노려봤다.
사고는 칠 수 있다. 그걸 수습할 수 있어야 책임자였다. 적어도 임원자리에 올랐다면, 그런 능력 정도는 있었다.
“나가. 당장. 시간은 오래 주지 않는다.”
허용무는 그들을 모두 내보냈다. 우루루 나가는 이들을 보며 욕설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짙고 깊은 한숨이 나왔다.
그러자마자 걸려온 한 통의 전화는 양도한의 것이었다.
[이보게. 허 회장.]
“무슨 일이지? 양 회장.”
허용무는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했다.
[이런. 내가 김태호 사장과 만난 것이 벌써 귀에 들어 갔나보군.]
“···뭐? 정한길이 아니라 자네가?”
[음? 그것 때문에 기분이 나쁜 것이 아니었나?]
“갑자기 더 나빠지려고 하는군.”
이제는 참지 못한다.
허용무는 서랍에 넣어둔 담배를 태웠다.
도한모터스가 아닌 도한그룹 자체가 나섰다. 머리가 더 지끈거릴 수밖에 없었다.
[금연하지 않았나?]
“자네 때문에 다시 피는 거야. 병원비는 꼭 청구해두지.”
[그냥 넘어갈 것을 괜히 전화했구먼.]
양도한은 혀를 끌끌 찼다. 특유의 평온한 목소리는 더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김태호라는 젊은이가 참 마음에 들더군. 이번 기회에 좋은 인연이 생겼어. 왜 아끼는 줄 알겠더라고.]
“선전포고로 받겠다. 아무리 친분이 있어도 경쟁자에게는 절대 재영공업을 뺏기지 않을 테니까.”
허용무는 경쟁을 예고했다. 그가 날을 세우는 이유는 간단했다.
세상은 아직 재영공업의 진면모를 몰랐다.
건일ADOS쪽에서 괜히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맞춰주는 것이 아니었다.
절대 뺏겨서는 안 될 존재였다.
* * *
회사로 돌아온 후, 김태호는 상황을 정리했다.
먼저 허용무에게는 오해가 생기지 않게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허용무는 오히려 직원으로 인해 불편했을 점을 사과했다.
그 뒤에 온 이경민 사장의 전화도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를 했다.
“전화까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면 다음에 또 이야기를 하도록 하죠.”
그리고 건일ADOS와의 전화도 마무리했다.
건일ADOS는 혹시 수소 트럭이나 앱티드의 일정에도 문제가 생길까 봐 우려한 것이다.
이건 김태호로서도 의외였다. 이미 계약을 한 일이었다. 그 일들에 지장을 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내가 이 정도로 중요할 줄이야.”
김태호는 새삼 자신의 위치를 실감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이경민의 일은 예상보다 여파가 컸다. 기다렸다는 듯이 국내업체들의 제의가 쏟아진 것이다.
예전이라면 재영공업의 업무가 포화될 정도의 수준이었다.
이번에는 그런 일이 없었다.
그간 추가로 고용한 직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 업무들을 담당했다.
김태호는 정리된 내용만 검토할 생각이었다. 불필요한 것에 시간을 쏟을 필요가 없어진 것만 해도 엄청난 성장이었다.
그로 인해 보다 중요한 것에 집중할 수 있었다
바로 수소규제자유특구에 대한 것들이었다. 그곳에서 재영공업은 날개를 달게 될 터였다.
“수소연료전지의 자체제작까지 가야 해.”
궁극적인 목표. 그걸 위해서는 이대로는 안 되었다.
현실적인 재영공업의 규모를 고려하면 어떤 방식이 좋을까. 거기에 한참 고민에 빠질 때였다.
“사장님. 요청하신 업무 관련 자료입니다.”
직원 하나가 금일 올라온 업무제의를 정리해왔다.
김태호는 그걸 하나씩 훑었다. 수십 장의 문서 대부분은 금속분리판에 대한 제의뿐이었다. 그 진흙투성이 속에서 진주도 있었다.
바로 건일ADOS와 도한모터스 연구소 건이었다.
건일ADOS는 새 수소연료전지의 테스트였다. 전해질 관련해서 같이 실험하기를 원했다.
도한모터스 연구소는 수소규제자유특구에 시범운행을 할 수소 버스였다. 이건 수소연료전지의 조립이었다.
둘 다 좋은 일거리였다.
전자는 수소연료전지에 대한 학술적인 접근, 후자는 수소연료전지에 대한 실전적인 경험이었다.
문제는 이걸 수락하면 다른 추가적인 업무의 진행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어떤 그림인 줄 알겠네.”
두 거대그룹이 자신을 두고 벌이는 신경전임을 알았다. 일부러 자신이 흥미가 생길 일을 제의한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두 곳이 원하는 것은 결국 같겠지.”
지금은 환심을 사기 위한 제의일 뿐이었다.
결국 바라는 것은 금속분리판일 것이었다. 그건 확신할 수 있었다.
그들이 주는 제안만을 받으면 결국 벗어날 수 없다.
“그건 수소 트럭으로도 충분해.”
금속분리판 생산 일정은 이미 충분할 정도로 잡혀져 있었다.
김태호는 저번 양도한과의 대화를 상기했다. 단기간의 수익만 쫓아서는 꿈을 잊게 된다는 것이었다.
손해를 보더라도 감수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내 목표는 금속분리판이 아니야.”
금속분리판은 목표를 위한 과정일 뿐이었다.
현재에 만족해서는 안 되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 펼쳐진 수 많은 가능성을 잡아야만 했다.
고민 끝에 두 곳의 제안을 거절했다.
“앉아서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 돼. 진짜 원한다면 내가 움직여야지.”
언제부터 재영공업이 기다리기만 하던 곳이었던가.
김태호는 예전을 떠올렸다. 그때에 비하면 상상도 못할 정도로 성공했다.
거기에 취해 나태해진 것이 아니었을까.
“어느 순간 멈춰버렸어.”
수소연료전지 전체로 사업의 확장을 미루어서는 안 된다.
언제까지 준비되기만을 기다릴 것인가.
금속분리판을 제외하면 재영공업에 무엇이 있던가. 그나마 가스켓의 특허가 있었지만, 이것으로 만족할 생각은 없었다.
“다 잘못되었어. 내 방향성을 다시 잡아야 해.”
재영공업이 가진 체급의 한계. 거기서 오는 리스크에만 집착했다. 그래서 지극히 소극적으로 경영했다.
허영무가 경영에 대해 물어봤던 것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자신은 스스로 도태가 되는 길을 자연스럽게 택한 것이 아닐까.
“이렇게 웅크리고 있으면 아무것도 못해. 똑같은 것을 하다가 결국 뒤쳐지겠지.”
손해를 두려워할 위치가 아니었다.
재영공업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수익을 낼 수 있는 회사가 되었다.
금속분리판은 지금처럼 0.075mm 이하로 가공하기 위한 연구에 몰두하면 된다.
그 이외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
김태호는 그걸 찾아야만 했다.
“···이것부터 시작이야.”
그간 외면했던 걸 떠올렸다.
바로 가정용 수소발전소 사업이었다.
비대면 입찰로 수소규제자유특구에 속한 기업이 우선입찰대상자였다. 그랬기에 자신이 될 확률은 높았다.
전에는 재영공업의 것으로 만들어진 수소연료전지를 고집했다.
지금대로면 한세월이었다.
“수소연료전지 생산은 당장이라도 시도할 수 있어.”
성공하지 못했을 때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었다.
그랬다면 지금의 그는 없었다.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한 것도 그는 늘 해냈다. 타인의 상식을 초월하는 결과를 언제나 보였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것이 자신이었다.
그는 평범하지 않았다. 스스로도 아주 특별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남들과 같은 기준으로 자신을 보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러니 해보자. 당장.”
김태호는 의지를 불태웠다. 처음부터 필요한 것은 잊고 있었던 자신감뿐이었다.
오늘도 읽어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행복한 하루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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