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본 작품은 픽션이며 등장하는 인물 지명, 기관, 사건, 단체 및 직업 등은 실제와 어떠한 관련도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김태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양전문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이번에 수소규제자유특구가 생기는 것은 모르셨습니까?”
“규제자유특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게 천안쪽에 생기는 줄은 몰랐을 뿐이죠.”
김태호도 규제자유특구를 모르지는 않았다.
규제 완화 조치가 적용되어서 빠른 시장대응이 되는 곳이었다.
그가 놀란 것은 수소자유구제특구가 충청남도에서. 그것도 천안을 중심으로 된다는 점이었다.
“울산에 이미 있던 것으로 알아서요.”
수소연료전지 산업에 뛰어들면서 관련 정보는 익히 알았다.
울산이 멀리 떨어진 곳이라 얼마나 아쉬워했던가. 그 지리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이미 관련기업들이 포화되었기에 감히 생각도 못했었다.
금속분리판을 넘어 수소연료전지 전체를 원하는 그에게 너무나 좋은 기회였다.
“재영공업은 규모와 상관없이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금속분리판 기술을 가진 상징적인 회사입니다. 그러니 이런 기업이 중심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너무 얼굴에 금칠을 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저에게도 좋은 제안이군요.”
김태호는 이런 기회를 놓칠 생각은 없었다. 조감도를 포함한 간략한 사업개요를 더 살폈다. 긍정적인 입장이지만, 단번에 수락할 정도의 단계는 아니었다.
“저도 곧 출장이 끝나서 천안으로 돌아갈 겁니다. 그러면 그때 추가적으로 이야기를 더 나누시도록 하시죠.”
양전문은 슬쩍 시계에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행사시간이 코앞이었다.
김태호는 강현수 도지사와 함께 회의실로 향했다. 거기에는 이미 신문기자들과 방송국에서 촬영준비까지 마친 상태였다.
대상인 김태호는 자연스럽게 많은 포커싱을 받았다.
수상 후에 뒤에 물러난 상황에서도 종종 렌즈가 그를 담을 정도였다.
짧은 인터뷰까지 끝낸 후.
김태호는 손에 쥐어진 상장과 패를 어루만졌다. 이 묘한 감정은 도저히 설명할 수 없었다.
* * *
김태호는 몇 번의 미팅을 거쳤다.
심사숙고한 뒤에 결국 수소규제자유특구에 참여하기로 결정을 지었다.
충청남도의 수소에너지 규제자유특구 업무협약식 당일.
김태호는 건일ADOS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넥스트 에너지와 협상을 완료했고, 금일 관련 기사가 올라간다는 것이다.
그는 관련 공사를 위한 견적을 요청을 했다. 그 다음에야 충청남도청으로 이동을 했다.
협약식을 위해 모인 자리. 거기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중에서도 유독 목소리가 큰 이가 있었다.
“방금 전에 뉴스 보셨죠? 거기에 있는 그대로입니다. 본사와 넥스트 에너지가 협력해 수소 트럭을 만들 예정이죠!”
바로 건일자동차의 사장인 이경민이었다.
30분 전에 알려진 넥스트 에너지와의 소식을 고래고래 떠들어댔다.
두 회사의 협업은 워낙 큰 건이었다. 다들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막 입장한 김태호조차도 어리둥절할 정도의 분위기였다.
“넥스트 에너지랑 어떻게 그런 거래를 하신 거예요?”
“전부 제가 했죠. 초안부터 마지막까지!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해도 전 해내니까요!”
이경민의 어깨는 천장에 닿을 듯이 높아진 상황이었다.
모든 것이 자신의 공이라 떠들어댔다. 상황을 모르는 이들은 기계적인 감탄을 터트렸다.
이경민은 그러한 반응에서 자신감을 얻었다.
누군가가 김태호를 알아본 순간부터 이변은 일어났다. 다들 김태호에게 말을 걸기 바빴다.
‘저 놈이 또······.’
이경민은 눈을 흘겼다. 사람들의 관심을 한 눈에 가져가는 김태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첫 인상부터 별로였다.
회장인 허용무가 초대한 것도 모자라 단독으로 식사를 가졌었다.
그전부터 눈에 거슬렸다.
김태호가 건일ADOS와 너무 밀접했기 때문이다.
이경민은 건일자동차가 아니라 건일ADOS에 그룹이 힘을 실어주는 모양새가 불편했다. 그렇지 않아도 높아진 비중을 극에 달하게 만든 것이 김태호였다.
건일ADOS의 최근 위기 때마다 그가 나타나 기회로 만들어버렸다.
‘저놈만 아니면 최건우 따위가 감히 나와 눈도 마주치지 못할 텐데.’
굴러들어온 돌인 최건우. 그가 승승장구한 이유도 김태호였다.
‘반대로 내가 저놈을 포섭한다면?’
건일ADOS는 어떻게 될까.
이경민은 김태호가 매력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가 김태호에게 친근하게 굴었다.
“어서 와요. 김 사장! 오늘 뉴스 봤죠?”
“네. 봤습니다. 앞으로 이 사장님과의 일이 기대가 됩니다.”
반면에 김태호는 썩 달갑지 않았다.
갑자기 이경민이 친한 척을 하며 우악스럽게 어깨에 팔을 걸어댔기 때문이다. 무례한 스킨십을 좋아할 사람은 세상에 없었다.
“내 자리로 갑시다. 오느라 수고 많았어. 건일ADOS랑 일하면서 많이 답답하지?”
“전 괜찮습니다. 거기서 많이 배웠는걸요.”
이번이 두 번째 만남이었다. 그러나 제대로 대화를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런데도 자주 본 사이처럼 반말을 자연스럽게 섞어버리니 김태호는 이 모든 상황이 달갑지 않았다.
예전에 갑질을 했던 이들이 생각났다. 딱 이런 식으로 자신에게 무언가 이용 거리가 있을 때만 친한 척을 했다. 그게 지나면 하대를 하고 마지막에는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김태호의 우려는 정확했다.
이경민은 자리에 앉자마자 건일ADOS를 험담하기 시작했다. 모든 대화의 끝은 그들의 무능이었다. 중간중간 섞인 이간질은 덤이었다.
건일ADOS가 원래 건일자동차의 연구소에서 시작하였기에 자신은 다 알고 있다는 식이었다. 그러면서 은근히 자신이라면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다는 식으로 어필했다.
‘이 사람이랑은 엮이지 말자.’
김태호는 더이상 말을 섞기 싫었다. 그저 적당하게 대꾸만 했다.
대기업의 사장. 그렇기에 가지고 있던 선입견은 사라졌다. 사회에서 흔히 갑질만 일삼는 중년 남성이었다.
‘이 자리는 공적인 자리니까.’
재영공업에 해가 될 수 있는 언행은 최대한 삼가야만 했다.
그래서 참았다. 그렇지 않다면 이경민에게서 최대한 떨어졌을 것이다.
‘나도 제법 성장했네.’
그 불편한 심기를 표정에 드러내지 않고 있지 않은가.
이경민은 그걸 보고 자신의 뜻대로 되고 있다고 여겼는지 신이 나서 더 떠들어댔다. 자신이 이끌어줄 것이니 건일에서 같이 힘내자고 말이다.
‘힘드네. 오늘.’
김태호는 수소 트럭 때문에 이런 사람과 종종 만나야한다는 사실에 짜증이 났다.
협약식이 시작이 돼서야 숨을 돌렸다. 끝나면 회사로 도망칠 생각이었다.
“김태호 사장님. 전 도한모터스의 정한길이라고 합니다. 혹시 대화가 가능하실까요?”
협약식이 끝난 후.
도한모터스의 정한길이 정중하게 요청했다.
김태호로서는 의외였다.
건일자동차와 도한모터스. 둘은 자동차 업계의 유명한 라이벌이었다.
국내에서 먼저 수소차를 도입한 것은 도한모터스였다. 그 결과물도 썩 나쁘지 않았다. 오죽하면 건일자동차가 시대에 뒤떨어졌다라는 평가를 받게 만들었을까.
그 평가도 앱티드 이전까지였다.
앱티드가 이후, 평가는 역전되었다.
도한모터스가 현실에 안주하고 성장을 포기했다고 말이다.
그랬기에 도한모터스에게 김태호의 재영공업은 눈엣가시였을 터였다.
그러나 정한길은 무척이나 정중했다.
“어떤 용건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저희 도한모터스가 재영공업에 문의 드려도 되겠습니까? 혹시 불편하실까봐 이 자리를 빌어 여쭈려는 겁니다.”
“그건······.”
김태호가 답변하려는 순간.
“무슨 소립니까. 정 사장. 우리 건일의 협력사에게 어떻게 거래를 제의하실 수 있으시죠?”
옆에서 지켜보던 이경민이 대화 자체를 차단하려고 했다.
김태호는 이런 상황에 불편함을 느꼈다. 예의를 갖춘 정한길과 너무 비교가 되었다.
그는 끼어든 이경민에게 경고했다.
“신경을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만, 전 건일자동차가 아니라 건일ADOS와의 협력관계이지 않겠습니까. 이 부분은 제가 최 사장님한테 따로 이야기를 드리는 것이 맞지 않을까요?”
“뭐, 뭐요?”
이경민은 적잖게 당황했다. 감히 김태호가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다.
“도한모터스의 정 사장님. 귀사의 제의는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설비가 늘어날 예정이니 무리한 조건이 아니면 물량은 소화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군요. 그러면 재영공업과의 이야기는······.”
정한길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렇게 더 이야기를 하려는 순간.
“잠깐만. 김 사장! 수소 트럭 생산에 들어가면 우리 물량 소화하기도 벅차잖아. 도한모터스의 것도 하겠다고요?”
이경민으로서는 마른하늘의 날벼락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건일자동차의 사장인 그가 보고 있다. 그런데 도한모터스의 사장과 거래 이야기를 한다니!
세상에 이런 일은 없었다.
방금 전까지 말을 잘 듣던 놈이 이러는 이유를 몰랐다.
지금 상황이 허용무의 귀에 들어간다면?
모든 비난과 질책이 그에게 쏟아질 것이다.
“이런 자리에서 어렵게 말을 꺼내주신 저분과 대화조차 하지 않는 것은 굉장히 무례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김태호는 그런 실례를 저지르고 싶지 않았다. 거기다 아직 수소 트럭사업에 대한 정확한 일정과 견적도 받지 않았다.
이야기만이라면 문제가 없다.
“그러면 저와 차라도 한 잔 하시죠.”
정한길은 미소가 폈다.
건일자동차의 앱티드가 그토록 호평을 받은 이유가 무엇인가. 난항이었던 배터리의 개선 때문이었다.
김태호가 몇 번이고 기적을 선보인 것은 모두 알았다.
재영공업의 초라한 규모에도 수많은 기업들이 괜히 달려드는 것이 아니었다.
“크흠! 아무리 그래도 나라면 재영공업에게 정식적인 절차를 지킬 것 같은데.”
“정식제의라면 당연히 절차를 밟아야 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상담 정도라면 잠깐은 가능합니다. 저도 그렇게 꽉 막힌 사람은 아니라서요.”
“차보다는 차라리 나와 식사가 낫지 않겠나? 앞으로 많은 일을 할 것인데.”
이경민은 차마 포기하지 못했다.
결코 보낼 수 없었다.
“하아.”
끝내 김태호는 깊은 한숨을 참지 못했다.
왜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참견하려는 것일까.
재영공업은 건일그룹의 자회사가 아니었다. 또한 일방적으로 기대는 위치도 아니었다.
도한모터스 때문에 한 번은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아까 전부터 경영에 참견하지 말 것은 말하지 않았던가.
“전 불편한 자리는 가급적 피하는 편입니다. 건일자동차의 이경민 사장님과는 서로 존중하는 관계로만 남고 싶군요. 식사는 그때 하시죠. 맛있는 곳으로 대접하겠습니다.”
김태호는 정중하게 선을 그었다. 앞으로 필요한 것은 앞으로 건일ADOS와만 이야기하겠다고 못을 박으며 정한길과 떠났다.
정한길이 안내한 카페. 거기에는 흰머리가 지긋한 노신사가 앉아 있었다.
노신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김태호에게 손을 내밀었다.
“반갑네. 젊은 친구. 도한그룹의 양도한이라네.”
“···반갑습니다.”
김태호도 예상하지 못한 거물과의 만남이었다.
* * *
“그게 정말인가?”
허용무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갑자기 걸려온 이경민의 전화를 그만큼이나 충격적이었다.
[정말입니다! 같이 식사나 하자고 했는데 정한길이랑 나가버렸습니다. 혹시 도한그룹에 가려는 것이 아닐까요?]
“······.”
허용무는 생각에 잠겼다. 주름만큼 고민은 깊어졌다. 김태호를 본 것은 한 번 뿐이다.
모든 걸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그의 경험이 말했다. 하나는 확실했다. 김태호가 그렇게 경우 없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랬기에 허용무는 당시 상황을 캐묻기 시작했다.
‘뭔가 이상한데?’
대화가 거듭될수록 허용무는 위화감을 느꼈다.
그는 알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비서에게 명령해 현장에 있던 이들을 수소문해 당시 상황을 알아내게 했다.
대략적인 사태를 알 수 있었다.
“재영공업이 어떤 곳인데 다른 하청 다루듯이 한 거야!”
허용무로서는 열불이 터졌다.
김태호에 대해서는 잘 몰라도 이경민은 아니었다.
이경민은 아주 잘 알았다. 속된 말로 아랫사람들을 잘 누르는 사람이었다.
하청들이 찍소리 못하게 군기를 아주 제대로 잡았다.
문제는 대상이다.
재영공업은 일반적이지 않았다.
허용무조차도 김태호를 다른 거래처 사장처럼 대하지 않았다. 거기만큼은 절대 그래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경영에서 보듯이 김태호는 자신만의 선이 확실한 사람이었다.
“빌어먹을. 경쟁도 적당히 해야지!”
건일자동차와 건일ADOS의 분위기는 허용무가 용인하고 있었다.
경쟁이 없다면 결국 정체되기 때문이다.
이경민의 욕심도 그래서 긍정적으로 평가하고는 했다. 문제는 번지수가 단단히 틀려버렸다.
건일그룹은 재영공업의 경영에 강요할 수단이 없었다. 그들은 울타리의 양이 아니었다.
김태호의 마음먹기에 따라 수소 트럭의 프로젝트는 시작부터 큰 문제를 안고 시작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이 세상에서 김태호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김 사장이 그럴 사람은 아니지만······.”
사람은 모르는 일이다.
작은 불화가 쌓이고 곪으면 제국도 무너지는 법이다.
허용무는 당장 전화를 걸었다.
김태호는 받지 않았다. 몇 분 뒤에 다시 걸자 그제야 받았다.
[허 회장님. 지금 다른 분이랑 이야기 중이라서 다음에 전화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끊어버리니 대화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허용무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얼마나 진중한 대화면 저렇게 나온다는 말인가. 그는 건일자동차의 임직원 하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 받았습니다. 회장님. 어떤 용무이십니까.]
“내 아래. 네 위. 다 불러.”
[네?]
“지금 당장.”
허용무는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대책을 세워야만 했다.
오늘도 읽어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행복한 하루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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