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본 작품은 픽션이며 등장하는 인물 지명, 기관, 사건, 단체 및 직업 등은 실제와 어떠한 관련도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이론이 완성되었다면, 남은 것은 검증할 차례다.
김태호는 실험준비를 갖췄다. 인챈트 붓 6호를 꺼냈다. 수제먹물을 듬뿍 먹인 후, 이면지에 인챈트를 시작했다.
우우우웅!
인챈트는 여지없이 성공했다. 다만,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화려한 빛의 연회는 없었다.
전체적으로 줄어든 색의 조합은 짙고 어두운 색이 위주였다. 또한 문장이 울리면서 들리던 화음도 낮은 저음의 조화였었다.
마치 장엄한 행진곡 같았다.
김태호는 추가로 4장에 인챈트를 완성시켰다. 그러고는 돋보기로 표면을 살폈다.
“좋아. 완벽해.”
인챈트 문장의 위쪽.
5장의 종이에는 서로 다른 형태로 마나가 뭉쳐져 있었다.
이 인챈트의 효능은 바로 마나의 부착에 형태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이 문장을 조율하고 배합하면.”
마나로 된 글자들로 인챈트 문장을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일반적인 인챈트보다 성능은 훨씬 뛰어날 터였다. 심지어 남들에게 보이지 않았다. 기밀성이 높아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것뿐이라면 이번처럼 기뻐하지 않았을 것이다.
찌이이익!
김태호는 인챈트 된 종이 한 장을 찢었다. 인챈트 부분과 마나 글자가 서로 나눠졌다.
카드득.
인챈트 문장은 껍질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무너졌다.
그런데도 마나 글자는 형태를 잃지 않았다. 부착된 형상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었다.
김태호는 종이를 힘껏 흔들었다. 구겨지면서 부착된 마나 일부가 떨어졌다. 그대로 창가에 종이를 들고 갔다.
대기 중의 마나가 빈 부분에 그대로 부착이 되었다.
다시 온전한 형태로 복원된 것이다.
“내 이론은 틀리지 않았다!”
척추에서부터 시작되는 전율이 온몸으로 퍼졌다.
그의 깨달음의 진짜는 바로 이것이었다.
강제된 형태에 마나가 계속 부착됨으로써 인챈트가 반영구적으로 형성된다는 이론이었다.
실험은 그것이 끝이 아니다.
김태호는 다시 종이를 흔들어 마나를 떼어냈다. 그걸 밀폐용기에 넣어서 내구성을 확인했다.
창문도 닫아 대기로 들어오는 마나도 적어졌다.
밀폐공간에서 마나 글자는 약 1시간 동안 형태를 유지했다. 다른 인챈트 종이를 실험해도 비슷했다.
그 뒤에는 실전이었다.
철 조각에 내구성 강화, 성질 이전, 마나 글자 인챈트를 새겼다. 그걸 최초에 소재가 이송을 하다가 멈추게 되는 레일부에 설치했다.
“좋아. 시작해보자.”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계를 가동했다.
먼저 소재가 이송되었다. 성질 이전으로 표면에 마나 글자가 새겨졌다. 그건 내구성 강화의 문장이었다.
우우웅!
잇따른 인챈트로 소재에는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충만한 마나가 부착되었다.
꽈아아악!
지켜보던 그의 두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혹시 너무 내구성이 강해져 가공조차 안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기대어린 걱정도 될 정도였다.
그 우려는 다행히 빗나갔다.
금속분리판의 가공은 더없이 매끄러웠다.
“좋았어!”
결과를 확인한 그는 환호할 수밖에 없었다.
완성품은 더없이 완벽했다. 뜨거운 열기에 녹아내리던 마나는 여전히 차올랐다. 표면에 안착된 인챈트도 계속 유지가 되고 있었다.
그는 섬세한 손길로 표면을 어루만졌다. 문제가 되는 유로에서 크랙이나 스프링백 현상은 없었다.
측정기로 봐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완벽하다.
기세를 탄 김태호는 30개의 제품을 추가 생산했다.
모두 양품이었다.
그간의 고생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그저 환한 웃음만 새어 나왔다.
이 기쁨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 * *
건일그룹의 회장 허용무. 창립자인 아버지 허생의 대를 이은 건일의 2대 회장이었다. 그는 공격적인 사업운영으로 건일을 재계 10대 그룹으로 성장시켰다.
육십이 넘어 백발이 성성한 지금도 젊을 때처럼 혈기가 왕성했다. 특히 호랑이 같은 두 눈은 오히려 세월을 머금을수록 더 강렬해졌다.
그래서 건일그룹의 사람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허용무와 독대였다.
건일ADOS의 사장인 최건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평소와 달리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최 사장. 내가 왜 불렀을 것 같나.”
칼날 같은 눈빛이 최건우에게 쏟아졌다.
“수소배터리 건인 것 같습니다.”
“맞아. 그거야. 바로 그거.”
“지금부터 보고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래야지.”
허용무는 그 일에 관심이 많았다. 저번 백광석 연구소장의 보고로는 아주 많이 부족했다.
“현재 재영공업으로부터 금속분리판을 받았습니다. 스택으로 조립 이후에 검사 및 실험을······.”
“최 사장.”
허용무가 말을 끊었다.
최건우의 얼굴이 살짝 상기되었다.
“네! 회장님.”
“시간을 최대한 달라고 해서 줬다. 그런데도 아직 배터리 조립도 못 했다는 건가.”
“···양해해주신 일정 내로 끝낼 수 있습니다.”
최건우는 진땀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래도 보장받은 시간에 맞춰서 일은 진행되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허용무가 시간을 준다. 이것 자체가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다.
“적어도 시운전이 당장 가능해야 제품이 나오지 않겠나.”
“지금보다 더 일정을 당기겠습니다.”
그래도 최건우는 크게 불안하지 않았다.
악조건에도 물건은 훌륭하게 만들어졌다.
모두 김태호 덕분이었다.
허용무는 그런 모습이 흥미로웠다. 이번 수소자동차 관련되어 처음 보여주는 자신감이었다.
“바로 건일자동차에 넘겨. 이틀 뒤에 프로토타입을 가동 시킨다. 알겠나?”
“이, 이틀 뒤에 말이십니까?”
“그렇게 시간을 줘도 자신이 없나?”
“자신 있습니다. 회장님도 만족할 수 있는 결과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야지.”
사납던 허용무의 눈빛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이번 시범운전에 나도 참관한다. 백 연구소장은 물론 그 친구도 참가하라고 해.”
“그 친구라고 하시면······.”
“재영공업의 김태호. 그 친구 때문에 일정을 더 달라고 했었지. 딜레이 시켰으니 직접 봐야지.”
그리고 그의 호기심은 김태호에게 향했다.
김태호. 그의 존재는 나날이 높아지고 있다. 이번 기회에 얼굴이라도 봐둘 생각이었다.
“김 사장에게 말해두겠습니다.”
최건우는 고개를 숙인 후에 물러났다. 그러고는 돌아가는 차 안에서 김태호에게 전화를 했다.
* * *
“벌써 시범운전을 한다고요?”
김태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최건우와 했던 통화 중에서 가장 놀란 일이었다.
“그러면 연구소에서 실험을 끝낸 겁니까?”
[회장님께서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으십니다. 직접 보신다고 하셔서 일정이 급하게 잡혔습니다.]
“큰 걱정은 마시죠.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겁니다.”
일정이 당겨져도 김태호는 불안하지 않았다. 어차피 금속분리판에 문제는 없을 터였다.
건일ADOS의 일 처리를 생각하면 오히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은 건일자동차일 터였다.
[그보다 혹시 참관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참관 말입니까? 흐음.”
뒤에서 어떤 말이 오갔나.
김태호는 대충 알 것만 같았다.
건일그룹의 회장 허용무는 여러모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가죠.”
김태호는 고민하지 않았다.
자신의 결과물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다.
건일자동차와 건일ADOS가 정상적으로 시제품을 만들었다면 이변은 없었다.
스펙 이상의 성능을 보일 때.
과연 건일의 호랑이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랬기에 건일자동차로 향하는 김태호는 여유가 가득했다. 반면에 최건우나 백광석은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왜들 그렇게 좌불안석이세요. 걱정하시는 일은 없을 텐데.”
그는 두 사람을 안심시켰다. 어린 나이임에도 보이는 자신감에 그들도 조금은 긴장을 덜기 시작했다.
지정된 주행시험로. 거기에는 먼저 도착한 건일자동차의 이들이 있었다.
뒤에는 차량 하나가 보였다.
최초의 수소차량인 앱티드의 프로토 모델이었다.
‘실물을 보니 괜찮네.’
왜 디자인 부분에서 수정을 했는지도 이해가 되었다.
“최 사장. 오랜만입니다.”
“그러게요. 이 사장님.”
최건우는 건일자동차의 CEO 이경민과 반갑게 악수를 나눴다. 웃는 낯과 달리 둘은 썩 달가운 관계는 아니었다.
이번 프로젝트에서 벌인 신경전은 그룹 내부에서 유명했다.
“배터리에는 별문제가 없겠죠? 그렇게 일정을 연기시켰는데.”
“다 약속된 것을 억지로 바꾸지만 않았어도 벌써 출시했겠죠.”
그랬기에 웃으면서 나누는 대화는 결코 살갑지가 않았다.
둘에게서 나오는 분위기가 심해질 때.
“회장님, 어서 오십시오!”
건일그룹의 회장인 허용무의 차량이 들어왔다. 그걸 보자마자 주변의 이들이 우렁차게 소리치며 허리를 푹 숙였다.
정중하게 고개만 숙이는 김태호가 유독 도드라질 정도였다.
차에서 내린 허용무는 먼저 김태호에게 다가왔다. 그가 내미는 손을 김태호는 공손히 잡았다.
“자네가 재영공업의 김태호인가.”
“초대해주셔서 왔습니다. 오늘 기대하도록 하겠습니다.”
“두렵지는 않고?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면, 이 자리의 누군가는 목이 날아갈 것인데.”
어쩌면 그게 너일 수 있다.
허용무가 말하지 않았음에도 모두가 알 수 있었다.
“제 문제는 아닐 겁니다.”
건일의 호랑이. 그를 앞에 두고 김태호는 자신감에 넘쳤다. 그 원천은 작업자로서의 직감이었다.
주어진 조건에서 이보다 더 완벽한 것을 만들 수 없다는 직감!
“우리 건일이 이렇게 대우를 한 회사는 없었어. 이번 배터리에 자네가 힘을 많이 썼다지? 기대 하겠어.”
허용무는 등을 툭툭 치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회장님이 하청한테 저렇게 살갑게 대한다고?’
‘어쩐지 여기에 부르시더니.’
‘재영공업 때문에 일정을 미루어준 것이 맞구나.’
건일자동차 측은 그 상황이 못마땅했다. 불편한 시선을 고스란히 쏟아냈다.
김태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결과를 보인다면 누구도 저런 시선을 보낼 수 없다. 오히려 앱티드에 더 관심을 쏟았다.
허용무가 지켜보자 앱티드의 시동이 걸렸다. 그 뒤의 주행까지도 매끄럽게 이어졌다.
그 뒤에 다들 상황실로 이동했다.
안에는 각 주행 시험로마다 설치된 CCTV로 한창 주행 중인 차량이 보였다. 거기에서 실시간으로 나오는 데이터는 고스란히 기록이 되고 있었다.
정상적으로 데이터가 누적되고 있음에 최건우와 백광석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여기에서 문제라도 생기면 그 뒤는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건일자동차도 안정적인 주행에 집중했다.
1시간 정도 진행되자 허용무는 자리를 비웠다.
옆 회의실로 가서 업무를 보며 상황만 보고 받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부터 상황실의 분위기는 편해졌다.
“다행이군요. 아직까지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김 사장님이 잘 가공한 덕분이죠.”
최건우와 백광석은 자연스럽게 김태호를 추켜세웠다.
강제로 줄여야만 했던 배터리의 크기. 단기간에 그걸 맞출 수 있던 것은 오로지 김태호의 능력이었다.
100km의 속도로 달리던 차가 어느새 5시간을 넘었다. 530km 정도가 나오자 건일자동차측에서는 슬슬 마무리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이 짧은 시간에 제작한 배터리로는 600km의 주행거리도 내지 못한다고 생각한 터였다.
“두 분은 가만히 있으셔도 됩니다. 퇴근하려면 1시간은 남았으니까.”
김태호는 동요하는 최건우와 백광석에게 말했다. 의아해하는 둘에게 그는 CCTV를 가리켰다.
“뭐야! 결국 주행거리를 넘었잖아!”
“그런데도 멈추지 않는데요?”
“맙소사. 뭐냐고! 왜 아직 달리는 거야!”
주행이 6시간을 넘기 시작하자 건일자동차측은 경악하기 시작했다.
최종수정된 최대주행거리는 600km였다. 앱티드는 그걸 넘어서고 있었다.
620km를 넘고 660km까지 닿는 순간, 상황실은 혼돈에 빠졌다.
이런 스펙이 나오는 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라 판단해서다.
“최 사장! 우리에게 배터리 스펙을 속인 거야?”
“글쎄요?”
건일자동차의 이경민 사장이 목소리를 높였다. 최건우는 얄밉게도 어깨만 으쓱했다.
쾅!
그때 상황실의 문이 열렸다.
허용우가 상기된 안색으로 들어온 것이다.
“계속 진행해. 끝까지 지켜볼 테니까.”
허용무는 이번 주행을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냉정하게 가동만 되더라도 만족할 생각이었다.
그랬기에 그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멈출 줄 모르던 앱티드는 끝내 724km에서 기록을 끝냈다.
짝! 짝! 짝!
“잘 했다. 훌륭하군.”
박수를 치는 허용무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최 사장, 백 소장. 저 배터리는 어떻게 된 거야?”
“기존의 스팩에서 금속분리판의 두께를 중심으로 줄였습니다.”
“저희도 이런 결과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답을 하는 최건우와 백광석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한 사람에게 향했다.
바로 김태호였다.
“진짜 저 친구 때문이라고?”
“말도 안 돼. 금속분리판 하나 때문이야?”
“이건 말이 안 되잖아.”
건일자동차쪽은 이해할 수 없었다.
김태호라는 존재. 그가 일으키는 이변을 건일ADOS만 당연하게 여겼다.
허용무도 시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김태호 사장. 이 결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고작 724km라 아쉽네요. 처음부터 스펙을 수정하지 않고 갔으면 800km도 가능했을 겁니다.”
김태호는 스펙이 바뀐 이유를 잘 알았다. 그랬기에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
상황실은 순간 침묵에 빠졌다. 아직도 그만이 CCTV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건일ADOS도 0.1mm를 못 만들었네. PAL과 그렇게 차이가 많이 나는가.”
“걸음마 단계인 건일ADOS는 믿을 수 없는 결과물을 내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다 자네가 있지.”
“맞습니다. 누구도 대체할 수 없다. 그렇기에 절 초대하신 것이잖습니까.”
김태호는 겸양을 떨지 않았다. 담백하게 사실만 말했다.
“둘이서 식사나 하지.”
허용무가 식사 제안을 했다.
건일의 호랑이가 햇병아리와 독대를 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 아니었다.
“기꺼이 시간을 내드리죠.”
그랬기에 김태호도 거부하지 않았다.
오늘도 읽어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행복한 하루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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