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본 작품은 픽션이며 등장하는 인물 지명, 기관, 사건, 단체 및 직업 등은 실제와 어떠한 관련도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학술회의 시간도 있으니 오랜 시간은 할애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괜찮으십니까?”
“먼저 대화를 할 수 있음에 만족합니다. 대화가 길어야만 마음이 통하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맞는 말씀이십니다. 먼 곳에서 온 분들과는 한 번씩 대화를 해보고 싶었거든요.”
김태호는 벤과 함께 회장을 나갔다.
이번 학술회의는 그저 지식을 쌓기 위한 곳이 아니었다.
그의 목표는 세계였다.
미래의 경쟁자들이 보는 자신의 가치가 궁금해졌다.
학술회의의 후원이 오로지 그를 만나기 위한 것인 이상, 그럴 자격은 충분하다 생각했다.
‘공격적인 회사인수로 자동차 업계에 진입해서 폭풍적인 성장을 이루었지.’
김태호는 후원사들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는 모조리 머리에 담아둔 상태였다.
넥스트 에너지는 전기배터리와 수소배터리의 투 트랙으로 자동차 시장에 변화를 주고 있었다.
이번 학술회의의 후원사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큰 곳이었다.
회장 근처의 공원. 인적이 드물어진 벤치에 두 사람은 앉았다.
김태호는 이야기를 나눌수록 감탄했다.
목소리만 들으면 벤은 외국인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현지인 같은 유창한 발음은 물론 다른 문화권에서 오는 말실수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정말 이야기만 하려고 온 것은 아닐 텐데.’
학술회의가 할 시간이 점점 다가왔다.
테이블이 없는 협상자리다. 초조해야 할 것은 벤이었다. 그가 언제 본론으로 넘어가나 궁금해졌다.
“사람 대 사람으로서 이번 일은 안타까웠습니다. 모든 걸 해내신 것은 김태호 사장님인데, 언론들은 다른 분을 주목하더군요.”
드디어 벤이 본색을 드러냈다.
시작은 자극적인 말이었다. 김태호가 불만을 품었다면, 흔들렸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메인은 그 소재였습니다. 제가 주목을 받아서는 안 되죠.”
“아뇨. 당신의 특허와 기술이 없었다면, 절대로 그런 결과가 나올 수 없었습니다.”
벤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번 실험결과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김태호는 경청할 수밖에 없었다.
넥스트 에너지는 그의 생각보다 너무나 많은 것을 조사했었다.
객관적인 시선에서 재영공업은 말이 안 되는 회사였다.
‘내 특허를 제대로 구현 못 했다고?’
가스켓 제작에 대해서는 예상외였다. 그가 심혈을 기울여서 제작한 것은 맞았다.
그러나 넥스트 에너지가 제대로 구현하지 못할 줄은 몰랐다.
‘금속분리판은 10년 전에나 쓰던 거였다니!’
어디 그것뿐인가.
금속분리판 부분에서는 깜짝 놀랐다.
넥스트 에너지의 기술은 한국의 어떤 기업들도 따라갈 수 없는 수준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건일ADOS의 경우 몇 년이나 차이가 나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만약 내가 넥스트 에너지의 초박형 금속분리판을 가공한다면?’
이미 10년의 시간을 따라잡았다. 그렇다면 10년을 앞서게 되지 않을까.
‘아니면 그 이상일 수도 있다.’
그조차도 감히 속단할 수 없었다.
하나는 확실했다.
세상을 발칵 뒤집을 수 있었다.
‘그러니 궁금하겠지.’
첨단기술로 점철된 넥스트 에너지의 연구소도 쫓아갈 수 없는 비밀.
왜 수많은 후원사들이 한국에 밀집했는지 알 것 같았다.
‘반대로 나였어도 올 수밖에 없다.’
김태호가 알기로도 세상에 이런 기술력을 가진 업체가 존재할 수는 없을 터였다.
유일무이한 지식. 그 값어치는 감히 돈 따위로 매기지 못했다.
“과찬입니다. 남들보다 가공에 더 자신이 있을 뿐이죠.”
“본사라면 당신의 역량을 더 성장시킬 수 있습니다.”
벤은 강력하게 어필하기 시작했다. 그는 재영공업이 가진 한계점에 대해 집중했다. 회사를 혼자서 지탱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김태호가 아무리 고군분투를 해도 구조적인 문제는 탈피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본사는 재영공업이 바라는 모든 것을 지원할 수 있습니다. 재영공업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회사를 키우도록 최대한 도와드리겠습니다. 또한, 그 과정에서 절대로 경영에 참여하지도 않을 겁니다.”
“직접 찾아오셔서 말씀을 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바로 결정할 수 없으니 아쉽네요. 시간이 더 많았으면 좋았을 겁니다.”
김태호는 적당한 선에서 대화를 끊었다. 벤의 말은 더 이상 그의 흥미를 끌 수 없었다.
‘결국, 몇 번이나 온 제안서랑 다를 바가 없는 내용이야.’
다른 점이라면 경영에 대한 안전성과 백지수표라는 점이었다.
김태호가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른 회사도 이런 대화뿐이라면, 굳이 시간을 쓸 필요는 없어 보였다.
* * *
끼이익.
안내요원들이 닫혀있던 문을 열었다. 약간은 소란스러웠던 회장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다들 떠들던 입을 다물었다.
서로를 보던 눈도 거두었다.
모든 눈과 귀가 김태호와 벤에게로 향했다.
“재영공업이 관심을 가질 정도면 무슨 제의가 온 걸까.”
“다른 후원사들 똥줄 타겠는데.”
“그건 건일ADOS가 아니고?”
“건일그룹이 그렇게 대우한 것을 보면 모르지.”
주변을 지나갈 때마다 그런 말들이 들렸다.
벤이 자리에 앉자 경쟁자들의 불편한 시선이 쏟아졌다. 이미 그들끼리의 경쟁은 시작되었다.
김태호의 자리는 다른 의미로 숨이 막혔다.
같은 테이블에 한국연료전지협회장을 비롯한 간부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 협회장의 사람들이었다.
다들 김태호를 썩 반기지도 않았다.
그로 인한 후원은 좋다.
하지만 20대 청년의 들러리가 된 상황이었다.
이걸 반기지는 않았다.
“저 때문에 괜한 소란이 일어났던 것에 먼저 사과드리겠습니다. 협회장님.”
“크흠! 이야기는 잘 끝났어요? 회장이 계속 시끄럽던데.”
“배려해주신 덕분에 일단 대화는 나눴습니다.”
“후원사들이 김 사장을 하도 찾던지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어요. 여기에 초대한 것도 특혜입니다. 특혜.”
“전부터 나온 비즈니스 이야기였습니다. 다음에 사석에서 상담이라도 부탁드리겠습니다.”
김태호는 굳이 협회장에게 날을 세우지 않았다.
서문철의 파벌?
그건 상대의 오해일 뿐이었다.
그는 굳이 협회장과 신경전을 벌일 생각이 없었다.
계속 협회의 행사에 참여하려고 한 것도 더 많은 정보와 수준 높은 지식을 얻기 위해서일 뿐이었다.
나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협회장의 간단한 축사와 함께 논문발표가 시작이 되었다.
이번 주제는 GDL의 국산화에 대한 것이었다.
GDL은 가스확산층의 약어로 수소연료전지의 핵심 부품이었다. 여기에는 탄소섬유가 기본적으로 들어갔기에 김태호가 잘 모르던 분야였다.
김태호는 모든 신경을 거기에 쏟았다.
발표 후, 모르는 것은 질문으로 지식의 공백을 채워갔다.
뒤이어진 토론에서도 같은 자리에 앉은 협회장을 비롯한 이들에게 먼저 질문을 하며 배워나갔다.
다들 국내에서 알아주는 전문가들이었다. 질문을 하는 족족 양질의 답변을 해줬다.
김태호에게는 값진 시간이었다. 그는 더없이 열정적인 학생이 되었다.
‘그래. 이게 학술회의지.’
모르던 것을 하나씩 배워간다. 그 희열은 한 분야에 미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쾌락이었다.
“김 사장은 아주 배우는 자세가 되었구먼.”
“젊어서 성공한 친구라고는 믿기 힘들어. 아주 바른 자세야.”
“그리고 아주 똑똑해.”
“우리 학생이면 연구실에 데려다 놨을 텐데.”
같은 자리의 이들은 코앞에서 지켜봤다. 연륜이 쌓인 만큼, 그의 태도가 거짓이 아님을 알아봤다.
김태호에게 입이 마르도록 칭찬해도 아깝지 않았다.
서문철의 파벌이라는 생각도 머리에서 지워졌다.
장래가 유망한 젊은 인재가 그저 기특할 뿐이었다.
배움의 재미와 그 값어치를 아는 사람을 찾기란 하늘의 별을 따는 것과 같았다.
‘우리는 언제부터 배움에 느슨했던가.’
색안경을 끼고 김태호를 본 것이 절로 민망해졌다.
“김 사장이 아들 같아서 하는 말이에요. 다른 기업들이랑 이야기를 해도 쉽게 결정은 내리지 마요. 최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신중하게 해야 합니다.”
“맞습니다. 해외기업들과 말이 맞지 않으면 우리에게 말해요. 차라리 다른 곳에 소개를 시켜줄 테니까.”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민폐만 끼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학술회의가 끝날 즈음에는 누구보다 김태호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후원사들은 승냥이 떼처럼 보였다.
후원사들을 비롯한 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표는 김태호였다.
“다들 질서를 지키세요. 귀빈들이 있는 곳인데 뭐 하는 겁니까. 학술회의 때문에 사람 한 명 괴롭히지 맙시다.”
그때 협회장이 나섰다.
단 한 명을 둘러싸고 수십 명이 달라붙으려는 꼴은 우스울 수밖에 없었다.
다들 얼굴을 붉혔다.
“협회장님,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김 사장도 사람이 너무 착해. 서울까지 올라왔는데 다들 저러니, 쯧쯧.”
“저야 그만큼 찾아주니 감사하죠.”
김태호는 오히려 이런 상황을 반겼다.
경쟁이 커질수록 저들은 더 많은 것을 그에게 쥐여주려고 할 터였다.
“괜찮다면 외국에서 먼저 오신 후원사 분들과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다른 분들은 차후에 미팅을 가지는 것은 어떨까요. 제가 협회의 행사에는 자주 참여할 것이라서 그게 더 편하실 겁니다.”
하지만 그도 인간이었다.
하루 만에 수십 명의 사람들과 비즈니스를 논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를 가장 원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맞았다.
“맞아요. 오늘만 날이 아닙니다. 우리 김 사장은 앞으로도 자주 올 거니까 그때 이야기를 하는 것이 더 나을 겁니다. 사업 이야기가 어디 하루 만에 됩니까?”
협회장부터 그렇게 말하니 후원사를 제외한 이들은 어쩔 수 없이 물러났다.
회장은 점점 사람이 줄어들었다.
김태호는 후원사들의 일정을 먼저 체크했다. 체류기간이 가장 짧은 이들부터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나머지는 이삼일 동안 서울에 머물면서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결론을 지었다.
회사를 이틀 이상 비우지 않는 그로서는 엄청난 결심이었다.
* * *
학술회의 시작 전부터 끝났을 때까지.
후원사로 참여한 이들에게 김태호의 모습은 여러모로 인상적이었다.
김태호는 20대의 젊은 나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수 많은 사람들을 대하는 모습은 과연 작은 기업의 CEO가 맞는가 싶었다.
어릴 때부터 경영수업을 받은 재벌집 아들 같았다.
‘진짜 20대가 맞는 건가?’
‘경쟁사가 문제가 아니라 김태호와의 거래부터 힘들겠구나.’
‘젊은 사람이 저러기는 힘든데.’
순번을 배정받고 물러나는 이들은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에서 복잡한 표정을 짓는 이도 있었다.
두 번째 미팅 상대인 알파퓨얼셀쪽이었다.
넥스트 에너지의 경쟁사로 발전소와 같은 시설에 수소연료전지를 공급해왔다.
수소연료전지 사업만이라면 넥스트 에너지에 모자랄 것도 없었다.
‘쉽지 않겠어. 더 조사가 필요했나.’
알파퓨얼셀의 직원은 근처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협회의 이들과 인사를 끝낸 김태호가 뒤이어 도착했다.
“오래 기다리셨죠?”
“아닙니다. 저도 곧 왔습니다.”
알파퓨얼셀의 직원은 커피를 마시며 편하게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 뒤에 자신들의 비전을 말했다.
김태호가 자신들과 함께하면 무엇을 지원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김태호는 마시던 찻잔을 내려놨다.
“전부 넥스트 에너지가 말한 것과 같군요.”
“···네?”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똑같은 이야기만 오늘 두 번 째입니다.”
그의 말이 허를 찔렀다.
벙찐 표정의 상대에게 그는 이어 말했다.
“부족한 인프라를 늘려주겠다. 투자를 얼마든지 해주겠다. 이건 몇 달 전부터 귀사를 비롯한 수많은 업체가 한 제안입니다. 제가 귀사에 정말로 필요했고,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굳이 자리에서까지 똑같은 말만 하시지는 않았을 겁니다. 앞서 말 하신 것들은 언제라도 얻을 수 있으니까요.”
“······.”
알파퓨얼셀의 직원은 마른침을 삼켰다. 앞서 언급한 것들은 회사에서 줄 수 있는 엄청난 제의였다.
‘물욕이 없는 건가?’
도저히 말이 되지 않았다.
재영공업에게 있어서 이건 엄청난 제의였다. 이들보다 훨씬 큰 기업이라도 혹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다.
“알파퓨얼셀만이 저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렇기에 김태호의 질문은 그의 입을 막아버렸다.
김태호는 무엇을 원하는가!
알파퓨얼셀의 직원은 오히려 묻고 싶었다.
오늘도 읽어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행복한 하루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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