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본 작품은 픽션이며 등장하는 인물 지명, 기관, 사건, 단체 및 직업 등은 실제와 어떠한 관련도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네? 이번 주에 회의요?”
서문철이 전한 소식. 그걸 듣자마자 김태호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네. 김 사장님이 보인 기술력이라면 당장 진행해도 무방한 것 같아서요.]
“가스켓 결과가 그렇게 좋았나요?”
[예. 정말 훌륭했습니다. 보고서의 주제도 그렇고 제가 바라던 것과 일치하더군요.]
서문철의 목소리는 격앙되어 있었다. 그는 어떤 부분에서 부르게 되었는지 상세하게 설명해주었다.
“그렇군요. 국책과제가 그쪽이었군요.”
이건 김태호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서문철이 어떤 국책과제를 수행하는 것인지 그동안은 정확하게 전달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네! 그래서 너무 기쁩니다. 우리 김 사장님 덕분에 드디어 성과를 보일 수 있게 되었어요!]
“더 배우고 싶었는데 바로 국책 과제로 가는 것은 아쉽네요.”
다만, 아쉬움도 따랐다.
아직 서문철에게 배우는 단계였기 때문이다.
[끝나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그 동안에 계속 교육은 할 겁니다. 거기다가 한 번으로 끝날 인연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그렇죠. 제 스승님이신데.”
[아하하. 그렇게 불러주시니 감사합니다. 제가 몸둘 바를 모르겠네요.]
김태호는 비록 음성통화지만 서문철의 입이 귀에 걸렸을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러면 국책 과제 관련한 자료는 지금 받아볼 수 있을까요? 미팅 전에 최소한의 공부는 하고 싶어서요.”
[물론입니다. 바로 보내겠습니다. 김 사장님.]
“네.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자신의 결과물이 상대를 기쁘게 했다. 그건 장인정신을 가진 자로서 더없이 만족스러운 일이었다.
국책 과제를 읽어본 후, 왜 서문철이 그런 반응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백광철이 이래서 소개를 해준 것인가 싶었다.
미팅 날은 광양으로 이동했다.
광양공업대학교의 R&D센터. 2층의 회의실로 김태호는 올라갔다. 그중 하나에는 서문철 교수의 이름으로 빌려진 곳이 있었다.
205호.
김태호는 문을 두드리고 들어갔다.
그보다 나이가 많은 중년의 사내 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서문철 교수님 관련해서 모이신 것 맞으시죠?”
“아. 네. 맞아요.”
“새로운 조교인가봐요?”
중년의 사내들은 나이가 어린 김태호를 그렇게 판단했다.
‘내 이야기는 미리 안 하셨나보구나.’
김태호는 조금은 긴장을 덜고 자기소개를 했다.
“이번에 합류하게 된 김태호라고 합니다.”
“김태호? 어? 설마 재영공업?”
“재영공업의 김 사장님?”
김태호. 그 이름 석 자에 두 사내는 격한 반응을 보였다. 그만큼 재영공업과 김태호는 뜨거운 감자였다.
업계 관계자라면 모를 수 없었다.
“드디어 이 국책 과제를 끝낼 수 있겠네요!”
“재영공업이라니. 너무 든든하네!”
“가, 감사합니다.”
예상 밖의 반응에 김태호는 조금은 부끄러워졌다.
“우리 김 사장님은 서있지 말고 앉아요.”
“맞아. 서 교수가 오기 전에 편하게 이야기나 나눕시다.”
둘은 김태호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리고 재영공업과 김태호에 대해 물어보기 시작했다.
최근에 있던 서남부발전소 시공식부터 시작해 건일ADOS의 테스트까지 모두 물어볼 기세였다. 그중에서 가장 집중적인 것은 재영공업은 어떻게 금속분리판을 그렇게 가공할 수 있냐는 것이었다.
“건일ADOS쪽에서 충분한 자료를 제공해서 그렇죠. 그게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습니다.”
김태호는 굳이 자신을 부각시키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주변의 모든 이가 그의 특별함을 알고 있었으니까.
“건일ADOS의 자료가 친절하다고요? 그거 아니던데.”
“맞아. 그 협력사 테스트 자료도 보기 힘들게 되어있었는데.”
“그냥 김 사장님이 잘해서 그런 가보다. 우린 영어는 영 못해서,”
“맞아. 우리 수준에서는 힘든 거겠지. 직원들이 봐도 힘들어하던데.”
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각자 건일ADOS의 테스트에 참가를 했지만, 1차도 붙지 못하고 떨어졌었다고 밝혔다.
김태호는 그 차이를 알 것 같았다. 당시 건일ADOS의 자료는 영문이었다. 반면에 서문철은 한글로 보내줬다. 중요한 단어만 영어로 되어있을 뿐이다.
딱 그 차이였다.
‘확실히 전문적인 내용을 아무렇지 않게 해석할 직원은 적지.’
어릴 때부터 영어를 배웠지만, 결국 수능과 취직을 위한 도구였을 뿐이다.
막상 업무에 쓰려면 버벅이는 경우가 많았다.
김태호도 마찬가지였고 비슷한 규모를 가진 회사의 직원들도 그랬다.
인챈트 공부로 머리가 트이지 않았다면, 건일ADOS의 테스트에서 저 둘처럼 떨어졌을 것이다.
“세 분이서 많이 친해지셨나 봅니다.”
대화가 더 이어지려고 할 때.
서문철과 조교가 들어왔다.
조교는 들고 온 자료를 나눠주고 물러났다.
그 사이에 서문철은 컴퓨터를 켜고 PPT를 열어 현재 과제에 대한 것을 설명해나갔다.
2년 전부터 준비한 국책은 꾸준히 진행 중이었다. 핵심인 하이브리드 소재의 개발이 드디어 막바지였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소재의 효과를 최대로 끌어올리기 위해 금속분리판과 가스켓에 변동을 준 것이다.
기존의 업체는 서문철이 요구하는 수준의 가공이 불가능했다. 애초에 그 업체도 건일ADOS의 1차 테스트에서 떨어진 곳이었다.
과제는 오리무중 상태에 빠졌었다.
새로운 업체를 구하기란 쉽지 않았다.
금속분리판 자체를 가공할 수 있는 수준의 업체가 극히 드물었을 뿐더러, 그게 가능한 이들은 굳이 서문철의 국책과제를 도울 필요가 없었다.
그랬기에 재영공업은 하늘이 준 선물이었다.
“두 분은 괜찮으시죠?”
서문철은 다른 두 업체의 반응을 살폈다.
금속분리판은 성공만 한다면 높은 수익을 낼 수 있었다. 그러니 은근히 욕심을 내고는 했었다.
“물론입니다. 이러면 누가 반대하겠습니까.”
“맞아. 재영공업이 있는데 거길 도전할 이유가 없지.”
그 빈자리에 재영공업이 나타났다.
둘은 반대하지 않았다. 아니, 반대할 수 없었다.
재영공업의 문제는 작은 규모 뿐이었다.
현재 그들보다 금속분리판을 잘 가공할 수 있는 곳은 손가락 안에 든다는 것이 업계의 평이었다.
“그리고 가스켓도 재영공업이 맡을 겁니다. 뒤에 보시면 자료가 있으니 다들 한 번 읽어보시죠.”
서문철의 말에 다들 앞에 놓인 자료들을 읽었다.
“과연. 제 예상대로 데이터가 좋게 나왔네요.”
체계적으로 수치화가 된 자료에 김태호는 흡족함을 감추지 못했다.
두 개의 가스켓이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졌고, 기존의 모델과 비교해 어떤 데이터를 보였는지 일목요연하게 시각화되어 있었다.
“과연! 금속분리판을 하니까 더 쉽게 만들 수 있는 것인가?”
“재영공업은 진짜 무섭군요. 어떻게 가스켓까지 잘 만드는 거지? 금형도 자체제작입니까?”
다른 이들도 쉽사리 납득을 못해 심각해졌다.
왜 재영공업과 거래를 해본 이들이 극찬을 하는 것인지 알 것 같았다.
“그러면 이제 각자 맡으실 파트에 대한 부분의 설명에 들어가겠습니다.”
파트 정리가 되었으니 서문철은 지금 진행해야할 부분들을 설명했다.
* * *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먼 길을 오셨는데, 같이 저녁이나 드실까요?”
회의가 끝난 후.
서문철은 식사제의를 했다.
“좋죠. 다 모였는데 술도 한 잔 곁들여야죠.”
“맞아요. 맞아. 언제 또 모이겠어요.”
자연스럽게 회식으로 분위기가 잡혔다.
“김 사장님은요?”
“이런 자리는 빠질 수 없죠.”
김태호는 유흥을 즐기지 않는 편이었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굳이 참석하지도 않았다.
예외라면 지금 같은 경우였다.
서문철이 안내한 곳은 한정식집이었다. 정갈한 맛에 조용하고 따듯한 분위기였다. 손님들의 높은 연령대가 오히려 편안하게 보이는 곳이었다.
그래서인지 대화는 이번 국책 과제에 대한 것을 중심으로 흘렀다.
2차의 술집에서는 술잔이 비어지자 주제 또한 자연스럽게 바뀌어 갔다.
“요즘 원자재 가격이 너무 올랐어요. 그런데도 단가를 후려치니까 죽겠다니까?”
“인정합니다. 갑이 괜히 갑이 아니라니까요. 매출 유지하려니까 죽겠어요.”
두 명의 사장들은 취기와 함께 한탄을 털어놨다.
“확실히 심하죠. 특히 작은 회사일수록 모든 사람의 눈치를 봐야 하니까요.”
김태호도 십분 공감하는 바였다.
같은 중소기업이라고 다 같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위에 있다면, 상대를 철저하게 무시하는 곳이 많았다.
재영공업이 그 철저한 을이었다.
그때 당한 갑질은 어젯밤의 일처럼 생생했다. 지금의 모든 순간이 하룻밤의 꿈처럼 사라질까봐 불안하기도 했다.
“재영공업한테 누가 갑질해요. 지금 건일ADOS도 못 건드리는 슈퍼 을이잖아요.”
“맞아. 이번에 서남부발전소 건으로 건일ADOS가 몇십 억은 아꼈다던데.”
돌아오는 것은 다른 둘의 부러움에 가득 찬 눈빛이었다.
실제로 재영공업은 작디작은 기업들의 희망이었다. 건일ADOS가 포장한 신데릴라 스토리는 허상 따위가 아니었다.
다른 점이라면 하나.
재영공업은 왕자가 준 유리구두를 신지 않았다. 왕자의 무도회에 자신의 다이아몬드 구두를 신고 나타난 것이다.
“재영공업은 이번에 얼마나 벌었어요? 건일ADOS가 두둑이 줬다던데.”
“미정인가 마정산업단지로 이전했다면서요. 부지가 그렇게 넓어요?”
두 사장은 연거푸 질문을 던졌다.
김태호가 입을 다물려고 해도 오로지 그에게만 관심이 쏟아졌다. 도움을 요청할 겸해서 서문철에게 시선을 보냈다.
“크흠. 그런데 재영공업이 얼마나 많은 투자제안이 왔던 겁니까?”
궁금했던 것은 서문철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가십거리에 기름을 붙여버렸다.
“아. 맞아. 그 소문의 J공업!”
“거기 재영공업이잖아요.”
“···뭐. 그렇죠.”
김태호는 어색하게 웃었다. 이제는 어쩔 수 없이 다 대답해야만 하는 분위기였다.
그는 혹여 자기과시처럼 보일까봐 조심스럽게 말했다.
“처음에는 규모가 그렇게 크지도 많지도 않았어요. 말씀하신 그 J공업 기사 이후부터 커졌죠.”
잠깐 말을 끊었다.
목이 말라 물을 마시는 동안, 나머지 셋은 그만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때는 삼백억대의 투자가 몇 곳이 있었죠.”
“사, 삼백억대요?”
“맙소사. 그게 몇 군데나?”
“엄청나네요.”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누구나 욕심이 나는 액수였다. 자신의 인생뿐만 아니라 몇 대에 걸쳐서 떵떵거리며 살 금액이었다.
“서, 설마 그거 거부한 겁니까?”
“김 사장도 사람인데. 지분이라면 넘길 만은 하지.”
“결과가 어떻게 된 거죠?”
셋은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김태호는 분명히 인수가 아니라 투자라고 했었다.
“다 거부했습니다.”
“······.”
그랬기에 모두 경악했다.
소리가 없는 비명에 김태호는 차라리 편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지분 이야기가 나왔는데 제 경영권을 해치지 않는 조건도 있었죠. 그쪽이 더 조건이 후했던 것 같아요. 인수 쪽으로는 아예 건일ADOS의 경쟁 업체나 대기업도 제의가 오더라고요. 그런 경우가 의외로 제의가 작았죠,”
“그, 그것도 설마······.”
“거절했습니다. 모두.”
김태호는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목숨을 걸면서까지 지키려고 한 곳이니까.’
재영공업의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었다.
“뭐든지 과하면 좋지 않다고 그 기사의 후폭풍으로 업무에 집중할 수 없었어요.”
정말 답답했던 것은 그 부분이었다.
매일 같이 팩스와 전화, 이메일을 통해 두드리는 손길은 업무에 지장이 갈 정도였다.
“크흠! 죄송합니다. 학회에서 제가 건일ADOS의 테스트 관련해서 말을 했는데, 그게 퍼져서 기사가 났지 뭡니까.”
“······.”
헛기침을 터트리는 서문철. 업무 마비의 주인공의 고백에 김태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면 벌주 한 잔으로 넘어가시죠.”
“아하하. 감사합니다.”
서문철은 기분 좋게 한 잔을 들이켰다.
술자리는 술자리다. 회포를 푸는 것이지 서로에게 화풀이를 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그러면 미리 벌주를 더 마시겠습니다!”
돌연 서문철이 소주 한 잔을 더 비웠다.
“이번에는 누구에게 잘못하신 거죠?”
“푸하하. 내 차례인가?”
“나면 소주가 아니라 폭탄주입니다!”
김태호를 비롯한 두 명의 사장들은 무슨 말을 할 것인지 기다렸다.
“학술지에 개인적으로 투고를 할 내용이 있는데 재영공업과 김 사장님의 사례를 실어도 되겠습니까?”
“뭐. 너무 과장되거나 악의적인 내용이 없다면요. 그런데 어느 학술지인가요?”
김태호는 어디에 실릴 것인지가 궁금해졌다.
오늘도 읽어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행복한 하루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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