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본 작품은 픽션이며 등장하는 인물 지명, 기관, 사건, 단체 및 직업 등은 실제와 어떠한 관련도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김태호는 서두르지 않았다.
원청사와 협력사. 대부분의 경우는 절대 갑이 원청사일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는 예외가 존재한다.
이번에는 그게 재영공업이었다.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프로젝트를 통해 막 협력사가 된 작은 회사가 갑이 될 수 있다니!
‘나한테 금속분리판의 결과를 보여주지 말았어야만 했어.’
김태호의 행동에는 근거가 있었다. 이미 수많은 기업들의 러브콜이 쏟아지고 있던 상황이었다.
건일ADOS는 경쟁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기술력이 뒤쳐졌었다.
이번에 재영공업이 없었다면 개량형 스택은 쓰지도 못했다. 누구도 그들을 대체할 수 없다.
건일ADOS쪽에서 거듭 계약을 논한 것도 그래서였다.
매번 조건은 상향되었다.
그래도 김태호는 그 어떤 확답을 주지 않았다. 저번 미팅에서 언급한 조건이 계속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백기를 든 것은 건일ADOS였다. 경영을 간섭할 요소가 모두 제거가 되었다.
조건부였지만 김태호는 승낙했다.
다른 기업에게도 같은 조건을 적용하라는 건일ADOS의 마지막 자존심이었기 때문이다.
“만족스러운 결과 감사합니다.”
“아무쪼록 건일ADOS와 오랫동안 함께 하기를 바라겠습니다. 김 사장님.”
새로운 계약을 위해 김태호는 건일ADOS를 찾았다.
최건우는 불편한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속이 후련하다는 표정이었다.
줄다리기를 한 것에 비해 대화는 길지 않았다.
공장으로 돌아가는 김태호의 걸음에는 힘이 실렸다. 명품 옷과 신발, 외제차가 부럽지 않았다.
재영공업의 기술이야말로 명품이었다.
이틀 뒤, 각 언론사에 재영공업의 기사가 실렸다.
[건일ADOS, 재영공업과 새로운 협력사 계약체결.]
건일ADOS가 기존의 협력사였던 재영공업과 새로운 계약을 체결했다. 이전 계약보다 훨씬 상향된 조건이라고 전해졌다. 협력사가 되고 몇 달도 되지 않아 새로운 계약을 맺은 이유로는 재영공업이 금속분리판 생산에 있어서 독보적인 성과를 보여줬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건일ADOS의 관계자는 “재영공업은 다른 기업과 비교할 수 없는 기술력을 가지고 있는 건일그룹의 파트너이며, 건일ADOS와 동반성장을 할 우수한 기업이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기사를 읽던 김태호는 흡족함을 감추지 못했다.
건일그룹의 파트너. 이 부분에서는 입꼬리가 찢어질 뻔 했다.
동반성장을 강조한 부분도 재영공업의 현재와 미래를 고려한 것이었다.
나머지 부분에는 다른 협력사 관계자들도 자극을 받았다는 반응도 실려 있었다.
건일ADOS는 모든 협력사에게 기회가 있다는 것처럼 포장한 것이다.
그 기사는 효과가 있었다.
매일 같이 쏟아지던 제안서들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게 언론 플레이의 힘이구나.”
김태호는 신기하기만 했다. 오랜만에 업무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보안 설치 끝났습니다!”
“감사합니다. 수고 많으셨어요.”
신문을 읽는 사이에 보안설치가 끝났다.
건일ADOS의 소개를 받은 보안회사였다. 재영공업에도 이제 제대로 된 보안시스템이 생겼다.
가격은 당연히 비쌌지만 이건 당연한 지출이었다.
보안은 반드시 강화해야만 했다.
김태호는 보안교육을 끝으로 직원들을 퇴근시켰다. 그 뒤에는 공장 A동에 들렀다.
“어째서 이번 금속분리판이 그런 특별한 결과를 낸 걸까.”
예전부터 기계와 재료에 인챈트를 걸어뒀었다. 왜 이번에만 유별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몰랐다면?’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다.
그랬다면 건일ADOS 이전에 다른 거래업체가 필사적으로 달라붙었을 것이다.
“안녕하세요, 정 사장님. 재영공업의 김태호입니다. 예. 다름이 아니라 여쭤볼 것이 있어서 그러는데요.”
가만히 생각해 봤자 답은 없다.
예전 거래처 사장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의 제품들이 어땠는지에 대해서 물었다.
거래처 사장들은 다들 가격 대비 좋은 품질이라 잘 만족했다고 했다. 그러고는 재영공업이 바빠서 일을 맡기지 못해 아쉽다는 불만을 토했다.
“제품은 좋다. 가격대비 훌륭한 수준이었다.”
전에도 들었단 말이다.
김태호가 만족할 답은 없었다.
건일ADOS처럼 체계적으로 차이점을 정리한 곳이 없었다.
“그래도 역시 인챈트가 제일 큰 걸까.”
시범가공 직전에 바뀐 것은 있었다. 바로 성질이전 인챈트의 적용이었다.
“10%의 비밀을 알아야 해.”
김태호는 B동부터 조사에 들어가기로 했다. 처음부터 거슬러 올라가면 답이 나올 것이다.
* * *
김태호는 며칠 째 조사를 했다. 이제는 뭔가 감이 올 것만 같았다.
“금속분리판이 효율이 높다. 그러면 유로에 답이 있을 텐데.”
그는 금속분리판의 중앙을 어루만졌다. 거기에는 촘촘한 홈이 균일한 간격으로 패여 있었다.
바로 이것이 유로다. 이걸 통해서 연료와 공기의 공급이 이루어 진다.
결과가 좋다면 여기에서다. 그 과정을 두 눈으로 지켜볼 수 있다면 해답이 나올 터였다.
“만약에 더 자세하게 볼 수 있다면?”
김태호는 인챈트 보안경을 어루만졌다. 이것보다 더 좋은 것이 필요했다.
그는 돋보기를 하나 사 왔다.
수정으로 특수제작한 렌즈에는 디택팅 기능을 새겼다. 손잡이에는 마나를 최대한 흡수하게 길게 적었다.
“···와.”
보안경보다 잘 보이면 된다. 그런 가벼운 마음이었다. 그랬기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은 마나로 가득 차있다. 그렇게 오해할 정도의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안개 혹은 구름처럼 뿌옇단 마나가 또렷해졌다. 그걸 이루는 작은 알갱이가 보인 것이다.
“우와! 진짜 이렇게 보이는구나. 와아! 미쳤다!”
김태호는 연신 감탄했다.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온몸이 떨렸다. 이 흥분과 고양감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그는 가동 중인 프레스 기계에 다가갔다.
막처럼 감싸여진 형태의 마나. 그걸 이루는 촘촘한 마나 알갱이들이 제각기 다른 색과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돋보기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내구력 강화 인챈트 부품이 있는 쪽에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서 시작된 마나는 각이 져있었다. 또한 색채가 탁했다. 굳이 따지자면 회색에 가까웠다.
그리퍼 쪽도 사뭇 달랐다. 위치고정 인챈트는 얇고 긴 정사각형에 가까웠다.
“인챈트마다 서로 다른 형태에 대기 중의 마나와 다르게 색이 탁해!”
이건 새로운 세상이었다.
현미경을 처음 만든 사람의 심정이 이랬을 것이다.
반면에 대기 중의 마나는 은은한 하늘색에 원형을 유지했다.
그는 뒤로 물러나 실제 가공을 지켜봤다.
서로 다른 형태와 색의 마나가 뒤엉켰다. 그때마다 아름다운 빛이 쏟아졌다.
그만을 위한 연회가 펼쳐지고 있었다.
“아름답다. 정말.”
이 호화로움은 온전히 그의 것이다.
세상의 누구도 볼 수 없다.
넋 놓고 가공을 구경한 뒤.
김태호는 완성된 금속분리판을 보며 경악했다.
“이, 이게 뭐야?”
유로에 마나알갱이들이 붙어 있었다.
제품 하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완성된 제품들 모두가 그랬다.
그는 유로를 건드렸다.
마나알갱이가 손에 닿았지만,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환영처럼 손가락을 통과했다.
손가락을 튕겨도 줘도 마나는 떨어지지 않았다.
표면에 완전히 부착된 것이다.
“그렇구나. 유로에 붙은 마나가 촉매 역할을 한 거였어!”
유로는 연료와 공기의 흐름을 제어했다. 거기에 마나가 있다면 더 원활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면 말이 되지. 건일ADOS의 연구소가 아무리 첨단장비를 쓰고 수많은 석학이 있어도 모를 수밖에 없지!”
김태호는 제자리에서 펄쩍펄쩍 뛰었다.
뒤이어 건일ADOS의 1차와 2차 테스트 때 시험가공한 금속분리판을 확인했다.
해당 가공품에는 마나가 부착되지 않았다.
“이곳에 마나가 풍부해서 만이 아니야. 예전보다 더 정밀한 기계에 높아진 인챈트 수준이 더해진 거였어.”
공학. 그리고 인챈트 마법학.
두 개의 조화가 건일그룹이라는 재계의 거물을 을로 만든 것이었다.
김태호는 곧장 B동으로 갔다. 가동을 멈춘 기계와 완성된 가공품들을 살폈다.
기계들에 인챈트 된 마나는 A동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마나가 표면에 머물지 않았다.
“인챈트의 수준? 아니야. 같아. 그렇다면 뭐지? 최신기계가 아니라서? 아니면 인챈트의······.”
인챈트의 숫자.
김태호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A동의 기계는 금형 때문에라도 더 많은 인챈트가 가해졌다. 로보트 암까지 치면 최소 4개는 더 적용이 되었다.
김태호는 B동에 들렀다. 추가적인 인챈트를 욱여넣고 가공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표면에 마나가 묻어있었다.
“그렇구나. 인챈트가 서로 부딪히면서 마나가 남는 거였어.”
드디어 비밀을 깨달았다.
김태호는 소름이 돋았다. 재영공업이 얼마나 성장을 할 것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스택에 들어가는 금속분리판은 최소 200장에서 최대 300장이라고 보면 되었다. 그래야 10%의 효능이었다. 장당 효과는 미미한 수준이었다.
“저걸 최대한의 효율을 낼 방법은 없나? 다른 제품도 내가 손을 대면 더 잘 되지 않을까?”
하나만큼은 자신했다.
건일ADOS가 준 조건에서 이보다 더 금속분리판을 잘 만들 수 없었다.
그래서 나머지도 궁금해졌다.
결국 다른 부분도 수준이 올라와야 금속분리판의 효과가 극대화될 것이다. 거기에 욕심이 생겼다.
재영공업은 과연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 거기에서 막혔다.
“안녕하십니까. 백 소장님. 저 김태호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이론적인 궁금증. 그걸 해소시켜줄 수 있는 유일한 인맥이었다.
* * *
“바쁘신데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우리 김 사장님은 늘 환영이죠.”
김태호의 갑작스런 방문이 백광석은 기꺼웠다. 재능과 열정이 있는 젊음은 언제나 환영이었다.
“어떤 일로 오셨습니까. 급하게 전화를 하시던데.”
“지금 제가 고민하는 것은······.”
김태호는 순순히 고민을 털어놨다.
“아하하! 내가 이래서 우리 김 사장님이 좋다니까요.”
백광석은 박수를 치며 기뻐했다.
김태호가 이만큼 수소연료전지에 관심이 있는 줄은 몰랐다.
사업파트너인 재영공업의 성장은 늘 반기는 일이었다. 그게 단순히 이득을 탐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지적호기심이라는 부분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이번 기회에 짧게 수업을 해보죠.”
백광석은 김태호가 새롭게 보였다. 그래서 수소연료전지에 대한 강의를 시작했다.
김태호는 노트를 펼치고 집중했다. 한 마디도 놓치지 않기 위해 허락도 받고 녹음까지 했다.
백광석은 그게 너무 예뻐 보였다. 당장 연구소 회의를 해도 저만큼 집중하는 이가 없었다.
김태호에게도 너무나 소중한 시간이었다. 책이나 인터넷 자료에 비할 수 없었다. 그만큼 백광석의 지식과 경험은 뛰어났다. 막연하기만 했던 미래가 보다 체계적으로 잡히는 것을 느꼈다.
“수업은 여기까지입니다. 이제 원론적인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재영공업이 좋은 기업이지만, 수소연료전지의 모든 것에 신경을 쏟을 환경이 아닙니다. 특히 화학적으로요.”
“인정합니다. 그보다는 금속분리판이랑 맞닿은 것에서부터 확장하고 싶어 졌어요.”
“그렇죠. 금속분리판을 그렇게 완벽하게 가공하는데 다른 것이라면 비교적 쉽겠죠. 예를 들면.”
“수소연료전지의 가스켓이겠죠.”
김태호의 눈이 반짝거렸다. 촉매나 전해질 같은 분야는 당장 도전할 분야가 아니었다.
“그리고 몇 년이 걸리더라도 제가 부족한 부분에서의 연구가 들어가야겠죠.”
“정확합니다. 새로운 기술을 개발할 수 있다면, 조금도 아쉽지 않죠. 현실적으로 그때까지 인내할 수 있냐도 중요합니다.”
“사업적으로는 금속분리판 쪽 설비만 늘릴 수 있다면 그 비용은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다.”
연구개발은 밑 빠진 독에 붓기였다. 결과가 나오기까지 큰 돈과 시간이 필요했다. 외부 투자금 없이 진행하려면 확실한 수입원이 필요했다.
김태호에게는 그게 금속분리판이었다.
“그렇죠. 역시 사업적으로 뛰어나시네요.”
“다른 기업이 재영을 넘을 수 없다고 확신하니까요. 물론 뒤쳐지지 않게 금속분리판에 대한 연구개발도 들어가야죠.”
지금보다 더 잘하고 싶다.
김태호는 보다 욕심이 생겼다. 재영공업에게 본질적으로 부족한 것은 바로 연구쪽 인력이었다.
이때까지 구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못 구했다.
소수라도 양질의 인원을 구하는 것은 너무나 어려웠다.
“그래도 건일 덕분에 기사도 뜨니까 좋은 사람을 구할 수는 있겠죠.”
“아니면 사람을 추천해드리겠습니다.”
“···정말이십니까!”
김태호로서는 두 눈이 번뜩 뜨일 수밖에 없었다.
“네. 아는 교수가 있는데 그쪽으로 소개를 시켜드리겠습니다.”
“저야 좋죠. 정말 감사합니다!”
김태호는 그간 막막했던 부분이 확 트여졌음을 느꼈다.
오늘도 읽어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행복한 하루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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