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본 작품은 픽션이며 등장하는 인물 지명, 기관, 사건, 단체 및 직업 등은 실제와 어떠한 관련도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
김태호는 그 은밀한 제의에 할 말을 잃었다. 그런 분에 넘치는 상황을 감히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다.
문형식의 말대로라면 당연히 좋은 조건이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
김태호는 모순임을 잘 알았다.
원청사의 갑질은 수없이 많았다.
문형식이 말한 것도 달콤한 사탕발림일 뿐이다. 그걸 덜컥 믿을 사람은 없었다.
“그런 곳이 있다면 좋겠죠. 누구나 환영할 겁니다. 재영공업은 건일ADOS의 협력사입니다. 파트너쉽을 깨고 싶지 않아요.”
김태호도 상대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재영공업이 지키는 신용과 신뢰. 그걸 깰 이유는 없었다.
“건일ADOS보다 더 좋은 회사가 관심을 가질 수 있으니 하는 말입니다. 그때 고민하지 말고 미리 생각해두라는 거였죠.”
“걱정은 감사합니다만, 그것까지 신경을 써주실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이구, 미안합니다. 우리 젊은 사장님 잘되셨으면 한 조언이었는데 조금 무안하지네요. 아하하하!”
문형식은 일부러 크게 웃어 넘겼다.
‘생각보다 단호하네.’
그러면서 속으로는 혀를 찼다. 그냥 떠보는 말이면 절대 안 넘어올 사람이었다.
“아! 혹시 건일ADOS의 일 때문에 다른 일감은 받지 못하시는 것은 아니죠?”
“···괜찮습니다. 일정만 맞으면요.”
김태호는 약간의 피로함을 느꼈다. 말이 많고 참견이 많은 사람은 늘 껄끄러웠다.
문형식이 브로커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저 재영공업을 찾아온 고마운 손님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문의한 견적에 맞는 일정을 최대한 맞춰주려고 했다.
“죄송합니다. 직접 와주셨는데 확답을 드릴 수 없네요. 다른 일정이 겹쳐서요.”
“어쩔 수 없죠. 다음을 기약하는 수밖에요. 오늘 시간 감사했습니다.”
문형식은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았다.
재영공업을 벗어난 그는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어. 나야. 이쪽은 힘드네. 젊은 친구가 생각보다 존심이 세더라고. 협력사 포기는 안 할 것 같아. 차라리 투자 목적으로 인수를 하라고 해봐.”
[세부적인 데이터는 못 구했지. 그런데 재영공업 미쳤던데? 여기 헛소문이 아니야.]
파트너의 높아진 어조는 문형식을 흡족하게 했다.
“그렇지? 보니까 벌써 양산준비 하더라. 소식보다 더 알짜배기 회사 같아. 여긴 진짜야.”
문형식은 곧바로 사무실로 차를 돌렸다. 그는 한 번 본 것만으로도 견적이 나왔다.
주식으로 치면 최저점의 우량주가 재영공업이었다.
* * *
김태호는 평소보다 흥분했다. 결제한 델프 사의 프레스 기계가 오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네! 이쪽에 표시한 곳으로 설치해주시면 됩니다!”
그는 전처럼 공장 A동에 설치할 공간을 표시해뒀다.
새 기계가 설치된 후, 한동안 그것만 쳐다봤다.
“내 주제에 언제 이런 걸 사보냐.”
입꼬리가 가라앉지 않았다. 그라고 좋아서 오래된 기계를 썼던 것이 아니었다.
잔금이 하루만 늦어져도 전전긍긍했던 시절이 아직도 생생했다.
지금은 달랐다.
이번 건일ADOS의 수주는 김태호의 재영공업에 있어서 역사적인 규모였다.
선금만으로 새 기계를 살 정도의 회사가 된 것이다.
감상에 젖은 것도 잠깐이었다.
그는 A동의 문을 닫았다. 그리고 새 기계의 인챈트를 준비했다.
먼저 케이스를 열어 내부를 살폈다.
임대기계와 전체적인 틀은 흡사했다. 분해 및 조립은 어렵지 않아 보였다.
전처럼 인챈트할 부품을 체크했다.
작업을 서두르는 이유는 간단했다. 이미 양산을 위한 일정과 데이터는 제공을 받았기 때문이다.
일전에 피드백한 내용이 반영되어 금속분리판의 모델링이 수정되었다. 거기에 맞춘 금형도 곧 올 것이다.
새로운 시험가공 후에 양산을 하려면 여유를 부릴 시간이 없었다.
우우우웅.
“아. 또 오네.”
또 스마트폰이 울렸다.
김태호는 슬쩍 폰을 확인했다. 이번에도 모르는 번호였다. 그는 작업대에 올리고 방치를 했다.
근래에 들어 귀찮을 정도로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대기업은 물론 업계에서 한 번쯤은 이름을 들어온 업체들이었다.
왜 그들이 자신을 찾는가.
김태호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했다. 정작 재영공업은 평상시와 같았다.
주변이 너무나 달라졌다.
건일ADOS만 해도 그렇다. 전과 달리 꾸준히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대화 중간마다 혹여 다른 업체가 이상한 제의를 하는지를 꼭 물어봤다. 그리고는 절대 흔들리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고.”
관심은 좋지만 기분은 나빴다.
계속 업무에 지장이 가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
쿵! 쿵!
“사장님! 건일ADOS에서 납품왔습니다!”
“하아.”
A동의 문을 두드리는 직원의 부름에 한숨을 푹 쉬었다.
작업에 집중을 할 수 없다.
불편한 기색은 공장에 있을 때까지 만이었다. 잠갔던 문을 여는 순간 평소의 그로 돌아갔다.
건일ADOS의 직원은 싹싹하게 말을 걸어왔다.
“김 사장님. 시험 가공하실 재료 들고 왔습니다. A동에 넣으면 되죠?”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잠깐 쉬세요. 알아서 넣어둘게요.”
“아이고, 아닙니다. 그랬다가 들키면 저 큰일 나요.”
“큰일이요?”
김태호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뭐라도 더 물어보기도 전에 건일ADOS의 직원은 재료를 차례대로 옮겼다.
“아니, 우리가 하면 되는데······.”
“진짜 괜찮아요. 진짜로요.”
아무리 도우려고 해도 건일ADOS의 직원은 한사코 거부했다.
“어떤 일이 있던 거죠? 요즘에 자꾸 다른 곳에서 전화가 너무 많이 와서요.”
“······.”
“우리 일인데 좀 알 수 없을까요?”
김태호는 커피라도 타주며 물었다. 거듭 묻자 건일ADOS의 직원은 주변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재영공업이 흔들리지 않게 하라고 윗선에서 엄청 말이 많아요. 지금 납품을 오는 것도 여기만 하는 겁니다. 다른 하청에는 절대 안 해요.”
“그러면 그때 최 사장님이 온 것은······.”
“최 사장님 지시죠. 케어 제대로 하라고 했어요.”
“······.”
김태호로서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이런 부분도 특혜일 줄은 몰랐다.
“우리가 왜 그런 특혜를 받는 거죠?”
“그만큼 잘 하셔서 그래요.”
“네?”
“진짜 잘 하셔서 그래요. 이번에 맡은 일은 다른 업체들이 싹 짬 때린 거거든요.”
건일ADOS의 직원은 신이 나서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다
‘내가 그 정도로 잘 한 거였구나.’
김태호는 그 내막을 잘 몰랐다. 설마 연료전지 관련 제조업체가 전부 포기한 일일 줄이야. 그제야 자신이 엄청난 일을 한 것이라 깨달았다.
재영공업에 갑자기 연락이 쏟아지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이 관심은 아주 당연했다.
“다른 업체들이 그걸 어떻게 알죠? 기사에는 재영공업 이름이 없었는데.”
“지금 들리는 썰로는 테스트 내용까지 싹 퍼졌나봐요. 그래서 다들 눈독을 들이고 있다는 거죠.”
“네? 건일ADOS에서 그런 일이 있어요?”
“쥐새끼들 많아요. 그래서 지금 내부단속 중이에요.”
그래서 사내 분위기가 살얼음장이라고 건일ADOS 직원은 말해줬다.
이런 정보를 흘려주니 김태호로서는 고마울 뿐이었다.
“그러니까 사장님도 힘든 점 있으면 그때그때 말해주세요. 재영공업에 문제 생기면 바로 도와준다니까요?”
“네. 힘든 일이 있으면 바로 말씀드릴게요.”
건일ADOS도 재영공업을 지키기 위해 신경을 쓰고 있다.
김태호는 그것이면 충분했다.
“그리고 아시죠? 재영공업은 신용을 지킵니다.”
“잘 알죠. 그래서 윗분들이 좀 안심한다고 하더라고요. 재영공업은 약속은 안 어긴다고.”
“알아주시니 다행이네요.”
김태호는 차라리 속이 시원해졌다. 주변에서 떠드는 것에 휘말릴 생각은 없었다.
건일ADOS 직원이 떠난 뒤.
김태호는 직원들을 제대로 단속을 시켰다.
대기업에도 문제가 생겼다.
재영공업이라고 멀쩡하라는 법은 없었다.
* * *
김태호는 금속분리판의 시험가공에 하루하루 바쁘게 보냈다. 잠깐 시간을 내어 사무실에서 숨을 돌릴 때였다.
“사장님. 오늘도 이만큼 왔어요.”
경리는 팩스에 쌓여있던 한 뭉텅이의 인쇄물을 주었다. 쉬러 온 김태호는 한숨을 푹 쉬었다.
“오늘도 왔어요?”
그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책상 위에 있는 것 중에서 상당수는 투자제안서 혹은 인수제안서였다.
건일ADOS의 직원이 말을 해준 것이 정말이었다. 다들 재영공업을 원했다.
“사장님. 제 친구가 보내줘서 알았는데. 이거 우리 회사 맞죠?”
경리가 스마트폰의 화면을 보여줬다.
[화제의 J사에 쏟아지는 러브콜.]
저 기사 제목만 봐서는 뭔지 알 수 없었다.
“제가 검색해볼게요.”
김태호는 곧바로 기사 제목을 검색했다.
[화제의 J사에 쏟아지는 러브콜.]
건일그룹의 계열사인 건일ADOS의 협력사가 제조산업의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고 있다.
건일ADOS의 중소기업 상생프로젝트의 최우수기업이 된 J회사는 동종업계부터 시작해 제조업계 전체적인 이목과 관심을 받고 있다.
한 관계자는 “세계에 견줄 기술력을 갖춘 회사들도 포기한 일을 J사가 완벽하게 해냈다”며 “독보적인 생산기술을 갖추고 있고 아직 소기업의 규모이기에 미래를 본 기업들이 투자와 인수를 위해 많은 경쟁 중이다”라 말했다.
현재 J사는 서남부발전소에서 세종 수소연료발전단지에 참여하는 건일ADOS에 금속분리판을 양산할 준비를 하고 있다.
김태호는 J사가 어디인지 모를 수 없었다. 말이 J사지 대놓고 재영공업이라는 것을 명시하고 있었다. 설마 뉴스까지 뜰 줄은 몰랐다.
그는 관련된 기사를 더 찾아봤다.
건일ADOS의 직원이 말한 것보다 반응은 더 컸다.
“내가 제일 작게 봤구나.”
김태호는 서류들을 살펴봤다. 그 수많은 제안서는 기본 30억부터 시작했다. 제안서 중에는 최초 투자금액이 300억에 규모나 성과에 따라 추가로 더 투자하겠다는 외국계 회사도 있었다.
어떤 중소기업이 이런 제안을 받을 수 있을까.
김태호는 투자계약서들을 살펴봤다. 거기에는 재영공업에 대한 기대치와 어떻게 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전문가들의 시선이 있었다.
“아! 내가 놓친 부분들이 이런 거구나!”
얼마 전까지 머리에 들어오지 않던 것들이었다. 이번에는 그 하나하나가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결국 재영공업의 가치를 가장 낮게 본 것은 김태호였다.
“난 제대로 된 비전조차 없었어. 제길!”
김태호는 그게 분할 수밖에 없었다.
누구보다 재영공업을 잘 아는 사람은 자신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한 회사의 사장으로서 목적이 없는 책임감만 가지고 있는 셈이었다.
그는 생각을 정리했다.
재영공업은 이제 공단의 흔하고 작은 회사가 아니었다. 엄연히 국내에서 주목을 받는 기술력을 가진 회사로 급부상했다.
“내 회사의 가치는 이게 아냐.”
300억의 투자제안서.
김태호는 거기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예전이면 흔들렸을지도 모른다.
“0이 부족해. 아주 많이.”
그리고 투자제안서를 뒤집었다.
300억은 엄청난 금액이다.
하지만 지금은 몰라도 앞으로의 재영공업에게는 턱 없이 부족한 수준이었다.
올바른 성장을 위해서는 재영공업의 방향성과 비전을 확고히 갖춰야만 했다.
갑작스런 관심과 성장에 당장 부담을 느끼고 있지 않았던가.
그 이유는 간단했다.
지금과 같은 성장을 바랐지만, 그 이후를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붕 뜬 느낌이었지.”
김태호는 자신의 문제점을 더듬었다.
내부에서 무너지지 말아야 한다.
외부에 휘둘려서도 안 된다.
“특별해져야 해. 지금보다 더.”
이때까지는 생존이 전부였다. 그래서 다양한 기계들로 최대한 많은 가공을 했다. 그 덕분에 경험치를 쌓았지만, 앞으로의 전문성을 보장할 수 없었다.
이제는 선택과 집중이 필요했다.
“선택한 이상. 최고의 자리까지.”
연료전지는 전세계적으로 주목받는 분야였다.
이 분야에서 최고를 노린다.
1차적인 목표는 지금 진행하고 있는 금속분리판이었다. 여기에서 최고의 자리는 재영공업의 것이어야만 했다.
2차적으로는 연구진을 확보해 독자적인 특허 기술을 가지는 것과 동시에 연료전지의 다른 부품에도 경쟁력을 갖출 것이었다.
세계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연료전지의 수요는 가면 갈수록 늘 수밖에 없었다.
전 세계의 어느 기업이라도 먼저 찾아오는 첫 번째 회사가 되는 것.
김태호에게 그 자리는 재영공업이어야만 했다.
재영공업이 불가능하면 다른 회사도 불가능하다는 소리가 울려 퍼져야만 한다.
“상상이 아닌 현실로.”
현실에 안주하며 바랄 생각은 없다. 지금보다 더 뛰어난 재영공업은 김태호의 손으로 이룰 것이었다.
오늘도 읽어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행복한 하루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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