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본 작품은 픽션이며 등장하는 인물 지명, 기관, 사건, 단체 및 직업 등은 실제와 어떠한 관련도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필립은 홀로 공방을 지켰다. 옆에서 자리를 지키던 제자가 죽었다.
모든 것은 역병 탓이었다.
앞으로 할 일은 산더미처럼 남았다.
하지만 혼자여야만 했다.
그 자리를 누군가로 대체하는 것은 불가했다. 공방에 범인(凡人)을 들일 수 없었다.
새로운 제자를 들이는 것도 문제다. 마나를 느낄 수 있는 재능을 가진 자. 그중에서도 십 년은 넘게 수련을 해야 제자로 삼을 수 있었다.
필립은 진흙을 손수 빚었다. 그걸 말린 다음에 마법을 사용했다.
쿠드드득.
작은 균열과 함께 골렘은 천천히 움직였다.
우우우웅!
뒤이어 골렘을 펜으로 긁어냈다. 글자가 새겨지자 골렘은 그의 생각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허억! 허억!”
꿈이 끝났다.
김태호는 통증과 함께 깨어났다. 온몸에 땀이 비처럼 내렸다. 지독한 두통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필립이 쓰던 마법과 인챈트를 잊을 수 없었다. 그건 너무나 황홀한 광경이었다.
마법으로 만든 골렘에 인챈트까지 한다니!
명령도 필요 없었다.
필립의 생각에 따라 생명체처럼 움직였다.
골렘이 가진 단순한 사고방식을 보완하는 완벽한 수단이었다.
그래서 넋이 나갔다.
필립은 마법사지만 인챈트도 수준급이었다. 두 가지를 조화롭게 써야 가능했다.
김태호는 허탈함을 느꼈다. 마나를 느낀 적이 없다. 도구를 써야만 마나를 볼 수 있었다.
“포기할 수는 없지.”
마나를 보게 된 것이 반년도 지나지 않았다.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면 된다.
필립과 똑같을 필요는 없다.
그는 김태호였다.
지금까지 충분히 증명해왔다.
“나도 할 수 있어.”
현재는 기계의 성능을 보완하는 것에 불과하다.
앞으로 더 공부해서 성능을 개선시키고 더 나아가 기능을 창조하는 크리에이터까지 노릴 셈이었다.
목표를 다진 그는 열의가 넘쳤다.
평소와 같은 일과. 그 하나하나에 심혈을 기울였다. 작은 노력이 쌓이고 쌓여 태산이 된다.
“사장님! 건일ADOS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네. 이쪽으로 돌려줘요.”
사무실에 앉자마자 경리가 소리쳤다. 김태호는 곧바로 전화기를 들었다.
[재영공업의 김태호 사장님이시죠? 혹시 통화 가능하실까요?]
“네. 맞습니다. 혹시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있을까요?”
[연료전지 사업부의 과장 이성태라고 합니다.]
“어. 사업부시군요.”
김태호의 목소리는 밝았다.
왜 전화가 왔는지 알 것만 같았다.
[먼저 재영공업에서 참여한 개량형 스택의 채택이 완료되었습니다. 해당 금속분리판의 결과가 너무 좋아서 양산을 확정하려고 합니다.]
그 말에 김태호는 말없이 웃었다.
예상한 결과가 나왔다.
“네. 그러면 계약 관련해서 자세하게 알 수 있을까요?”
[피드백을 보내주신 것은 현재 연구소에서 최종 실험 중입니다. 거기에 맞춘 정보와 모델을 추후 알려드릴 예정입니다.]
“납품량에 대해서도 그때 알 수 있나요?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해 준비를 하려고요.”
[참고하실 정보를 드리겠습니다. 또한 계약 관련해서 방문할 예정이니 괜찮은 시간을 답신해주시길 바랍니다.]
이성태는 통화를 길게 잇지 않았다.
김태호는 메일로 온 정보를 확인했다. 예상 일정은 넉넉한 편이었다. 다만, 수량이 문제였다.
평일기준으로 기계를 하루 종일 돌려야만 했다.
문제는 24시간 동안 붙을 작업자였다.
“야간근로자가 필요한가.”
기존직원을 2교대로 돌리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야간직원만 따로 뽑는 것도 와닿지 않았다.
건일ADOS의 일도 계속 있으리라는 법도 없었다.
“애초에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의 가공은 안 돼.”
지금도 직원들의 작업은 반드시 확인하는 실정이다.
야간작업이면 인챈트에도 제약이 걸렸다. 물론 재료에 인챈트가 없어도 양품은 나왔다.
다만, 특별함은 없었다.
재영공업이 그간 세운 평판이 떨어질 것이다.
“기계를 하나 더 사자. 두 대를 돌리면 충분하니까.”
그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임대기계가 아니면 보다 자유롭게 일을 할 수 있었다.
김태호는 곧바로 델프 사의 한국지사에 연락을 했다.
상담을 통해 카탈로그를 받았다. 그중에 일정 내에 올 수 있는 제품을 봤다.
눈에 띈 것은 현재 설치된 기계의 이전 모델이었다.
“이게 더 좋은데.”
가격도 저렴했고 쓸모없는 기능도 없었다. 가공 폭도 넓어 양산도 가능했다.
건일ADOS에서 선금이 들어오면 추가대출 없이도 구매가 가능했다.
“여기는 로봇암도 파는구나.”
나머지를 살피다가 한 제품에 시선을 뺏겼다.
바로 로봇암이었다. 이게 있다면 반복 작업에 직원의 투입을 줄일 수 있었다.
김태호는 예산을 측정했다. 지금은 몰라도 미래에는 필요할지도 몰랐다.
“자동화가 되면 야간에도 기계는 계속 돌아갈 수 있으니까.”
김태호는 미래를 그렸다.
골렘보다는 못해도 로봇암이면 꽤 좋은 선택지였다.
“그리고 거기에 인챈트를 더하는 거지.”
그때는 어떤 인챈트가 좋을까. 김태호는 온몸이 근질거렸다.
* * *
“사장님. 오늘 건일ADOS에서 사람이 오기로 했죠?”
김태호는 한 직원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네. 왜 그러시죠?”
“저 사람이 그쪽 사장이라는데요?”
“에?”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김태호는 공장 입구를 봤다. 멋들어지게 정장을 입은 최건우가 있었다.
“어, 어서 오시죠. 여긴 어떻게······.”
“하하하. 우리 협력사를 찾아오는데 이상할 것도 없죠. 마침 주변을 지나는 일정이었으니 부담은 가지지 않아도 됩니다.”
“안으로 들어가시죠. 손만 씻고 바로 가겠습니다.”
김태호도 어안이 벙벙했다. 설마 온다는 사람이 최건우일 줄 누가 알았을까.
회의실에서 찾아온 어색한 분위기.
최건우가 말문을 텄다.
“업무 같은 딱딱한 이야기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엄연히 협력사의 지원을 위해 온 거니까요.”
“그렇군요. 직접 와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어려운 과제였는데 멋지게 성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김 사장님 덕분에 건일ADOS의 프로젝트가 날개를 달았어요.”
“과찬이십니다. 건일ADOS가 준 기계 덕분에 할 수 있었습니다.”
김태호는 자신의 힘만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이번 프로젝트에 들어가면 납품은 저희가 직접 받아가겠습니다.”
“어? 정말이십니까?”
“네. 겸사겸사 협력사의 고충도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 싶어서요.”
“그렇게 해주시면 저희야 감사하죠.”
“양산에 들어가면 그 시각은 생산관리쪽에 말하도록 하겠습니다.”
최건우는 재영공업에만 하는 특혜임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혹시 추가로 기계를 임대받을 생각이 있으십니까?”
“네? 추가로 말이십니까?”
“예. 안정적인 양산을 위해 추가 지원을 하는 걸로 결론이 나서 말입니다.”
김태호로서는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건일ADOS가 그렇게 해줄 이유는 없었다.
“좋은 기회지만 아쉽게 되었습니다. 이미 기계를 구매하기로 해서요.”
“구매가 확정이 난 것이 아니라면, 제가 해당 회사에 직접 이야기하겠습니다.”
“아닙니다. 이미 기계를 임대받고 있는데 또 받기에는 염치가 없어서요.”
김태호도 사람이라 흔들렸다.
추가 임대를 받는다면 양산에 문제는 없을 터였다.
‘세상에 대가 없는 호의는 없어.’
김태호는 이럴 때일수록 냉정해졌다.
“재영공업만의 경쟁력을 갖추는 것이 목표입니다. 건일ADOS의 호의에만 몸을 맡기기보다는 협력사로서 올바른 성장도 보이고 싶고요.”
“김 사장님은 여전히 올바르군요. 정말 좋은 제의였다고 생각했는데.”
“저에게 이런 제의를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살면서 잊지 못한 순간일 겁니다.”
김태호도 이런 일이 있음에 기뻤다. 감정의 벅차오름은 거짓이 아니었다.
“사업을 하면서 이렇게 욕심이 나는 사람은 오랜만이에요. 사람 대 사람으로서 도와주고 싶군요. 어려운 일이나 고민이 있다면 언제든지 전화를 해주세요. 기다릴 테니까. 우리는 식구가 아니겠습니까.”
최건우도 굳이 질척거리지 않았다. 명함을 놓고 미련 없이 일어났다.
“감사합니다. 최건우 사장님. 협력사의 위치에서 모자람도 어긋남도 없이 열심히 하겠습니다.”
“네. 저도 재영공업이 소중한 협력사 중 하나로서 같이 성장하기를 바라겠습니다.”
최건우는 악수를 나누고 차에 몸을 실었다.
검은색 고급 승용차가 떠난 뒤, 김태호는 명함을 만지작거렸다.
“나 진짜 성공했구나.”
얼마 전까지 테스트를 보던 작디작은 회사의 사장. 이제는 면접에서 보던 사장이 직접 찾아왔다.
김태호는 자신의 성과가 생각보다 더 컸음을 깨달았다.
* * *
건일ADOS에서 개량형 스택을 도입했다는 뉴스가 올라왔다. 가장 큰 문제점인 금속분리판이 해결된 것이다.
업계는 발칵 뒤집어졌다.
그 일에 접촉했다 포기한 업체가 몇 십 곳은 넘었다. 그 정도로 악명이 높았다. 오죽하면 2달 만에 해낼 업체가 국내에는 없다는 말이 나왔을까.
그랬기에 충격은 컸다.
과연 어느 업체란 말인가.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다.
재영공업. 그 업체명에 다들 경악했다.
이번에 협력사가 된 작은 소기업이었다. 그런 기술력을 갖췄을 것이라고는 누구도 생각했을까.
건일ADOS에 수주를 뺏긴 메카퓨얼셀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건일ADOS가 이대로 성과를 내면 앞으로의 경쟁에서도 우위를 점하기 힘들 터였다.
그들은 재영공업을 확인해야만 했다.
직접 행동하기는 어려우니 기업간의 브로커 역할을 하는 문형식을 움직이게 했다.
“진짜 이곳인가.”
문형식은 재영공업을 보며 눈을 찌푸렸다.
조사결과 건일ADOS가 재영공업에 크게 힘을 실어주기 시작했다고 알려졌다.
대대적인 투자가 의심되는 상황이었다. 그런 것 치고는 외관이 형편없었다.
“정말 이런 곳에서 그런 가공을 했다고?”
의문을 품지만, 보이는 것만이 정답은 아니다.
문형식은 자신의 명함을 다시 살폈다. 오늘의 그는 서류상으로 존재하는 회사의 사장이었다.
“바쁘게 돌아가네.”
문형식은 공장 A동과 B동을 기웃거렸다.
A동은 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B동은 오래된 기계가 즐비했고 직원들이 부지런하게 움직였다.
“젊은 사장이라고 했지.”
문형식은 B동으로 들어갔다. 헛기침을 해도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쪽 가공은 잘되셨죠? 아. 좋아요. 그렇게 해주세요.”
단 한 명의 사내 때문이었다.
공장을 바쁘게 오가는 젊은 사내에게 모두 집중을 하고 있었다.
‘저 젊은이가 김태호구나.’
문형식은 먹잇감을 찾았다.
“안녕하십니까. 티포오토의 문형식이라고 합니다.”
“아? 네, 네. 안녕하세요.”
“재영공업의 평판이 너무 좋아서요. 시간만 괜찮으시면 사업이야기를 조금 나누고 싶어서요.”
김태호가 직원들에게 멀어지는 순간에 명함부터 내밀었다.
“그러시면 1층 회의실로 가시죠.”
김태호는 기름때가 묻은 손을 작업복에 대충 닦고 명함을 받았다.
“저희 회사에 직접 방문해주셨네요. 귀한 발걸음 감사합니다.”
“직접 와보니 정말 좋네요. 멋진 회사입니다.”
회의실에 앉자마자 문형식은 재영공업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최근 뉴스에 나온 기사와 건일ADOS에서 취득한 정보를 취합한 상태였다.
지나칠 정도의 칭찬에 김태호는 얼굴을 붉혔다.
문형식은 칭찬을 멈추지 않았다. 젊은 사장들이 약한 부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찾아왔습니다. 다른 업체들도 곧 몰려올 것인데 최소한 눈도장이라도 찍어보려고요. 이번에 크게 일거리가 들어가는데 정말로 믿을 만한 업체가 필요했지 뭡니까. 아하하.”
“칭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말씀해주신 정도의 업체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혹시 최근의 일정은 어떠십니까. 건일ADOS에서 과한 일을 주시는 바람에 곤란하셨을 것 같은데.”
“네? 그건······.”
갑작스런 이야기에 김태호는 말을 흐렸다.
“건일그룹이 너무 좋은 곳이지만, 이번처럼 강압적인 일이 많을 겁니다. 그들의 일정을 맞추느라 다른 일은 진행할 수 없을 뿐더러 가면 갈수록 단가를 칼 같이 후려쳐서 결국 회사가 망하니까요.”
“다른 기업에 대해서 폄하를 하실 필요까지는 없으실 것 같아요.”
김태호는 이야기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만약에 말입니다. 건일처럼 강압적이지 않는 곳의 일이라면 어떠십니까. 예를 들면 넉넉한 시간을 안배해주고 재영공업의 기술을 인정하는 곳 말입니다. 또한 다른 곳처럼 갈수록 단가를 후려치지도 않는 회사 말입니다. 그런 곳이면 더 재영공업에 좋지 않을까요?”
문형식은 은밀한 제의를 하기 시작했다.
오늘도 읽어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행복한 하루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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