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본 작품은 픽션이며 등장하는 인물 지명, 기관, 사건, 단체 및 직업 등은 실제와 어떠한 관련도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끝을 알 수 없는 지하.
미로 같은 통로를 따라가면, 강물처럼 쏟아지는 용암을 받치는 거대한 용광로가 보였다.
위대한 마법사 중 하나, 필립만이 이곳에 도착했다.
숨이 턱턱 막히는 열기. 그 속에서도 선망의 눈길은 거인족의 흔적을 살폈다.
별처럼 많은 모험가가 찾지 못해 전설로 남은 거인족의 대장간.
필립이 서 있는 이 공간이었다.
그가 손을 뻗자 허공에 물결이 일었다. 이공간에서 꺼낸 것은 사람 머리 만한 원석이었다.
전설의 금속 오리하르콘.
대장장이의 종족이라는 드워프조차도 가공할 수 없던 보물.
지옥의 업화에 달구고 만년설에 식혀야 제련할 수 있다는 문서만 남아있었다.
필립은 오리하르큰 원석에 수많은 마법을 걸었다. 형형색색의 마법들이 오리하르콘 원석에 스며들었다.
그 뒤에 용광로 속으로 오리하르콘 원석을 집어넣었다.
쿠구구궁!
용광로가 들썩였다.
오리하르콘 원석에 걸어둔 마법들이 부서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 충격이 계속 필립을 덮쳤다. 숨을 쉴 때마다 흘러넘치는 핏물이 앞섶을 적셨다.
그는 모든 고통을 인내했다.
용광로에 새겨진 마법들을 순차적으로 발동시켰다.
반나절 동안 이어진 생명을 건 줄다리기.
한 번의 실수가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조차 그를 흔들지 못했다.
콰과과과광!
용광로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동굴이 무너져 내릴 것처럼 거대한 충격이었다.
그조차 견뎌낸 필립의 시선이 용광로에 고정되었다. 기다림 끝에 금빛과 은빛이 공존하는 쇳물이 흘러내렸다.
“···성공했다.”
오로지 그만이 전설을 현실로 만들어냈다.
* * *
사무실에서 단잠을 청하던 김태호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마에서 흐르던 땀이 비처럼 내릴 때, 그는 잠에서 깼다.
“또······.”
지독한 두통에 머리를 부여잡았다.
두개골이 박살날 것 같았다.
며칠에 한 번씩 이렇게 꿈을 꿨다.
아버지의 것이었던 재영공업의 사장이 된 날부터였다.
그때부터 시작된 한 마법사의 꿈은 실제로 겪었던 일처럼 생생했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미지의 지식!
대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그로서는 이런 배움조차 늘 감사하게 생각했다.
물론 아쉬운 점도 있었다.
실제로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지식은 십분의 일도 되지 않았다.
“제길.”
마른 목을 축이기 위해 몸을 일으키자 빈혈증세가 나타났다.
책상을 잡고 겨우 버텼지만, 검은색 코피가 터졌다.
꿈에서 마법을 많이 쓸수록 지금처럼 몸에 이상현상이 일어났다.
코피가 멈춘 뒤에야 움직였다.
세수를 하니 핏기가 없던 피부에 활력이 돋았다.
“잠깐 쉬려다가 영영 갈 뻔했네.”
김태호는 여벌의 작업복으로 갈아입었다.
그의 발걸음은 공장의 작업대에 멈췄다.
그 위에는 설계상의 문제로 인해 긴급한 수정이 필요한 제품들이 진열되었다.
재영공업에서 만든 물건은 아니었다.
주변 회사에서 시간적 여유가 없거나 새로 만들 정도가 아닌 경우에 지금처럼 물건을 보내 수정을 부탁했다.
단가도 맞지 않고 괜히 덤터기도 쓸 귀찮은 일거리.
남들은 꺼리지만 그는 항상 반겼다.
세상에 버려질 불량품들이 그의 손을 거쳐 새 제품에 손색이 없게 재탄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회사도.”
한때 재영공업은 강소기업을 넘어 중견기업까지 성장했었다.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아버지의 사업 파트너가 자금을 횡령하고 잠적한 것이 시작이었다.
악재는 그때부터였다.
퇴직자들이 회사의 기밀을 유출하고 특허소송에서 연이어 패배했다.
그의 아버지는 회사를 지키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결국 남은 것은 오래된 장비와 좁은 공장과 사무실뿐이었다.
그때의 충격으로 그의 아버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을 거뒀다.
모든 걸 지켜보면서 김태호는 단 한 번도 돌아가신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회사와 가족을 사랑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당신의 강함을 보았기에 저는 이렇게 있습니다. 아버지.”
처음 회사를 이을 때의 고난을 잊을 수 없었다.
몰락한 회사. 막 대학에 입학한 어린 사장. 그걸 믿고 일거리를 줄 회사는 어디에도 없었다.
기계가 있음에도 굶주리던 시절을 벗어날 수 있던 것은 바로 남들이 피한 지금의 일들이었다.
그 일들에 감사했고 또한 그 작업들을 사랑했다.
이 작은 일거리가 하나하나 쌓여 지금의 재영공업과 김태호를 인정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단골업체에서 퍼진 입소문 덕분에 가공품에 문제가 생기면 먼저 재영공업의 문을 두드릴 정도였다.
“늘 재미있단 말이지.”
새로운 도면을 보고 가공한 부품이 제 기능을 할 때의 짜릿함!
그는 이 부품들처럼 재영공업도 멋진 모습으로 돌아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언제나처럼 자신의 두 손이 해낼 테니까.
“이걸로 끝이다. 역시 완벽해.”
가공한 제품들을 마지막까지 검수한 뒤에 화물차에 제품들을 실었다.
오늘 납품은 단골인 (주)엘티웰이었다.
고객의 요구에 자동용접기기를 맞춤으로 제작하는 회사였다.
매번 다른 모델로 기계를 만드는 편이라 조립할 부품의 수정이 특히 많은 곳이었다.
“오 과장님. 배달 왔습니다.”
“와! 벌써 된 거야? 역시 김 사장이라니까!”
특히 기계조립을 담당하는 현장에게 김태호의 재영공업은 빠질 수 없는 감초였다.
“이번 부품들 재밌었어요. 조금만 실수하면 아예 못 쓰게 해두셨던데요.”
“설계 애들이 재탕을 해도 좀 될 만한 걸로 해야 하는데 답답해 미치겠다니까. 바쁘니까 따질 수도 없고.”
“전 고맙죠. 덕분에 일거리 받으면서 새로 공부하는데요.”
“지금 바로 설치해야겠다. 지금 실린더 고정이 안 돼서 놀고 있었거든.”
오 과장은 직원들과 함께 납품된 부품을 조립했다.
김태호가 수정한 부품들이 곧바로 시험대에 올랐다. 그건 학예회에 오르는 자식을 보는 심정이었다.
우우우우웅.
벨트 컨베이어가 소재를 이송했다. 끝에 다다르면 로봇암이 다른 소재를 위에 얹었다.
다음에는 판이 회전해 용접기가 가공할 포인트에 멈추었다.
푸쉬이이익.
유압실린더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소재를 고정시켰다.
가동은 거기에서 멈추었다. 용접기는 아직 설치 전이었기 때문이다.
김태호의 가공품들은 그 속에서 역할을 톡톡히 했다.
“캬하! 역시 잘 돌아가네. 잘못하면 하루 종일 손가락만 빨 뻔했네!”
“일정은 이번에도 빡빡하세요?”
“말도 마. 올해까지 쉬지도 못할 것 같아.”
오 과장의 푸념은 김태호에게 희소식이었다.
“우리 김 사장은 장사 잘 되나?”
“저야 똑같죠. 단골장사에서 못 벗어나네요.”
“건일ADOS에 신청은 어때? 솔직히 매번 다른 부품인데 오차 하나도 없이 다 해줄 정도로 기계 잘 다루는데.”
“ADOS가 뭔지 모르겠지만, 건일 계열사면 입구컷이죠.”
김태호는 대기업의 1차 하청은 커녕 하청의 하청도 접하기 힘든 실정이었다.
단골업체의 소개로 성사될만한 거래도 실패했기 때문이다. 좁은 공장부지와 기계의 노후화 때문이었다.
“김 사장은 진짜 모르네. 여기 신문 좀 봐봐.”
오 과장은 읽다 만 신문 한 페이지를 떡하니 펼쳐줬다.
[건일ADOS 중소기업 상생프로젝트 시작!]
굵직한 제목의 광고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건일자동차의 연료전지 연구소가 건일ADOS란 이름으로 새 출발을 하며 협력사를 공개모집한다는 것이었다. 이목을 끄는 점은 그간의 실적이나 회사의 규모에 관계없이 오로지 기술력만 본다는 점이었다.
“와. 진짜네요? 미쳤다.”
“그러니까! 기술력만 본다고 하잖아. 최소한 홍보는 되지 않겠어?”
“······.”
김태호는 얼른 나머지 내용을 살폈다.
“···대기업 협력사라.”
건일자동차가 아니라 계열사지만 상관없었다. 1차 협력사라는 자리가 너무나 탐났다.
재영공업의 평판을 크게 올릴 기회였다.
대기업과 같이 일을 진행했다는 것은 확실한 보증수표였으니까.
최우수 업체로 선정이 될 때의 보상은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연료전지 제작을 위한 신규장비 무기한 무상임대.]
첫사랑에게 고백을 할 때보다 더 떨렸다.
“와······.”
재영공업의 성장을 위해 좁은 공장과 오래된 기계 중에 고민하던 차였다.
기계가 해결되면 조금 더 넓은 공장부지만 알아보면 된다.
“반드시 해야겠네요.”
“그럼! 김 사장 실력이면 좋은 평가 받을 거야.”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김태호는 이번이 재영공업의 저력을 알릴 기회라는 것을 느꼈다.
회사로 돌아가 건일ADOS의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신청접수 후에는 건일ADOS의 영상들을 시청했다.
이번 프로젝트 영상은 몇 번을 봐도 질리지 않았다.
마지막에 비워진 협력사 명단에 재영공업이 적히는 상상은 너무나 기분이 좋았다.
‘오로지 내 힘으로 회사를 성장시킬 수 있는 기회야! 여기서 얼마나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까!’
매번 수정의뢰가 들어온 제품의 설계도를 보면서도 많은 것을 배웠다.
건일ADOS와 같은 기업이면 얼마나 많은 것을 배울까!
1차 테스트는 보내주는 재료의 가공이었다. 어떤 것을 가공하게 될까 기대감에 계속 잠을 설쳤다.
끝나지 않던 설렘은 건일ADOS의 택배가 도착하고야 멈췄다.
김태호는 만사를 제쳐두고 상자부터 확인했다.
얇은 금속판 10개와 USB가 있었다. 그걸 들어내니 USB를 통해 1차 테스트에 대한 정보를 확인하라는 메시지가 있었다.
김태호는 USB의 내용을 확인했다. 업종별로 폴더가 나눠져 있었다.
‘난 프레스 쪽으로 신청했었지.’
재영공업의 기계 중에서 그나마 덜 오래된 것이 프레스 기계였기 때문이다.
프레스 폴더 안은 연료전지 금속분리판 정보와 가공 폴더로 나눠져 있었다.
먼저 금속분리판 정보 폴더의 PDF 파일 하나를 눌러 확인했다.
“어, 어어······.”
김태호는 벙찔 수밖에 없었다.
PDF의 모든 정보는 영어로 되어 있었다.
중간마다 사진과 그래프가 있지만,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영어를 못하면 아예 처음부터 끝이구나.’
낙담할 수 없었다.
이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
그는 인터넷에 단어 하나하나를 검색하며 번역을 시도했다.
전문용어가 워낙 많아서 한 문장을 이해하기도 버거웠다.
‘내가 이렇게 똑똑했나?’
그런데 점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묘한 뉘앙스의 문장들도 어느 순간부터 단번에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꿈에서 보던 책보다 쉽기는 해.’
김태호는 꿈속에서 필립이 읽던 책들을 생각했다.
양피지에 쌀알처럼 적혀진 책들은 아예 다른 체계의 상식과 언어였다.
‘그것도 봤는데 이쯤이야!’
적어도 영어는 이세계의 언어가 아니었다.
다음은 가공 부분이었다.
여러 데이터와 모델링이 된 파일들을 보면서 화색을 지었다.
‘이거 그냥 가공법을 다 알려준 거였네!’
김태호로서는 너무나 고마운 일이었다. 이건 반드시 성공할 수밖에 없었다.
‘근데 뭔가가 심심한데.’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곰곰이 생각하니 중간마다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른 파트도 살폈다.
“부족한 내용이 다른 파트에 있구나!”
부품은 하나의 완성된 제품을 위한 것이다.
만약 금속분리판만 보고 섣불리 가공을 했다면, 다른 결과물이 나왔을 터였다.
‘꿈 때문인가? 진짜 똑똑해진 것 같아.’
김태호는 출제의도를 알아차린 자신이 기특했다.
‘전력을 다 하자. 나와 내 회사를 위해. 필립의 지식과 경험도 이제는 내 능력이니까.’
늦은 시간이라 직원들은 퇴근했다.
김태호는 창고 구석에 있는 낡은 금고를 열었다. 그 안에 있는 건 그의 보물들이었다.
쿠웅!
그걸 챙기고 공장 문을 굳게 잠갔다.
늦은 저녁.
매일 같이 재영공업의 공장에서는 형형색색의 빛이 흘러나왔다.
* * *
건일ADOS의 시작을 알리는 중소기업 상생 프로젝트.
각 메이저 언론사에 1면으로 광고를 넣어서인지 첫 날부터 신청기업은 예상치를 넘어섰다.
1차 테스트를 위한 재료를 전달하는 것만으로도 업무량이 폭발할 정도였다.
그래도 경영진들은 만족했다.
이번 광고로 건일ADOS의 인지도와 함께 좋은 이미지를 구축했다.
반면 실무진들은 죽을 맛이었다.
사만 개가 넘는 기업에 가공품을 보냈지만, 돌아오는 것은 30%도 되지 않았다.
그래도 칠천 곳이 조금 안 될 정도였다.
결과를 내야하는 연구소의 불은 몇날며칠이고 꺼지지 않았다.
마지막 날은 연구소장마저도 철야로 일손을 보태야 할 정도였다.
신경이 곤두선 연구소장의 눈에 한쪽에서 잡담 중인 이들이 들어왔다.
“다들 무슨 잡담 중인거야? 일정을 맞출 생각이 없어?”
“이, 이걸 보시면 압니다.”
연구원은 급히 측정이 끝난 제품을 보여줬다.
“10개가 크랙 하나도 없이 깔끔하네. 여기 잘하는데? 결과는 어때.”
“측정결과도 완벽합니다.”
“이론적 수치에 근접했다고? 그런 기업들 수준에?”
연구소장은 측정결과를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여기 어느 회사야? 리스트에 있지?”
“아닙니다. 재영공업입니다.”
“······허!”
연구소장은 기가 찼다.
프레스 가공에 준 금속분리판 모델의 수준은 높았다.
건일자동차의 1차 협력사들도 단기간에 가공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이 정도 기술력의 신청회사는 따로 리스트를 정리했었다.
리스트에 없던 진짜 중소기업이 그들을 데이터로 완벽하게 압도한 것이다.
“···조사해. 이 회사.”
건일AODS는 진흙 속의 진주를 발견했다.
오늘도 읽어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행복한 하루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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