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고, 고마워라.”
고마워서 눈물이 다 나려고 하네. 카밀라는 가볍게 혀를 찼다.
그러는 사이 그가 불러낸 이들의 입에서 알 수 없는 말이 연신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주변에서 검은 무언가가 생겨나더니 마치 살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기이하게 흐물거리며 카밀라의 주변을 순식간에 에워쌌다.
[뭐냐? 저 시커먼 건? 사특한 기운이 아주 왕창 느껴지는데?]
[조심해라.]
꿈틀거리는 검은 액체는 딱 봐도 심상치 않아 보였다.
사특한 기운이 느껴진다는 말에 카밀라는 일단 아레나의 신성력을 먼저 써 보기로 했다.
“아레나……!”
[커어어엉!]
그런데 그 순간 커다란 울음소리와 함께 무언가 카밀라 앞을 빠르게 막아섰다. 엄청난 크기의 하얀 생명체였다.
‘…호랑이?’
귀를 찢을 듯한 커다란 울음소리에 카밀라에게 다가서던 검은 액체가 주춤하며 물러섰다.
주술을 읊던 이들 또한 하얀 호랑이의 등장에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끼는 듯 연신 몸을 떨어 댔다.
[크아아앙!]
하얀 호랑이는 바로 검은 액체를 향해 달려들었다. 백호가 휘두르는 발길질에 액체는 속절없이 찢겨 나갔다.
끼에에에엑-
기이한 울음소리를 내면서.
“너…….”
카밀라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뭐지? 이 낯설면서도 익숙한 느낌은?
“…킹?”
그녀의 부름에 열심히 검은 액체를 찢어발기던 백호가 곧장 뒤를 돌아봤다.
착각일까? 백호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간 것 같은데?
“이, 이게 무슨!”
다니엘 또한 백호의 등장은 전혀 예상치 못한 듯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뭐 하는 거냐! 잡아라!”
[크허어어엉!]
“크윽!”
“커헉!”
하지만 백호의 커다란 울부짖음에 카밀라에게 향하던 이들 모두 고통을 호소하며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피를 토하는 이들도 있었다.
“킹이… 킹이…….”
컸네?
카밀라 또한 멍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저거 분명 킹인데?
아니, 킹 맞나? 쟤 왜 갑자기 저렇게 커진 거야?
“…우리 작은 킹 어디 갔니?”
[…….]
적들이 패닉에 빠지자 백호가 순식간에 다시 카밀라 곁으로 다가왔다. 그러곤 그녀의 주변을 빙빙 돌며 슬쩍슬쩍 얼굴을 비빈다.
이 부드러운 털의 느낌은 분명 킹인데?
“너 정말 킹 맞는구나…….”
얼떨떨한 표정으로 꼬리를 만지작거리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백호가 바닥에 축 늘어졌다.
“어?”
화아악!
순간 빛에 휩싸인 백호의 형체가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킹!”
커다란 백호는 사라지고 어느새 그 자리에 익숙한 녀석이 누워 있었다.
바로 킹이.
“그런데 왜?”
왜 다시 작아진 거지?
창고에서 영상 구슬을 충전하고 쓰러졌을 때처럼 축 늘어져 끙끙 앓는 소리를 내는 킹을 카밀라가 곧바로 안아 들었다.
[규우…….]
우리 킹, 너 또 성장한 거니?
‘아이고, 기특한 것.’
혼자서도 잘 자라는구나.
카밀라는 잘했다며, 이제 괜찮으니 푹 쉬라며 녀석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그런데 뭐야?’
보아하니, 그라시아 제국에 있을 때처럼 또 저 혼자 날 찾아온 것 같은데. 아버지한테는 말씀드리고 온 건가?
“역시 아직 성체를 오래 유지하지는 못하는구나.”
그 순간 아주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급히 고개를 돌린 카밀라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아버지.”
소르펠 공작이었다.
“네놈 신수는 아직 좀 모자라지.”
“모자란 게 아니라 어려서 그런 거다.”
그녀를 더욱 놀라게 한 건 그 뒤로 모습을 드러낸 제이빌런 공작과 세프라 공작이었다.
[덜 자란 거 맞아.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으니 나처럼 완전히 성장하려면 아직 한참 멀었지.]
초코 맛 제… 아니, 신수 제티도 어느새 날아와 카밀라의 어깨에 자리를 잡고 앉아 한마디 거들었다.
[크르릉.]
카밀라에게 다가온 제티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축 처진 상태에서도 킹이 있는 대로 이빨을 드러냈다.
[…성질 더러운 꼬맹이.]
“그런데 얘는 성장을 해도 말을 못 하는 거야?”
조금 전에 나를 보고도 아무 말을 안 하던데.
[신수라고 다 말하는 걸 좋아하진 않아. 루나 녀석도 말을 할 수 있지만 입을 여는 경우가 극히 드물지.]
…한마디로 너만 수다쟁이라는 거네.
[크르…….]
저리로 가라는 듯 킹이 다시 으르렁거렸다. 그런 킹을 제티가 아니꼽게 쳐다봤다.
그래도 싸울 생각은 없는 듯 제티가 다시 제이빌런 공작에게로 날아갔다.
“다들 여긴 어떻게…….”
“일단 대화는 나중에 하자꾸나.”
세 공작의 시선이 혼란을 틈타 슬금슬금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는 다니엘에게로 향했다.
“저것들부터 처리한 뒤.”
화아악!
세 사람에게서 흘러나오는 엄청난 기운에 카밀라조차 꿀꺽 마른침을 삼켜야 했다.
* * *
결론부터 말하자면 다니엘은 죽었다.
세 공작의 등장에 일이 실패한 것을 안 그는 곧장 품에서 단도를 꺼내 들었고.
“야, 야! 저거! 제티!”
[죽었다.]
[규우!]
제 몸은 버리고 다른 누군가의 몸을 뺏을 계획이었는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독한 놈.’
누가 에바 교인 아니랄까 봐.
나지막이 혀를 차는 그녀에게 세 공작이 기겁을 하며 달려왔다.
“저런 거 보지 마라.”
“잘 좀 가려 봐! 카밀라, 어디 다친 곳은 없는 게냐?”
영혼이 된 다니엘이 얼마나 황당해했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겠지.
[내 반드시!]
연신 이를 으득으득 갈던 그는 세프라 공작에게 소멸당하거나 사신에게 붙잡히기 전 그 자리에서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그도 모르는 것이 있었으니.
[으… 으아아악!]
제노나 아레나를 시켜 놈을 잡아 오라 시킬 필요도 없었다. 그들보다 먼저 움직이는 존재들이 있었으니까.
그를 감싸는 수많은 검은 손들.
[아, 안 돼에에에!]
지옥행 열차를 탄 그는 허무하게 그렇게 사라졌다.
오히려 그가 데리고 있던 부하들이 더 끈질기게 반항을 했다. 일부는 다시 주술을 읊으며 기이한 액체를 불러냈고, 몇몇은 검을 들고 공격을 시도했다.
화르륵!
하지만 신수 제티가 뿜어내는 불길에 모든 공격은 허사가 되었다. 말 그대로 다들 타 죽어 버렸다는 말이다.
“저기… 잡아서 심문 같은 거 안 하세요?”
“입을 열 자들이 아니야.”
“심문할 것도 없고.”
‘심문할 게 없다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모습에 카밀라가 오히려 당황해 그들을 만류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몇 명 남겨 두시는 게 어때요? 심문을…….”
하지만 세 사람 다 고개를 가볍게 내저을 뿐이었다. 잡아서 심문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듯이.
“어린애는 저런 거 보는 거 아니다. 저리 가라.”
“아니, 저 어린애 아닌…….”
“저기 가서 킹이랑 놀고 있으렴.”
[규우우!]
“네에…….”
그렇게 모든 상황을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온 카밀라는 자리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처분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카밀라.”
“넵!”
소르펠 공작의 나직한 부름에 카밀라는 아주 빠릿빠릿하게 대답했다. 조금은 어색한 미소를 머금은 채.
“…….”
이름을 부른 후에도 한참 동안 소르펠 공작은 말이 없었다. 정말로 화가 많이 난 듯 연신 미간이 꿈틀거렸다.
쉬이 말을 꺼내지 못하는 그를 대신해 카밀라가 먼저 눈치를 보며 조심히 물었다.
“그런데 세 분께선 그 자리에 왜…….”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니.”
“넵!”
그냥 조용히 입 다물고 있는 게 좋을 것 같다.
하지만 소르펠 공작은 한 번 입이 열리자 내내 참고 있던 말들을 그제야 쏟아 내기 시작했다.
“대체 거기를 왜 간 거냐.”
“그게…….”
“그놈이 누군 줄 알고! 거기가 어딘 줄 알고 겁 없이 따라가! 전에 분명 말하지 않았니? 두 번 다시 위험한 일에 끼어들지 말라고!”
진심으로 화를 내는 소르펠 공작을 보며 카밀라는 급히 주변을 훑었다. 혹시 도움을 줄 사람이 없나 해서.
‘저럴 때의 아버지는 정말 무섭단 말이야.’
변명 따위 조금도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세프라 공작이나 제이빌런 공작, 두 사람 다 야단을 맞는 게 당연하다는 듯 팔짱만 끼고 방관 모드에 돌입해 있었다.
이번 일에 약간의 지분을 갖고 있는 제이너를 바라보았지만.
“와, 너 진짜 두고……!”
“카밀라 소르펠!”
“네에…….”
그 또한 소르펠 공작의 분노는 감당할 자신이 없다는 듯 눈이 마주치자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오히려 자업자득이라는 듯 빙글거리는 모습을 보자 속에서 열이 뻗쳤다. 아우, 저 얄미운 놈!
‘이게 다 누구 때문에 일어난 일……! 아, 나 때문인가?’
내 의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지.
아니, 아니! 그래도 네가 제대로 말을 안 해 준 잘못은 있잖아!
‘뭔가를 알아냈으면 바로 알렸어야지!’
대체 왜 숨긴 거야! 진작 나한테 말했으면 이렇게까진 되지 않았을 거 아냐!
너 딱 기다려!
‘저 인간들은 애초에 기대도 안 했고.’
어느새 자리에 함께하고 있는 루드빌과 라비 놈은 말할 것도 없었다.
라비는 ‘저거 더 혼나야 해!’ 하는 살벌한 눈빛으로 오히려 자기가 직접 혼내지 못하고 있는 걸 안타까워했고, 루드빌 역시 굳어진 표정으로 연신 매서운 눈빛을 보내는 중이었다.
마지막으로…….
‘……! 아냐, 아냐! 그거 아냐!’
아르시안과 눈이 마주친 카밀라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애처로운 자신의 눈빛에 그가 바로 기운을 확 끌어 올렸기 때문이다.
세 공작을 향해 당장 공격이라도 퍼부을 듯이!
멈춰! 그거 아니라고!
“죄송해요.”
결국 짧은 한숨을 내쉰 카밀라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녀의 사과에 소르펠 공작의 입에서도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카밀라.”
“네.”
“왜 매번 우릴 잊는 게냐.”
카밀라의 시선이 천천히 소르펠 공작에게로 향했다. 잊다니? 내가?
“딱히 잊은 적은…….”
“왜 매번 혼자 다 해결하려는 거니.”
“그거야…….”
솔직히 다들 왜 이렇게 화를 내는 건지 잘 모르겠다. 분위기가 살벌해서 일단 사과부터 했는데…….
킹을 찾아왔을 때도, 제이비 교수의 일이 있었을 때도, 이번에도.
이게 이렇게나 혼이 나야 할 상황인가?
“당연한 거 아닌가요?”
“뭐?”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혼자 하는 게 맞잖아요.”
혼자 할 수 있는 일을 굳이 남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함께해야 할 필요가 있나?
왜? 그건 잘 모르겠다.
“저 그렇게 염치없진 않은데.”
“…염치?”
“괜한 폐를 끼치는 것도 그렇고,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하는 게 맞…….”
카밀라는 끝까지 말을 다 잇지 못했다.
‘왜…….’
왜 다들 저런 표정이지?
순간 방 안에 고요한 침묵이 흘렀다.
다들 굳어진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심지어 아르시안마저 그녀를 탓하듯 바라본다.
아니, 다들 뭔가 내 말을 이해를 못 하는 것 같은데.
“귀찮으시잖아요.”
“뭐?”
“썩을! 내가 네년 뒤치다꺼리까지 해야 해!”
“혼자 할 수 있는 건 알아서 해! 빌어먹을!”
“저건 혼자 밥도 못 먹는 거야! 그럼 처먹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