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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 구슬을 연결해 놓으라고 지시한 건 바로 카밀라였다.
아무래도 걱정돼서 안 되겠다며 따라오겠다는 걸 혼자 가겠다고 우겼더니 통신 구슬을 손에 꼭 쥐여 줬다.
혹시 모르니 집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통신 구슬을 꼭 켜 놓으라면서 말이다.
“나.”
─ 그래.
쥬엘라의 시선이 다시 네 사람을 쭉 훑었다.
“…버릴게.”
더 이상 잡고 있을 이유가 없는 것 같다.
“네가… 네가 도와줘. 끊을 수 있게 도와줘.”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애써 참은 쥬엘라가 단호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끊을래. 이들과의 고리.”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카밀라 영애한테 뭔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니!”
“당장 그거 끊지 못해!”
“쟤 완전히 미쳤나 봐!”
그제야 네 사람이 다시 소리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분노와 어이없음이 가득 담긴 얼굴로 당장 쥬엘라의 손에 들린 통신 구슬을 뺏으려 했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수습해야 했으니까!
─ 다들 쉿.
“……!”
하지만 그 순간 들려오는 카밀라의 나직한 목소리에 다들 움찔했다.
소리가 큰 것도 아니었거늘, 왠지 모르게 등골을 서늘하게 만드는 그녀의 말에 모두 저도 모르게 급히 입을 다물었다.
─ 다들 알고 계실 겁니다. 페이블러 제국을 수호하는 세 가문에 주어진 권한을요.
“그, 그게 무슨!”
─ 소르펠, 세프라, 제이빌런. 이상 3대 공작과 그 직계존속은 부당한 사건을 목격했을 때 즉결 처분을 내릴 수 있다.
뒤에 ‘단, 이는 황실의 뜻에 반하지 않아야 하며……’ 어쩌고저쩌고 더 있지만, 여하튼 이는 페이블러의 귀족이라면 누구든 알고 있는 사실이다.
막말로 넌 공작과 피도 섞이지 않았는데 뭔 직계냐고 간 크게 외칠 수 있는 이는 그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다들 그저 그녀가 지금 저 말을 왜 하는 것인지 의아할 뿐이었다.
─ 지금 그 권한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무슨 말씀을……!”
─ 베이크스 백작가가 가진 쥬엘라 영애의 양육권을 박탈하겠습니다.
“뭐, 뭐!”
순간 쥬엘라를 제외한 방 안에 있던 모든 이들의 표정이 멍해졌다. 지금 쥬엘라를 우리 가문에서 제명하겠다는 말인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가요! 누구 맘대로 저 아이를……!”
“즉결 처분에 대한 책임도 본인이 지셔야 하는 거 잘 아시겠지요! 당장 이번 일에 대해 정식으로 항의하겠습니다!”
─ 물론 잘 압니다. 즉결 처분의 권한이 큰 만큼 그 결정에 대한 책임도 모두 당사자가 져야 하는 거.
“그걸 알면서 이런…….”
─ 왜요? 제가 감당 못 할 것 같아서요?
“그……!”
베이크스 백작의 말문이 막혔다.
소르펠 공녀라는 걸 차치해도, 최근 성녀로까지 칭해지고 있는 카밀라의 위상은 그야말로 엄청났다.
심지어 그라시아 제국의 실세인 에스크라 공작의 친딸이라는 것도 밝혀진 현시점에서 그녀가 감당하지 못할 게 있긴 한 걸까?
─ 참고로 조금 전 여러분이 쥬엘라 영애에게 행한 폭력과 폭언 모두 영상 구슬에 기록되었음을 알려 드립니다.
“그, 그걸 어째서!”
“폭력이라니!”
얼굴을 붉힌 채 소리치는 가족들을 잠시 바라보던 케이린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한마디 내뱉었다.
“오히려 잘된 거 아니에요?”
“뭐?”
“저딴 거! 더 이상 우리 집에 있을 필요 없잖아요!”
“……!”
악에 받쳐 소리치는 그녀의 말에 베이크스 백작과 그의 부인이 멈칫했다.
순간 당황해서 카밀라의 말에 득달같이 달려들긴 했지만, 케이린의 말대로 나쁜 일만은 아닌 듯했다.
그렇지 않아도 점점 갈수록 자신들과 맞지 않는 쥬엘라가 계속 신경에 거슬렸었다.
그래도 친딸로 알려진 그녀를 내칠 수가 없어 계속 데리고 있었는데, 이참에 연을 끊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물론 사람들에겐 쥬엘라가 친딸이 아니라는 사실과 파양하게 된 이유를 적절히 만들어 내야겠지만 그 정도의 수고쯤이야.
─ 쥬엘라.
“…응.”
그런 가족… 아니, 한때 가족이었던 이들의 생각을 고스란히 읽은 쥬엘라의 표정이 조금 전보다 더욱 짜게 식었다.
─ 15분 내로 베이크스 가문에서 네 이름이 지워질 거야. 즉 그때까지는 쥬엘라가 아니라 쥬엘라 베이크스 영애라는 거지.
잠시 말끝을 끊은 카밀라가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 웃음소리에 베이크스 가족의 얼굴이 다시 굳어졌다.
미치기라도 한 건가? 지금 이 상황이 웃겨?
왠지 모르게 불길한 기운이 다시 밀려들었다.
─ 네 실력은 황실에서도 눈여겨보고 있으니, 곧 단승 작위를 내리거나 다른 가문에 입적시켜서라도 타국으로 귀화하지 못하게 붙잡아 두려고 할걸.
물론 그거랑은 상관없이 우리 가문에서 계속 널 비호할 테지만 말이야.
─ 넌 앞으로도 귀족으로 살아갈 거고, 네 뒤엔 내가 있어. 여차하면 저치가 진 채무를 네가 뒤집어쓸 뻔했는데, 이대로 끝내긴 아쉽지 않아?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아차린 쥬엘라의 눈이 동그래졌다.
“너…….”
─ 그러니까…….
카밀라의 웃음소리가 더욱 짙어졌다.
─ 맘껏 패.
그 말을 끝으로 통신이 뚝 끊겼다.
그 대화를 모두 듣고 있던 네 사람의 표정이 동시에 일그러졌다.
“채무라니?”
지금 바닥에 흩어져 있는 저 서류를 말하는 건가.
“하!”
고작 저 정도를 못 갚아 다른 가족들에게까지 짐을 지우게 할 거라 생각한 건가? 자신을 대체 뭘로 보고!
“아무래도 오라… 맨티츠 영식께선 갚을 능력이 없어 보이니 백작님께 넘겨야 할 것 같군요. 이거 받으세요.”
“뭐?”
너무도 쉽게 호칭을 바로 바꾸는 쥬엘라의 모습에 베이크스 백작의 얼굴이 더욱 험악해졌다.
하지만 지금 가장 놀라워하고 있는 건 바로 쥬엘라였다.
그토록 아등바등 붙잡고 있었던 관계였는데, 우스울 정도로 미련이 남지 않았다.
어쩌면 오래전부터 마음속에선 이미 저들을 지우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기한은 한 달 드리겠습니다.”
쥬엘라는 들고 온 서류를 베이크스 백작과 맨티츠 앞에 내려놓았다.
낚아채듯 그것을 집어 든 베이크스 백작이 빠르게 서류를 읽어 내려갔다. 험악하게 일그러졌던 그의 표정이 점점 굳어 갔다.
“이… 이게 무슨…!”
엄청난 금액에 한 번 놀라고 문서 서명란에 적힌 아들의 이름에 두 번 놀랐다.
그리고 채무를 갚아야 할 상대의 이름에는 눈을 부릅뜬 채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네, 네가?”
방금까지 자신의 딸이었던 쥬엘라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녀의 서명란에 이미 베이크스라는 성은 보이지 않았다.
“한 달입니다. 그 사이의 이자는 그동안 키워 주신 값으로 치죠. 계산해 보시면 잘 알 겁니다. 오히려 제가 손해인 거.”
“너, 너!”
“야!”
기가 막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는 베이크스 백작을 대신해 맨티츠가 쥬엘라를 압박하듯 다가섰다.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감히 누구한테 돈 내놓으라는 거야! 뭐? 이자를 안 받아? 이게 진짜 미쳤나!”
언제나처럼 그가 바로 손을 들어 올렸다.
휙!
“……! 뭐, 뭐야! 아, 아아!”
하지만 그 순간 쥬엘라가 던진 뭔가에 맨티츠는 그대로 꽁꽁 묶여 버리고 말았다.
“오.”
카밀라가 혹시 모른다며 빌려준 마법 팔찌였다. 아끼는 물건인데 특별히 빌려주는 거라고 얼마나 강조를 하던지.
‘으스대는 모습이 귀엽긴 했지만.’
“너, 너! 이거 당장 풀어! 진짜 죽고 싶… 아, 아아!”
카밀라가 가르쳐 준 대로 쥬엘라가 손을 움직이자 그를 묶은 줄이 더욱 꽉 쪼이며 맨티츠에게 고통을 선사했다.
“뭐 하는 거냐! 당장 풀어라!”
“맨티츠! 맙소사! 너, 너! 맨티츠가 아파하잖니! 어서 풀어 주지 못해!”
베이크스 백작과 부인이 바로 쥬엘라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쳤다.
하지만 쥬엘라는 그들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 맨티츠에게 다가섰다.
“너! 이 망할……!”
짜악!
순간 방 안에 다시 정적이 흘렀다. 유독 뺨 때리는 소리가 크게 방 안을 울렸다.
쥬엘라에게 뺨을 맞은 맨티츠뿐만 아니라 소리치던 모든 이가 입을 멍하니 벌렸다.
퍼억!
“커억!”
쥬엘라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의 정강이도 있는 힘껏 걷어찼다.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그의 멱살을 확 낚아챈 쥬엘라는 그동안 쌓인 분노를 모두 토했다.
“그놈의 못된 손버릇.”
“으… 으.”
“카밀라가 그러더라. 도박이랑 여자한테 손대는 놈에게 쓸 약은 딱 하나뿐이라고.”
잠시 말을 멈춘 쥬엘라가 무심한 눈빛으로 맨티츠의 손을 바라봤다.
“손목을 확 잘라 버리라던데.”
“뭐, 뭐?!”
당장이라도 손목을 자를 듯한 쥬엘라의 차가운 시선에 맨티츠는 몸을 꽉 죄인 고통도 잊고 급히 숨을 들이켰다.
“한 달이에요. 그 안에 안 갚으면 그 못된 손목부터 받아 갈 겁니다.”
쥬엘라는 그 말을 끝으로 한때나마 가족이라고 불렀던 네 사람을 쭈욱 훑었다.
조금 전과 달리 방 안에 있는 그 누구도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런 쥬엘라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조금은 겁에 질려 있는 케이린에게 향했다.
“JL숍에서 네 예약은 안 받아.”
“……?! 무, 무슨 소리야!”
자신 쪽으로 한발 다가서는 쥬엘라의 모습에 순간 또 맞을까 움찔하던 케이린이 언제 겁을 먹었냐는 듯 버럭 소리쳤다.
“네가 뭔데! 내가 예약한 거야!”
“내 숍이니까.”
“그러니까 네가 뭔… 뭐?”
“주인인 내가 너한테 옷 안 팔겠다는데 문제 될 게 있어?”
케이린의 눈이 점점 커졌다. 지금 저 말은……!
“…네 숍?”
JL숍의 주인이 쥬엘라라고?
“멍청이.”
어릴 때 그렇게 인형 옷을 많이 만들어 줬거늘. 사람들이 입은 옷은 보고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다니.
‘언니! 언니! 인형 옷 너무 예뻐! 나도 입고 싶어!’
‘아직 큰 거는 못 만들어.’
‘그럼 나중에! 나중에 만들 수 있게 되면 내 것도 만들어 줘! 응?’
‘그래.’
‘와! 언니 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