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점괘보는 공녀님 (196)화 (196/215)

“뭐?”

“그거 들고 가서 확 밟아 버리라고.”

저번에 보니 손찌검이 아주 자연스럽던데? 한두 번 때린 솜씨가 아니더란 말이지.

‘우리 못난 라비 녀석도 손찌검은 한 적 없거늘.’

카밀라를 수도 없이 죽음으로 끌어들이고 툭하면 화를 내던 라비지만 단 한 번도 폭력을 쓴 적은 없다.

그건 소르펠 공작과 루드빌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아무리 사고를 치고 속을 썩여도 손을 올린 적은 없었다.

“그 인간이 어디 다른 데 가서도 함부로 손 올리든? 그럴 리가. 네가 옴짝달싹 못 할 거 아니까 자기 힘에 취해서 분수도 모르고 날뛰는 거야.”

천하의 개차반이라고 불리는 아르시안조차도 다짜고짜 주먹부터 내지르진 않는다.

‘하도 으르렁거리면서 물어뜯고 다니니까 망나니 이미지가 굳어졌을 뿐이지.’

아르시안에게 당한 녀석들을 살펴보면 둘 중 하나였다. 앞에서 깝죽거렸거나, 뒤에서 깝죽거렸거나.

말이 깝죽거린다지, 벨라크처럼 할 말 못 할 말 다 내뱉는 놈들이었고.

“네 오라비는 인성 자체가 글러 먹은 거야. 어디서 손찌검이람.”

도박, 폭력, 멍청함. 나쁜 것만 아주 골고루 갖췄다. 갱생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문제가 많은 인간이란 말이다.

‘역시 그때 평평한 구두 바닥이 아니라 뾰족한 굽으로 때렸어야 했거늘.’

가끔은 매가 약일 때도 있는 법인데 말이지.

그래도 아직 늦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아픈 매가 뭔지 알아?”

조금은 넋이 나가 있는 쥬엘라를 보며 가볍게 웃음을 터트린 카밀라는 도박 빚 서류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돈.”

“…돈?”

멍하니 말을 따라 하던 그녀의 눈이 점점 동그래졌다. 그제야 카밀라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아들은 거다.

그런 그녀를 향해 카밀라는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가서 맘껏 패고 와.”

* * *

“맨티츠!”

베이크스 백작이 던진 서류들이 방 안에 가득 휘날렸다.

“대체 이것들이 다 뭐냐!”

“여보, 진정해요.”

“지금 내가 진정하게 생겼소! 이 서류들 좀 보라고! 나한테까지 돈을 받으러 오게 만들다니! 금액도 적지가 않아!”

“맨티츠도 다 생각이 있겠죠. 그렇다고 애를 그리 몰아세우면 어떡해요. 애가 겁을 먹어 제대로 말도 못 하잖아요.”

“끄응.”

베이크스 백작은 아내의 말에 애써 분을 삼켰다.

하지만 베이크스 백작 부인의 말과 달리 맨티츠는 겁을 먹기는커녕 아주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오히려 짜증 어린 눈빛을 베이크스 백작에게 던졌다.

“뭐 그런 거 가지고 그렇게 화를 내세요?”

“뭐야?”

“그 정도 돈이야 금방 다시 채워 넣을 수 있어요.”

맨티츠는 베이크스 백작이 화를 내는 게 오히려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연신 불만을 토해 냈다.

“버러지 같은 것들! 고작 그게 얼마나 된다고!”

감히 아버지에게 빚 독촉을 하러 가?

그로서는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동시에 저렇게 화를 내는 아버지에게도 실망이었다.

도박을 하면 돈을 딸 때도 있고 잃을 때도 있는 게 아닌가. 다음에 몇 배로 따서 채워 넣으면 되는 것을.

“그래요, 여보. 남자가 도박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죠.”

“이 금액을 보라고! 지금 사업체 하나를 정리해야 할 판이야! 너 대체 내가 물려준 재산은 다 어쩌고 가문의 이름으로 빚을 진 거냐!”

“그, 그게…….”

뻔뻔하던 맨티츠라도 그 질문에는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베이크스 백작의 시선을 연신 피하기 바빴다.

“뭐예요, 아버지? 우리 집에 돈 없어요?”

그들이 싸우든 말든 남의 일처럼 한쪽에 심드렁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케이린이 그제야 반응을 했다.

“저 이번에 JL숍에서 옷 맞춘다고 했잖아요. 거기 옷 엄청 비싼데. 설마 취소하라는 거 아니죠? 간신히 예약한 거라고요!”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딸의 모습에 베이크스 백작과 그의 부인이 급히 그녀에게 다가섰다.

“걱정 마렴. 가서 맘껏 맞춰도 돼.”

“그럼. 우리 딸이 사고 싶다는데! 전혀 문제 될 게 없단다.”

“정말요?”

“그럼. 물론이지.”

마냥 귀여운 딸이 마음이라도 상할까 두 사람은 연신 그녀를 달래기 바빴다.

“오라버니는 대체 밖에서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예요? 나한테 피해는 주지 말아야 할 거 아니에요.”

“시끄러워!”

“맨티츠, 동생한테 소리치지 마라.”

“그래, 아들. 하나밖에 없는 동생인데 사이좋게 지내야지.”

두 사람을 달래며 베이크스 백작 부인은 눈으로 남편을 나무랐다. 쓸데없는 일로 괜한 분란을 만든 남편이 못마땅했다.

그깟 도박 빚이 뭐라고 애를 이렇게 잡는다 말인가. 대충 알아서 갚으면 될 것을.

똑똑.

그때 인기척과 함께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다. 쥬엘라였다.

그녀의 등장에 순간적으로 방 안의 공기가 냉랭해졌다.

다들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고, 케이린은 아예 입가에 비웃음을 머금었다.

“넌 지금껏 어디 있다 오는 거냐.”

“일이 좀 많아서요.”

“일? 무슨 일?”

베이크스 백작은 바로 미간을 찌푸리며 쯧, 혀를 찼다. 어찌 저리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는지.

“카밀라 영애와 친분이나 쌓을 것이지!”

“방금까지 카밀라와 함께 있었어요.”

“크흠.”

순간 할 말이 없어진 베이크스 백작은 헛기침을 연신 내뱉었다.

그 모습을 잠시 말없이 지켜보던 쥬엘라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향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서류들이 보였다. 조금 전 자신이 카밀라에게 받았던 문서와 별반 다를 게 없는 것들이다.

아마도 이게 카밀라가 말한 다른 빚이겠지?

“대체 도박 빚을 얼마나 진 거예요?”

쥬엘라가 빚을 들먹이자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인상을 썼다.

특히 맨티츠는 분노를 전혀 감추지 않았다. 쥬엘라에게 성큼 다가선 그는 손가락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툭툭 건드렸다.

“네가 뭔데 참견이야?”

“걱정돼서 하는 말이에요. 오라버니가 진 빚, 저게 다가 아니잖아요.”

“하.”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린 맨티츠의 손길이 더욱 거칠어졌다. 그의 손이 닿은 쥬엘라의 몸이 휘청거릴 정도였다.

“그러니까 네가, 아무것도 아닌 네가 뭔 상관이냐고.”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도 그 자리에 있는 누구 하나 맨티츠의 행동을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말이 맞는다는 듯 쥬엘라를 한심하게 바라봤다. 건방지게 또 오라비를 가르치려 하다니.

“대체 언제까지 그러고 사실 거예요?”

“뭐?”

“쥬엘라, 너 감히 그게 무슨 말이니? 버릇없이! 내가 널 그렇게 가르쳤니? 당장 맨티츠에게 사과하렴!”

쥬엘라는 어머니를 잠시 말없이 바라봤다. 말다툼이 일면 어머니가 다른 두 사람의 편을 드는 거야 늘 있던 일인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가슴이 답답할까.

화가 나기보다는 새삼 씁쓸한 마음이 먼저 들었다.

“그냥 쟤 나가라고 해요. 애초에 가족들끼리 얘기하는데 자기가 여길 왜 들어와? 진짜 눈치 없어.”

여전히 비웃음이 가득한 케이린의 말에 쥬엘라의 시선이 천천히 그녀에게로 향했다.

이것 역시 매번 듣는 말이었고 언제나 가볍게 넘겼었다.

아직 많이 어려서, 그들이 친자매가 아니라는 사실이 어린 저 아이에게 여전히 충격인지라 저러는 거라 스스로를 달래고 또 달랬다.

“두 분은 어디서 이런 걸 주워 와서……!”

짜악!

순간 방 안에 정적이 흘렀다.

쥬엘라에게 뺨을 맞은 케이린조차 고개가 돌아간 채 한동안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너… 너……!”

한참 후에야 케이린이 뺨을 감싼 채 쥬엘라를 돌아봤다. 케이린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라 있었다.

‘예전 같으면 당장 어쩔 줄 몰라 하며 그녀를 달랬겠지.’

실수였다고, 정말 미안하다고. 자신이 잘못했다며 빌고 또 빌었을 것이다. 케이린이 화를 풀 때까지.

하지만…….

“버릇없이.”

쥬엘라는 조금 전 어머니가 자신에게 한 말을 그대로 돌려줬다.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서늘함을 유지한 채.

그걸 본 케이린이 움찔하며 몸을 떨었다. 평소 늘 자신에게 져 주던 쥬엘라가 아님을 그녀도 그제야 느낀 것이다.

“쥬엘라!”

그제야 정신을 차린 베이크스 부인이 비명을 지르듯 다가와 쥬엘라를 힘껏 밀쳤다. 제 딸에게서 당장 떨어지라는 듯이.

“으… 으… 으아앙!”

어머니가 다가오자 케이린이 곧바로 울음을 터트렸다.

태어나 처음 맞아보는 것인 데다가, 그 상대가 쥬엘라라는 사실이 서럽고 수치스러운 것 같았다.

“이게 무슨 짓이야! 케이린에게 손찌검을 하다니! 감히! 네가, 네가!”

“오라버니는 늘 제게 손찌검을 하는데요.”

“그, 그건……!”

“오라버니에게 맞아서 입 안이 찢어졌을 때 어머니가 그러셨죠. 그러게 왜 윗사람에게 버릇없이 굴었냐고. 네 잘못이라고. 그래서 저도 케이린을 혼내 거예요. 윗사람인 저에게 방금 버릇없이 굴었으니까.”

“너, 너……!”

“어디서 말대꾸냐!”

부인이 제대로 말을 못 잇자 베이크스 백작이 급히 앞으로 나서며 쥬엘라를 향해 살벌하게 외쳤다.

“정말 구제 불능이구나! 당장 케이린에게 사과하거라!”

“으아앙!”

“저게 오늘 완전 미쳤네.”

“아버지 말씀 안 들리니? 당장 케이린에게 사과하렴!”

자신을 둘러싼 네 사람을 보며 쥬엘라는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입에서 이내 허탈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내가 그동안 지키려 한 게 고작 이거였나?’

그동안 참고 참았던 대가가 고작 이거라고? 대체 무엇을 기대했던 거지?

뭘 원해서 그동안 애써 참았던 걸까?

한참을 웃던 그녀가 품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통신 구슬이었다.

그것도 어딘가와 연결이 이미 되어 있는 듯, 환한 빛을 내뿜고 있는 통신 구슬을.

“카밀라.”

─ …말해.

통신 구슬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방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다들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이는 베이크스 백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통신을 왜 연결해 놓은 거지? 그것도 다른 이도 아닌 소르펠 공녀와?

처음부터 통신을 연결해 놓았던 거라면… 설마!

“아니, 그럼 방금 상황을……!”

카밀라, 그녀가 모두 다 들었단 말인가?

그래도 자신들의 잘못은 알긴 아는 듯 베이크스 백작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갔다.

최근에 그라시아 제국과의 거래를 위해 열심히 소르펠가의 문을 두드리고 있는 그의 입장에선 아주 난처한 상황이었다.

“카밀라, 네 말을 듣길 잘한 것 같아.”

─ …….

“너도 다 들었지?”

─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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