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투명한 액체가 담긴 작은 병이었다. 그 병을 본 다니엘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서서히 사라졌다.
“이게 뭔지 아시겠습니까?”
“…글쎄요.”
한 박자 늦은 대답이 흘러나왔다.
“이번에 오를레앙 자작이 썼던 그 액체입니다.”
사람 몸을 석상으로 만들었던 그 액체 말이다. 제이너가 이 액체를 다니엘 앞에 꺼낸 이유는 하나였다.
“일반인도 아닌 신을 따르는 자가 이런 액체를 다른 이에게 줘서 죄를 저지르게 했다면 그건 이단으로 몰려도 억울한 일은 아니겠죠?”
그 말을 끝으로 잠시 앞에 앉아 있는 다니엘의 표정을 살피던 제이너는 곧 다시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 액체, 다니엘 신관님께서 오를레앙 자작에게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뭔가 큰 오해가 있으신 듯합니다.”
“오해라.”
다시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제이너의 얼굴에선 더 이상 선함과 예의 따윈 찾아볼 수 없었다.
“면죄부를 교황께 팔자고 말한 것도 오해입니까?”
“…면죄부요? 그게 뭡니까?”
아주 잠깐 멈칫하긴 했지만 다니엘은 제이너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고개까지 갸웃거렸다.
“저희 교에서 그런 것을 사람들에게 팔고 있다고요?”
“알수록 재미있는 분이시더군요.”
짧게 웃음을 터트린 제이너는 그런 다니엘의 반응을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그저 덤덤히 말을 이어 나갈 뿐이었다.
“제가 재미있는 사람을 참 좋아하는데 말이죠. 어지간하면 그냥 넘어가 주려고 했습니다만.”
처음 시작은 오를레앙 자작이 쓴 이 액체였다.
그냥 개인적인 호기심이었다.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이 액체를 그가 어떻게 알고 구했을까?
반복되는 삶에서 오를레앙 자작과 얽힌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이를 잃은 부모의 의뢰를 받지 않았으니까.
딱 봐도 재미가 없어 보였거든. 사람을 납치해 살인하고 버리는 이들이야 세상에 널리고 널렸거늘. 굳이?
뭐,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몇 번은 부하에게 떠넘겼던 적은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번 삶에선 왜 맡았냐고?’
카밀라가 의외로 애들에겐 약하더란 말이지.
혹 애들을 죽인 놈을 처리하고 살아 있는 아이들을 구해 내면 칭찬이라도 해 줄까 싶었다.
어쨌든 그렇게 오를레앙 자작의 행적을 쫓던 제이너… 아니, 칸의 주인은 의외의 인물과 마주할 수 있었다.
신관 다니엘.
모처럼 아주 즐겁게 조사를 했다. 파면 팔수록 새로운 것들이 샘물처럼 터져 나오는 그에게 점점 흥미가 생겼다.
“쟈비엘라 황비님과도 알던 사이시더군요.”
황실까지 손이 뻗어 있다는 사실에는 정말 놀랐다.
쟈비엘라 황비가 그동안 꾸민 일에 역시나 다니엘이 깊이 관여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땐 다시 한번 그의 정체에 의문을 품었다.
대체 뭐 하는 자지?
“쟈비엘라 님은 가끔 심신이 지치셨을 때 기도를 부탁하셔서 제가 찾아뵙고 있습니다. 이 액체와 면죄부는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군요.”
“그런가요?”
이번에도 역시 다니엘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덤덤히 말을 이었다. 오히려 이런 오해를 하는 게 무척 안타까운지 제이너를 안쓰럽게 바라봤다.
그런 그를 보며 제이너의 입가에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가 다시 걸렸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던데?”
성물, 그 붉은 성물 말이다.
카밀라가 부탁해서 그 성물에 대해 조사를 시작했는데 신기하게도 그 끝에도 역시 다니엘 신관이 있었다.
그 성물이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카밀라의 반응을 보아 그다지 이로운 물건이 아닌 건 알 수 있었다.
그런 물건을 신전에 넘겨 팔게 한 이 역시 다니엘이라는 사실에 그는 한동안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물론 석상을 만드는 액체나 성물에 관련된 모든 것을 교묘하게 수많은 이들과 엮어 본인은 철저히 뒤로 빠져 있었다.
하지만 마음먹고 조사를 시작한 칸의 눈을 완전히 피하는 건 불가능했다.
‘단순한 신관이 절대 아니야.’
그런데 무척 아쉽게도 그가 알아낸 건 거기까지다. 그가 가면을 벗고 다니엘을 이렇게 직접 찾아와 건드리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마치 안개가 낀 것 같아.’
그를 쫓던 제이너는 뭔가에 가로막힌 것처럼 일정 부분에서 더 나아갈 수가 없었다.
분명 뒤에 뭔가 더 있는 건 알겠는데, 그걸 도저히 알아낼 수가 없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결국 직접 그를 건드려 보기로 한 것이다.
자신이 먼저 이리 정체를 드러내면서 아는 척을 하면 그 또한 뭔가 반응을 할 테니까.
그게 자신을 위험에 빠트리는 일이 될지도 모르지만 상관없었다. 자신이 언제부터 그딴 거에 신경을 썼다고.
‘그리고…….’
그가 이곳을 찾은 또 한 가지 이유.
“그대가 누구든, 무슨 짓을 하든 전 별 상관 없습니다.”
오히려 이 지긋지긋한 삶에, 수도 없이 같은 일만 반복된 자신의 삶에 특별한 사건을 만들어 준다면 오히려 감사할 지경이다.
‘뭐, 지금은 상황이 좀 달라졌지만.’
요즘에야 카밀라, 그녀 덕에 지루할 틈이 딱히 없어서 말이다.
“당신에 의해 누가 죽든 말든 더더욱 상관없고.”
다니엘 신관의 목적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건드리는 이들 중에 최근 눈에 거슬리는 이들이 포함되어 있다면 도움을 줄 용의까지 있었다.
‘물론 그녀는 절대 몰라야 하겠지.’
카밀라가 의뢰를 했음에도 아직 성물을 유통한 이가 다니엘이라는 사실을 그녀에게 알리지 않았다. 솔직히 알려 주고 싶지 않았다.
‘뭔가 아주 위험한 냄새가 나서 말이야.’
이건 오랫동안 같은 삶을 살아온 이의 감이다.
아주 지독한 악취가 난다. 그 또한 지금껏 한 번도 맡지 못한 섬뜩한 악취가…….
웬만하면 그녀가 끼어들지 않았으면 한다.
“다만, 카밀라.”
“…….”
“그녀 곁을 자꾸 알짱거리는 건 용납하지 않을 생각이어서.”
악취는 우리끼리 피우자고.
이렇게 찾아온 것도 그에 대한 정보를 캐는 것 외에 그녀에게 향한 시선을 자신에게 돌리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공자님께서 뭔가 크게 오해를 하고 계십니다.”
“거참, 오해든 뭐든 상관없다니까.”
마지막으로 픽 웃은 제이너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말귀 못 알아들으시나?”
그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그쪽이 뭔 짓을 하든 상관없다고. 그녀만 건드리지 않는다면 말이야.”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그러게요. 무슨 말일까요?”
이번에도 역시 한 박자 반응이 늦었지만 신관 다니엘은 끝까지 여유와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그런 그를 보며 제이너 역시 어느새 처음의 예의 바른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다음에는 회개 헌금을 들고 찾아뵙겠습니다.”
제이너는 정중히 인사까지 건네며 말을 이었다.
“제가 회개할 일이 참 많아서요.”
그의 눈매가 아주 곱게 휘었다.
“신의 사면이 실제로 있다면 저도 살 의향이 충분히 있는데, 정말 팔지 않는 겁니까?”
“…….”
“금액은 상관없는데 말이죠. 달라는 대로 얼마든지 줄 수 있습니다만… 무척 아쉽네요.”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다니엘이 건네는 인사를 받으며 제이너는 유유히 그 자리를 떠나갔다. 마지막으로 환한 미소를 날려 주면서 말이다.
“…….”
문이 천천히 닫히고 그렇게 제이너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다니엘의 얼굴이 급속도로 냉랭해졌다.
“진.”
잠시 후 그의 나직한 부름에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저자에 대해 알아봐라.”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진이라 불린 이는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그렇게 다시 홀로 남겨진 다니엘은 제이너가 사라진 곳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한동안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 * *
“왔어?”
카페에서 일을 보고 있던 카밀라는 어느새 눈앞에 서 있는 사신 하벨을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어 줬다.
“여기 앉아. 뭐 마실 거라도 줄까?”
오늘은 우리 카페가 깨끗한가? 걸레를 들고 안 설치네?
카밀라는 슬며시 웃으며 그에게 자리를 권했다.
“…….”
하지만 하벨은 입을 꾹 다문 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카밀라를 못마땅하게 바라볼 뿐이다.
‘그놈 참 눈빛하고는.’
평소보다 더 서늘한 눈빛을 한 그의 모습에 카밀라는 속으로 짧게 혀를 찼다. 도르만과 싸웠다더니 정말인가 보네?
‘그런데 왜 나한테 화를 내는 것 같지?’
내가 뭘 어쨌다고? 싸운 건 자기들이면서?
“왜 싸운 건데?”
“난 네가 정말 싫다.”
“응, 그래서 왜 싸웠냐니까?”
“너무너무 싫다!”
“알았다니까.”
뭘 그리 강조하니? 나도 너 별로 안 좋아해. 내가 그런 말 어디 하루 이틀 들은 줄 아니?
웃겨.
‘누구 덕에 평생을 저주 어린 말만 듣고 산 나야.’
연예계 생활할 때도 나 싫다는 애들 널리고 널렸었거든, 왜 이래?
‘네 녀석이 아르시안도 아니고.’
그런 말 듣는다고 내가 타격이라도 입을 것 같…….
‘…여기서 아르시안이 왜 나와?’
카밀라는 순간 자신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깨닫고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날 부른 이유나 말해라.”
그러다 다시 들리는 하벨의 음성에 멍청해졌던 표정을 급히 갈무리했다.
“싫다면서 부른다고 또 와 주긴 했네?”
“…간다.”
“알았어! 앉아, 앉아!”
역시 아무리 싸워도 도르만이 오라니까 오는구나?
카밀라는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도 연신 시선을 옆으로 흘리는 하벨의 모습에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엄마 오리한테 각인된 새끼 오리도 아니고.’
하벨의 시선이 닿는 그곳에 서빙 일을 돕고 있는 도르만이 있었다. 저럴 거면 가서 인사라도 건네든가.
“왜 싸웠냐니까?”
카밀라는 다시 같은 질문을 던졌다.
‘도르만, 저 녀석에게 물어봐도 그냥 웃기만 하니.’
아무리 생각해도 둘 사이에 싸움이 될 만한 일이 전혀 없었다.
도르만이 죽으라고 하면 시늉이 아니라 진짜로 죽을 녀석이잖아. 그것도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지금도 봐라.’
도르만의 눈치만 살살 보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저 모습을. 저런데 어떻게 싸움이 되느냐는 말이지.
“그런 적 없다.”
“도르만이 싸웠다던데.”
“싸운 거 맞다.”
“방금까지 싸운 적 없다며!”
“도르만 님이 싸웠다잖아. 그럼 그런 거다.”
“…아, 네.”
말을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