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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거 아냐? 내 모든 것이 거기에 있는데.”
평생을 연기를 하며 살았다. 연기하는 게 즐거웠고 천직이라 생각했다. 죽을 때까지 연기를 하며 살 거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아쉽고 그리운 건 당연한 거 아닌가?
“역시 그러시군요.”
도르만도 이미 짐작한 대답이었던 듯 여전히 웃음기 어린 얼굴로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시 돌아갈 기회가 있다면 잡으시겠어요?”
“너 자꾸 당연한 걸 물을래? 지금 시비 거는 거지? 불가능한 걸로 왜 사람 속을 자꾸 긁어?”
“하하.”
그가 다시 웃었다.
오늘 정말 이상하다. 왜 자꾸 쓸데없는 말을 내뱉는 건지 모르겠다.
‘밖에서 뭔 소리를 듣고 온 거야?’
의아한 눈빛을 마구 쏘아 보냈지만, 그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듯 그저 덤덤히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설 뿐이었다.
* * *
“크윽! 이 X 같은 X이!”
바닥에 쓰러져 있던 남자가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그는 자신의 머리를 매만졌다. 붉은 피가 흥건히 묻어 나왔다.
“X발! 내 이 X을!”
그가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눈을 희번덕 뜨는 순간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30대 중반의 여자였다.
그녀 또한 꼴이 말이 아니었다. 머리는 풀어 헤쳐져 있었고 옷도 다 찢어져 있었다.
그런 옷 사이로 보이는 여자의 온몸은 상처와 멍투성이였다.
“야! 이 죽일 X아!”
하지만 남자는 여자를 보는 순간 욕설부터 날렸다. 저게 오늘 돌았는지, 조금 전에 자신의 구타에 처음으로 반항을 한 것이다.
예상치 못한 저항에 비틀거리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술병에 그대로 미끄러져 쓰러지고 말았다.
하필 탁자에 머리를 부딪쳤는지 잠시 정신을 잃었다가 방금 깨어났고,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감히 남편에게 손을 대다니!
“네가 오늘 정말 죽어야 정신을 차리지!”
남자는 성큼 여자에게 다가섰다.
저게 아마도 요즘 덜 맞아 반항을 하는 것 같았다. 오늘 아예 끝장을 내 주마!
“음?”
그런데 뭐가 좀 이상했다.
평소라면 자신의 외침 한 번에 벌벌 떨었을 텐데, 지금은 들은 척도 않고 여전히 멍한 표정을 풀지 않고 있었다.
저게 벌써 겁을 먹고 정신 줄이라도 놓은 건가?
“야! 이게 지금 남편 말을 무시……!”
다시 소리치던 남자가 순간 멈칫했다. 그제야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피를 철철 흘리며.
그 사람의 얼굴을 본 남자는 그대로 입을 멍하니 벌렸다.
“내가 왜…….”
쓰러져 있는 이가 바로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이, 이게 뭐야!”
그제야 남자는 뭔가 이상함을 느끼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그 소리에 반응을 해 주는 이는 여전히 아무도 없었다.
“야! 이게 어떻게 된 거냐고!”
여자를 향해 습관처럼 손을 휘둘렀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자신의 손이 그대로 여자의 몸을 통과했기 때문이다.
“마, 말도 안 돼.”
남자의 표정이 다시 멍해졌다.
“설마… 내가 죽은 건가?”
당혹감은 곧 허탈함으로 변했고, 이내 그 허탈함은 분노로 탈바꿈했다.
조금 전 자신을 밀어서 넘어트린 게 바로 저년이었으니까!
“네, 네가 감히……!”
그 순간 힘없이 자리에 주저앉아 있던 여자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서더니 어딘가로 향했다.
주방이다.
설마 지금 이런 상황에 밥이라도 처먹을 생각인 건가?
온갖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소리를 지르고 있는데, 그녀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여자의 손에는 칼이 들려 있었다.
“야! 너 지금 뭐 하려고……!”
남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여자는 그대로 자기를 스스로 칼로 찔렀다.
“히익!”
갑작스러운 상황에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치기도 잠시.
“너, 너!”
곧 여자가 자신처럼 영혼이 되어 육체에서 빠져나오는 걸 본 남자는 당장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아크빌. 38세.”
움찔!
그런데 그 순간 낯선 음성이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 온몸이 굳어진 것처럼 모든 행동이 뚝 멈췄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니 처음 보는 두 남자가 서 있었다. 그중 한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크빌. 38세. 맞나?”
“다, 당신들은 누구요?”
“대답.”
“……! 마, 맞소.”
고저 없는 목소리에 아크빌은 이상하게 몸이 떨려 왔다. 아무런 반항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남자의 곁에 서 있던 다른 남자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막 영혼이 된 여자에게 한발 다가섰다.
“33세, 안즈 님 맞으십니까?”
“…네.”
여자가 한 박자 늦게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걸 체념한 모습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선 남자가 그녀의 축 처져 있는 손을 잡아 다독였다.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그 말에 여자가 빠르게 고개를 들어 남자를 바라봤다. 그녀의 눈빛이 갈 곳을 잃은 것처럼 쉴 새 없이 흔들렸다.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아주 잘 참으셨습니다.”
“그…….”
“네, 많이 힘드셨죠.”
처음 듣는 다정한 말에 여자의 눈에서 결국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런 여자의 손을 다시 남자가 따뜻이 다독였다.
“명부에 가면 재판을 받게 되실 겁니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인간들이 알고 있는 것과 달리 신께선 자살이라고 하여 무조건 벌하지 않으시니까요.”
교단에선 자살을 가장 큰 범죄로 여기지만 실상은 좀 달랐다. 자살을 한 이유가 재판에 아주 큰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으… 으흑.”
남자의 말에 여자는 울음을 터트리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는 편안하시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여자의 손을 꼭 한 번 잡아 준 남자는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여자의 모습이 빛과 함께 빠르게 사라졌다.
“그대 역시 재판을 받게 될 것이다.”
“다, 당연하지!”
여자가 사라진 곳을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남자, 아크빌의 귀로 냉랭한 사신의 음성이 파고들었다.
그 소리에 번뜩 정신을 차린 그는 아주 당당하게 외쳤다.
생각해 보니 자신이 저들을 무서워할 이유가 전혀 없지 않은가? 고작 영혼이나 데리고 가는 이들인 것을.
“날 죽인 저것도 재판을 받고 좋은 곳으로 간다는데 당연히 나도 그래야지!”
그런 남자의 뻔뻔한 모습에 사신 하벨은 답지 않게 말을 덧붙였다.
“원래 그대는 재판 없이 바로 지옥행이었다.”
“…뭐라고?!”
지, 지옥행?
“하지만 오래전 그대의 부인이 신께 진심으로 그대를 위한 기도를 올린 적이 있지. 그 덕에 재판이라도 받게 된 것이다.”
그래 봐야 지옥행이라는 사실이 바뀌지는 않겠지만.
뒷말을 삼킨 하벨은 당황하는 남자를 향해 빠르게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남자 역시 순식간에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마지막에 보인 남자의 눈빛이 두려움에 떨리고 있었지만 자신이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선배님!”
영혼 인도가 끝나자 사신 킨이 반갑게 하벨에게 다가섰다. 천성이 밝은 녀석답게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다.
“오랜만에 같이 일하니까 너무 좋아요. 다음번 일도 이랬으면 좋겠네요. 같은 장소에서 두 영혼을 동시에 인도!”
“…….”
신이 나 떠드는 사신 킨의 말에도 하벨은 별다른 반응이 없다. 그저 무심한 눈빛으로 침묵을 유지할 뿐이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높아졌던 톤을 한층 내린 킨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평소에도 말수가 적고 분위기가 무척 무거운 하벨이지만 오늘따라 그 정도가 더 심해 보였다. 그래도 인사 정도는 늘 잘 받아 줬는데 말이지.
“기분 좋으실 줄 알았는데.”
“내가?”
그제야 하벨이 처음으로 반응을 보였다.
“네, 최근에 아주 좋은 소식이 들려오던걸요? 도르만 님이 곧 돌아오신다면서요? 정말 잘된 일이잖아요!”
사신들 사이에선 관리자 도르만이 제법 인기가 많았다.
그는 늘 유쾌했고 다른 관리자들과 달리 사신들을 무시하지도 않았다. 융통성도 뛰어나 곤란에 빠진 사신들을 종종 도와주기도 했다.
그에 오래전 그가 파면당했을 때, 다들 안타까움을 표하기 바빴다. 그를 구제하고자 서명 운동을 벌이는 이들도 있었다.
모든 일에 실수가 없고 나름 철저하던 그가 영혼을 잘못 집어넣는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다들 믿기 힘들어했다.
어떤 이들은 그가 관리직에 회의감을 느껴 일부러 큰 사고를 쳐 쫓겨났다는 말을 떠들기도 했다.
어쨌든 그 사건으로 파면당해 관리직에서 완전히 물러났던 그가 모든 일을 수습하고 드디어 돌아오게 된 것이다.
그 사실을 이미 알 만한 이들은 다 알고 있었다. 그런데 누구보다 기뻐해야 할 하벨의 분위기가 이상하지 않은가.
사신들 사이에서도 하벨은 무척 유명했다. 선배, 후배, 상사 가리지 않고 그와 제대로 대화를 나누는 이가 없었다.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니었다. 그가 상대를 해 주지 않으니까.
누가 말을 하든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무시하기 일쑤였다. 그런 그가 유일하게 따랐던 이가 바로 도르만이다.
“혹시 도르만 님 돌아오시는 데 다른 문제라도…….”
“돌아오시지 않을지도 모른다.”
“네에?”
“…….”
“아니, 왜요? 무슨 일인데요?”
파면당했던 이가 다시 돌아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도르만은 관리자로 있을 때 그 능력이 매우 특출하였기에 이런 일도 가능한 거였다.
그런데 그 일이 틀어지다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도르만 님이 거절하신 거예요?”
그때 그 소문이 맞았던 건가? 관리직이 싫어서 일부러 큰 실수를 해 쫓겨난 거라던 그 소문.
하지만 하벨은 거기에 대해 더 떠들고 싶지 않은 듯 입을 꾹 일자로 다물었다.
‘도르만 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뭐가?’
‘고작 한낱 인간을 위해 그 기회를 포기하시겠다고요?’
‘한낱 인간이 아니라 내 실수로 인생이 꼬인 인간인데.’
‘그 일에 대한 대가는 충분히 치르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왜……!’
‘충분히라. 그건 누가 정한 건데?’
‘도르만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