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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괘보는 공녀님 (180)화 (18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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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짐작대로 전력을 다하지 않은 건 맞다. 하지만 조금만 더 시간이 흘렀다면 그런 여유 따위 부릴 수 없었을 것이다.

‘마검사는 확실히 좀 버겁지.’

제대로 저자와 붙어 봐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싱겁게 돌아서는 그의 모습에 제이너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카밀라, 그 이름 하나면 다 끝나는 건가?”

정말 더 이상 볼일 없다는 듯 어느새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 아르시안을 떠올리며 그의 입매가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거슬리는 것들이 여기저기 천지네.”

* * *

“쯧.”

회의가 끝난 후에도 그 자리를 쉬이 떠나지 못하고 자리에 앉아 있던 스테라 추기경은 연신 혀를 찼다.

‘결국 이렇게 그냥 넘어가는 건가?’

카밀라가 심판의 검을 교황청으로 보낸 이후 그녀를 이단으로 몰아가던 말이 쏙 들어가 버렸다.

결국 오늘 회의도 별다른 결론 없이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가만두면 안 되는데.’

스테라 추기경은 그날, 그녀가 한 말이 목에 가시가 팍 박힌 것처럼 영 거슬리고 껄끄러웠다.

신의 계시를 받았다며 자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던 그녀의 눈빛이 아직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다 알고 있는 건가?’

어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저지른 일들에 대해 그녀는 너무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계시?’

그건 절대 믿을 수 없었다. 신이 그런 걸 그녀에게 가르쳐 줄 리가 없지 않은가.

자신은 한평생 모든 걸 바쳐 신을 모셔 온 몸이다. 고작 그런 일을 좀 저질렀다고 하여 신이 자신을 버릴 리가 없었다.

“감히.”

어디선가 주워들은 정보로 자신을 협박하려 하다니. 당장 이단 심문관을 보내 그녀를 잡아들이고 싶었지만 일이 귀찮게 꼬였다.

오늘도 누구 하나 회의에 그녀에 대한 안건을 제대로 꺼내는 이가 없었다.

다시 한번 혀를 찬 스테라 추기경은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미 모두가 떠난 회의장에 계속 남아 있어 봐야 카밀라, 그녀에 대한 처리가 마무리 지어지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은밀히 처리라도 해야 하는 건가?’

공개적으로 처벌을 할 수 없다면 다른 방법이라도 찾아야지 않겠나 싶다.

가짜 신성력으로 사람들을 속이고 있는 그녀를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두 번 다시 헛소리를 지껄이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그녀의 신분이 문제로군.’

다른 곳도 아니고 제국을 수호하는 가문이라 불리는 공작가를 건드리는 건 그로서도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친딸이 아님에도 소르펠 공작이 제법 그녀를 많이 아끼더란 말이지. 이리저리 고민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타앙!

“추, 추기경 예하!”

그때 회의장 문이 벌컥 열리며 한 사제가 다급히 뛰어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본 스테라 추기경의 미간이 바로 찌푸려졌다.

“자신의 직분을 잊은 겁니까. 늘 정숙하라고 하였거늘.”

“죄, 죄송합니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사제가 급히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할 말이 매우 급한 듯 그는 다시 서둘러 추기경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것 좀 보십시오.”

“……?”

“이런 게 신전 주변에…….”

벽보였다. 못마땅한 눈빛으로 벽보에 적힌 내용을 읽어 내려가던 스테라 추기경의 표정이 빠르게 굳어졌다.

“이, 이게 무슨……!”

“현재 이런 벽보가 신전 곳곳에 붙었습니다.”

“곳곳에?!”

벽보에는 그간 저와 신전이 행한 일들이 아주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어린 사제부터 시작해 신관 후보생들까지, 수많은 이들을 추행하고 성폭행해 자살까지 이르게 했다는 악행이!

「…어린 사제부터 신관 후보생까지, 수많은 이들에게 모욕감과 수치심을 주어 자살에까지 이르게 했다.

이 모든 일은 교단의 큰 어른인 스테라 추기경의 묵인하에 벌어졌으며, 추기경 본인 역시 이 비윤리적인 행위에 적극적으로 가담했…….」

“감히 누가 이런 헛소리를!”

스테라 추기경은 벽보를 그대로 구기며 노성을 토해 냈다.

“당장 벽보들을 모두 뜯어내세요!”

“아, 알겠습니다.”

“끄응.”

사제는 급히 밖으로 뛰어나갔다. 구겨진 벽보를 바라보는 스테라 추기경의 눈동자가 갈 곳을 잃은 것처럼 쉴 새 없이 흔들렸다.

하지만 곧 그의 눈에 분노가 일기 시작했다. 당장 이 벽보를 붙인 자들을 잡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것들만 잡으면…….”

고문을 해서라도 거짓을 유포했다는 자백을 받아 내면 이번 일은 말끔히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지게 될 것이다.

“그래, 걱정할 거 없어.”

하지만 보름이라는 시간이 지났을 때 그는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안일했는지 뼈저리게 느껴야만 했다.

* * *

“스테라 추기경님, 지금 상황이 어떤지는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헛소문입니다.”

첫날 벽보가 붙은 이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제국 안에 자리한 신전 곳곳에 같은 내용의 벽보가 붙었다.

‘빌어먹을!’

스테라 추기경은 어떻게든 벽보를 붙이는 이들을 잡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다.

성기사 동원은 기본이고 은밀히 정보 조직과 암살 조직에까지 그들을 잡아 달라 막대한 금액을 걸고 의뢰를 넣었다.

하지만 유령처럼 흔적을 전혀 남기지 않은 채 순식간에 벽보를 붙이고 사라지는 이들을 도저히 잡을 수가 없었다.

밤새 감시를 해도 어느 사이 벽보가 온 사방에 붙어져 있으니 정말 환장할 노릇이었다.

“이 벽보에 적힌 내용이 정말 헛소문이 맞습니까?”

결국 스테라 추기경에 대한 심문회가 열렸다.

교황까지 자리한 회의장 안에는 무거운 공기가 가득 차올랐다. 이번 벽보 사건으로 인해 신전에 대한 이미지가 완전히 실추되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죄가 없음을 꼭 밝히겠다고 하여 보름이라는 시간을 주었지만 오히려 상황만 더 악화되었다.

당장 이번 일을 해명하라는 말들이 사방에서 쏟아졌고, 신도들의 분위기도 심상치 않았다.

“저를 음해하려는 자들의 수작입니다!”

일반 사제나 다른 신관이었다면 당장 조사가 진행되고 죄를 묻는 재판이 열렸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추기경이다.

그에 시간을 주었던 것이고 지금도 일단 그의 말을 듣기 위해 비상 회의가 먼저 진행되었다.

“이번 일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주신을 모독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회의는 지지부진했다. 스테라 추기경이 여전히 강력히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범죄를 저질렀다는 증거도 딱히 없었다. 벽보에 거론된 이들이 자살을 한 건 맞지만 그 이유가 스테라 추기경 때문이라는 건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한 가지 방법이 있지요.”

그때 회의 내내 조용히 자리에 앉아 있던 한 사람, 마르티오 추기경이 입을 열었다.

추기경이라는 큰 직책을 맡고 있지만, 공식적인 행사에 나서기보다 일반 사제들과 함께 선교 활동을 주로 하는 인물이었다.

“심판의 검이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심판의 검이요?”

“설마 지금 그 검을 사용하자는 겁니까?”

그의 말에 회의장 안이 술렁거렸다.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쉽게 거론하지 못하고 있던 물건.

“오래전에는 교인의 죄를 모두 심판의 검이 판단하였지요.”

“하, 하지만 심판의 검의 진위 여부가 아직 확실하지가……!”

“그러니 이번에 확인을 해 보는 게 어떻습니까?”

“예?!”

마르티오 추기경의 차분한 말에 회의장 안이 순식간에 고요한 침묵에 휩싸였다. 그는 고개를 돌려 상석에 앉아 있는 브리셀 교황을 바라봤다.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이렇게 헛된 시간을 낭비하느니 심판의 검으로 이번 일을 깔끔히 마무리하시지요.”

“흠.”

잠시 고민을 하던 교황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은 의견이다.

안 그래도 심판의 검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하고 싶었던 차다. 그 검을 잡아 보겠다는 이가 없어 곤란하였는데 마침 잘되었다 싶다.

“아무래도 그게 좋을 듯하군요.”

교황의 결정에 사람들은 우려와 호기심을 동시에 드러냈다.

카밀라가 찾아온 심판의 검이 정말로 성녀 아레나가 쓰던 그 검이 맞는 것인지 다들 궁금해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심판의 검이 진짜로 판명이 났을 때 그 후의 일이 두려웠다.

앞으로 교단에 속한 모든 이들이 심판의 검 앞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저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스테라 추기경 역시 그 말에 동의했다.

처음에는 심판의 검을 사용하자는 말에 잠시 속으로 당황했지만 생각해 보니 오히려 잘된 일인 것 같았다.

카밀라가 보낸 심판의 검이 가짜라고 확신했으니까.

오랜 세월 교단이 모든 인력을 동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찾지 못한 그 검이다. 그것을 어떻게 한낱 영애 따위가 찾을 수 있단 말인가.

분명 가짜를 만들어 보내서 자신들을 혼란에 빠트리려 한 게 분명하다.

‘이번 일로 모든 게 조용해지겠어.’

심판의 검이 가짜인데 두려울 게 뭐란 말인가. 성전에 나와 있는 능력 따위 전혀 발휘되지 않을 텐데.

이는 오히려 자신의 무죄를 주장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심판의 검이 준비되었습니다.”

잠시 후 심판의 검이 스테라 추기경 앞에 놓였다.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검을 집어 들었다.

망설임을 보이는 것 자체가 자신의 죄를 스스로 고하는 꼴이다. 주저하는 모습 따윈 절대 보일 수 없었다.

“저는…….”

검을 손에 꼭 쥔 그는 단호하게 외쳤다.

“저는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주신에게 반하는 그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나이다. 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합니다.”

경건하게 말을 끝맺은 그는 오른손에 들린 검을 바라봤다. 역시나 검에선 그 어떤 반응도 일어나지 않……!

우우웅!

“……!”

스테라 추기경의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심판의 검이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진동하더니 환한 빛이 순식간에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마, 말도 안 돼!”

스테라 추기경은 저도 모르게 지금 상황을 큰 소리로 부정했다.

하지만 그 외침에 귀를 기울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다들 심판의 검에 모든 시선과 정신을 뺏긴 상태였기 때문이다.

저 검이 정말로 심판의 검이 맞았단 말인가! 아니, 더 이상 의심은 무리였다.

저 신성한 빛을, 힘을 어찌 가짜라 주장할 수 있단 말인가!

“으… 으윽!”

스테라 추기경은 바로 검을 집어 던지려 했다.

하지만 검을 쥔 손은 전혀 자신의 의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 제 맘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다음 순간 그의 눈이 부릅떠졌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검이 왼쪽 가슴을 향해 움직였다.

“아, 안 돼!”

스테라 추기경은 이게 무슨 뜻인지 곧바로 알아챘다.

검이 판결을 내린 거다! 자신을 죽이는 것으로!

안색이 하얗게 질린 그는 다급하게 외쳤다.

“제가!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 모든 게 사실입니다! 저기에 적힌 내용 모두 제가 한 짓이 맞습니다!”

스스로 죄를 고해하고 회개하면 심판의 검은 분명 죄인을 용서한다고 했다!

스테라 추기경은 그 사실을 떠올리곤 바로 진실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그러니 제발 용서를……!”

하지만 이미 너무 늦은 고백이었다.

그의 절박한 외침에도 심판의 검은 처벌을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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