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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괘보는 공녀님 (176)화 (176/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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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넌 빨리 쾌차하는 것만 신경 쓰렴.”

“아버지 말이 맞아.”

“저딴 것들에게 휘둘릴 필요 없어.”

소르펠 공작 하나만으로도 상대하기 벅찰 지경인데 루드빌과 라비, 거기에 아르시안까지 번갈아 나가 그들을 압박하고 있는지라 카밀라를 만나고 싶다는 말도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교단에서 지시한 일을 마무리도 짓지 못한 채 돌아갈 수도 없는 일, 결국 몇 날 며칠을 밖에서 진을 치는 중이다.

‘헉!’

무심코 고개를 들었던 카밀라는 창가에 있는 듯 없는 듯 서 있던 제이너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그가 방긋 웃더니 창밖을 힐끔거리며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하는 게 아닌가.

그 모습에 카밀라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 무슨 뜻인지 바로 알아들었으니까.

‘죽이지 마!’

지금 밖에서 귀찮게 굴고 있는 교단 사람들을 암살해 주겠다는 뜻이었다. 카밀라의 입에서 짧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저들이야 저럴 만하지.’

눈치가 없긴 한데. 교단에서 저러는 거, 충분히 이해는 간다.

‘누굴 탓하겠어.’

다 내 무지에서 벌어진 일인 것을.

“에휴.”

다시 짧은 한숨을 내쉰 카밀라의 시선이 슬쩍 한곳으로 향했다.

[날씨 좋네.]

창가에 쪼그리고 앉아 방 안에 들어오는 햇살을 맘껏 즐기고 있는 사제 귀신의 모습이 보였다.

아레나 아길라스. 마지막 성녀.

‘그래, 성녀.’

그것도 엄청난 신성력으로 수많은 사람을 살린 진정한 성인이라 칭해지는 존재가 바로 그녀다.

아직도 그녀를 칭송하는 이들이 수두룩했다. 최고의 성직자를 얘기할 때 열에 아홉은 그녀를 꼽을 정도다.

종교에 전혀 관심이 없던 카밀라조차 그 이름을 오며 가며 들어 알고 있을 정도면 말 다 한 거 아니겠는가.

‘그런 그녀의 신성력이 발휘되었으니.’

어찌 사람들이 가만히 있겠냐고.

듣기로 그날, 자신이 내뿜은 신성력을 느낀 이들이 수도 없이 많았단다.

그 자리에 있던 이들뿐만 아니라 신성력을 감지할 수 있는 모든 이들이 그 기운을 느꼈다는 것이다.

몇몇 이들은 신이 직접 강림이라도 한 줄 알았다나 뭐라나.

[내가 원래 좀 대단해.]

인정. 재수 없지만, 완전 인정!

그런 것도 모르고 함부로 몸에 들어오라고 했으니. 내 발등을 내가 찍은 거다.

‘게다가 저 모습이 어떻게 70대 노인이냐고.’

더욱 놀란운 건 그녀의 나이였다.

아레나가 숨을 거둔 건 정확히 79세였다. 80대를 눈앞에 두고 죽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그녀의 모습 좀 봐라. 저게 어떻게 70대 노인일 수 있냐고. 아무리 많이 봐줘도 20대 후반을 넘어 보이지 않았다.

[신의 사랑을 받으면 늙지를 않아.]

그 사랑! 저도 받아 보고 싶습니다!

‘와, 씨.’

당신들 진짜 사람 차별하는 거 아냐!

누구는 그렇게 개고생을 시키더니, 누구는 얼마나 큰 사랑을 줬기에 저리 탱탱함을 유지하는 건데!

역사서에도 남아 있긴 했다. 신의 가호를 받은 성녀 아레나는 죽을 때까지 젊음을 유지했다고.

물론 저 정도일 줄은 정말 몰랐지만. 저 모습을 보고 있자니 없던 신앙심도 마구 생길 것 같은데?

“공작님.”

그때 문이 열리며 집사 루브가 급히 안으로 들어섰다. 평소 그답지 않게 조금 당황한 모습이다.

“무슨 일인가?”

“손님이 뵙기를 청하십니다.”

“손님?”

대체 누구기에?

소르펠 공작이 못마땅한 기색을 바로 드러냈다. 카밀라가 완전히 쾌차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다고 전했는데?

“교황께서 오셨습니다.”

“…누구?”

“교황 브리셀 님이 가주님과 카밀라 아가씨를 뵙길 청하고 계십니다.”

교황 브리셀이 직접 방문했다는 소리에 소르펠 공작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놀람도 잠시, 그의 미간이 바로 일그러졌다.

“하.”

일그러졌던 얼굴은 이내 싸늘해졌고 그가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 표정이 마치 화풀이할 곳을 찾은 이 같다.

“마침 잘됐군. 할 말이 아주 많았는데 말이야.”

그 말이 신호가 된 듯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몸을 일으켰다. 다들 그동안 쌓였던 스트레스가 많았던 건가?

‘아니, 교황이 왔다는데 다들 검은 왜 집어 드는 건데요? 네?’

교황과 전쟁이라도 한판 치를 기세다.

“잠시만요!”

카밀라는 그런 그들을 서둘러 붙잡았다. 계속 자신으로 인해 이런 소란이 이는 건 정말 사양하고 싶었다.

게다가 다른 이도 아니고 교황까지 직접 찾아왔다지 않은가. 계속 피하는 건 아무래도 좀 아닌 것 같지?

“제가 만나 볼게요.”

* * *

“크흠.”

“흠, 으흠.”

응접실로 안내받은 교단 측 사람들은 연신 헛기침을 내뱉었다. 대신관이고 추기경이고 다들 눈빛이 쉴 새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나마 덤덤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건 교황 브리셀뿐. 하지만 그 역시 속으로 연신 마른침을 삼키고 있었다.

“차들 드세요.”

“아, 네, 영애.”

“감사합니다.”

카밀라가 차를 권했음에도 쉽게 손을 뻗는 이가 없었다. 자신들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시선에 절로 몸이 경직되었다.

자신들과 대화도 하기 싫다는 뜻을 온몸으로 표하고 있는 이들. 자리에 앉지도 않은 채 카밀라를 호위하듯 쭉 둘러싸고 있는 이들.

소르펠 공작을 비롯해 루드빌과 라비, 거기에 아르시안까지 당장이라도 공격을 퍼부을 듯한 기세다.

‘저 사람은 대체 누굽니까?’

‘글쎄요.’

게다가 응접실 구석에 서 있는 한 사람. 사람을 홀리는 미소를 짓고 있는 제이너 또한 묘하게 신경을 자극하며 존재감을 내보이고 있었다.

‘그러게 따라오지 말라니까.’

난처하기는 카밀라도 마찬가지였다. 혼자서 해결하고 오겠다고 했음에도 굳이 저리 다 따라 들어올 게 뭐란 말인가.

“절 만나고 싶어 하셨다고요.”

카밀라가 빙긋 웃으며 입을 열자 그제야 굳어 있던 사람들의 표정이 살며시 풀렸다.

그나마 그녀가 훈훈한 분위기로 맞아 주니 이 얼마나 다행인가.

“몸은 좀 어떠신지.”

“보다시피 많이 좋아졌어요.”

“정말 다행입니다.”

간단히 안부를 묻는 것으로 대화를 주도한 이는 스테라 추기경이었다.

“성녀님을 모시러 왔습니다.”

그 말을 시작으로 대신관과 다른 사제들 또한 달려들듯 그동안 참았던 말들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이미 직분을 받을 준비는 모두 마쳤습니다.”

“성녀님께선 저희를 따라 교황청으로 가시기만 하면 됩니다.”

“많은 사람이 성녀님이 하루속히 돌아오시기를 손꼽아 바라고 있지요.”

그녀가 자신들을 따라가는 것을 기정사실처럼 말하자 순간 응접실 안 공기가 다시 싸해졌다.

교단 사람들도 그걸 느낀 듯 움찔 몸을 굳혔다. 카밀라의 뒤에 서 있던 이들이 동시에 살기 어린 기운을 내뿜은 것이다.

다시 고요한 침묵이 흐르며 여기저기서 마른침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 하나 쉬이 입을 열지 못한다.

“성녀는 신의 선택을 받은 자이지요.”

그래도 교황은 교황이라는 건지, 안색이 하얗게 질려 말문이 닫혀 버린 이들을 대신해 교황이 나직한 음성으로 침묵을 깼다.

그의 입가에는 누가 봐도 마음이 푸근해지는 미소가 가득 지어져 있었다. 카밀라를 바라보는 눈빛도 무척 부드럽다.

“영광스러운 자리이고 축복받은 일입니다. 영애께도, 저희 교단에도. 자부심을 가지셔도 됩니다.”

“자부심이라.”

카밀라의 입가에도 미소가 그림처럼 예쁘게 그려졌다.

그 미소가 긍정적인 대답이라 여긴 듯 교황의 표정 또한 더욱 부드러워졌다.

“언제부터 직책을 수행하시겠습니까.”

“안 할 건데요.”

“…네?”

“그 직분, 안 받겠다고 했습니다.”

교황의 얼굴에서 서서히 미소가 사라졌다.

‘호오.’

웃을 땐 몰랐는데 저리 표정이 굳으니 생각보다 인상이 무척 날카롭네?

“서, 성녀님!”

“직책을 안 받으시겠다니요!”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조용히 있던 다른 이들이 다시 기겁하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그런 신성력을 발휘하고도 직분을 받지 않겠다니, 전무후무한 일이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성녀는 신이 내린 직책입니다.”

교황의 목소리가 한층 더 낮아졌다. 그는 단호한 눈빛으로, 조금은 카밀라를 나무라듯 말을 이었다.

아직 그녀가 너무 어려 자기가 현재 처한 상황이 어떤지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제가 정말 그 직책을 받아도 될까요?”

“무슨 말씀입니까? 성녀님!”

“당연한 말씀을!”

잠시 뜸을 들이듯 생각에 잠기는 모습을 보인 그녀가 앞에 앉아 있는 이들을 한 번 쭈욱 훑었다.

“계시를 받긴 했습니다.”

“네에?!”

“지금 계시라고……!”

‘계시’, 그 한마디에 순간 방 안의 공기가 다시 한번 바뀌었다. 교단 측 사람들은 눈을 부릅떴다.

신의 계시는 그 어떤 것보다 최우선이고 중요시되는 사항이었으니까.

카밀라의 주변에 서서 상황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소르펠 공작과 다른 이들 역시 놀란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계시라니? 예지몽이라도 또 꾼 것인가?

그녀의 예지몽에 대해선 이미 다들 겪어 본 일이기에 가볍게 넘길 수 없었다.

그런데 좀 의아한 부분이 있었다. 지금껏 카밀라가 예지몽을 말할 때 그 꿈에 대해 ‘계시’라는 표현을 쓴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계시라 하셨습니까?”

이번에도 당혹스러운 공기를 깨트리며 교황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의 표정이 여전히 무거웠다.

솔직히 그는 오늘 이 자리에 결코 오고 싶지 않았다. 성녀라는 존재 자체가 무척 껄끄러웠으니까.

‘예전 같은 일이 또 반복되면 안 되거늘.’

오래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한 성녀가 있었다.

아레나 아길라스. 그녀의 등장에 사람들은 열광했지만 교황 쪽 사람들은 긴장했다.

그녀의 입지가 단단해질수록 교황의 영향력은 점점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어느새 성녀의 말이 교황의 말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하였고, 사람들은 점점 교황이 성녀의 아래에 있다고 여기기 시작했다.

성녀의 존재는 동전의 양면과 같았다. 교단에 득이 되기는 하나, 마냥 데리고 있기에는 껄끄럽다. 그럼에도 절대 버릴 수는 없었다.

그 막대한 신성력과 존재감은 교의 힘을 키우고 사람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아주 큰 요소였으니까.

가장 좋은 방법은 하나다. 자신의 밑에 두고 철저히 감시하는 거. 하나부터 열까지 자신의 지시에만 움직이게 만드는 거.

그래서 이곳에 직접 오지 않으려 했다. 교황인 자신이 먼저 움직여 만남을 청하는 것 자체가 한 수 접고 들어가는 꼴이었으니까.

하지만 카밀라 공녀는 고사하고 소르펠가의 문턱조차 넘지 못했다는 소리에 직접 올 수밖에 없었다.

어찌 되었든 성녀를 이대로 그냥 외부에 둘 수는 없었으니까. 현재 교단의 움직임과 성녀를 지켜보는 눈들이 무척 많았다.

다른 속셈도 있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녀를 교단으로 데리고 가고자 했다.

카밀라 소르펠의 모든 걸 자신의 주관하에 이루어지게 하여 그녀의 소속이 교단이 아닌 자신에게 있다는 걸 확실히 해 두는 것도 좋다 여겼다.

‘그런데 이 여자는…….’

처음부터 뭔가 어긋난 느낌이 든다.

쉽게 자신의 지시를 받을 것 같지가 않다. 직책을 받으라는 첫 명부터 거부하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심기가 편치 않았다.

‘게다가 계시?’

자신은 한 번도 받지 못한 신의 음성을 정말로 들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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