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프라가의 영식께서도 함께 오셨군요.”
다니엘은 아르시안을 바로 알아봤다. 하긴, 워낙 눈에 띄는 외모니까. 못 알아볼 수가 없겠지.
“그리고 이분은… 에스크라가의 제이너 님 맞으시죠?”
신기한 건 제이너의 신분도 바로 알아봤다는 거다. 그라시아 제국의 귀족인 그를 어찌 아는 것인지 의아했다.
“아주 오래전에 포교 활동으로 그라시아 제국에 간 적이 있지요. 그때 멀리서 한 번 뵌 적이 있습니다.”
카밀라의 의문을 다니엘이 풀어 줬다.
“그런데 갑자기 어쩐 일이십니까?”
그의 물음에 카밀라는 집에까지 가서 들고 나온 부서진 목걸이를 꺼내 놓았다. 일전에 다니엘에게서 받은 것이었다.
오를레앙 자작이 갖고 있던 목걸이는 지금 꺼내 놓을 수 없으니까.
“이건……!”
붉은 돌, 교의 성물이 부서져 있는 걸 본 신관 다니엘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미소가 사라졌다.
“죄송해요. 제가 실수로 망가트리고 말았답니다.”
“실수로요?”
다니엘의 눈이 살짝 커졌다. 뭔가 묻고 싶은 게 아주 많아 보였다. 하지만 표정을 빠르게 갈무리한 그는 바로 고개를 숙였다.
“아무래도 제가 문제가 있는 성물을 드렸나 봅니다. 새로 드리지요.”
그는 다른 사제를 바로 불러 성물 목걸이를 새로 갖고 오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 목걸이가 카밀라 앞에 놓였다.
“바로 착용해 보시죠.”
“그럴까요?”
해사하게 웃은 카밀라는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한 얼굴로 목걸이를 집어 들었다.
바로 오른손으로 말이다.
파지직!
“……!”
“어머.”
역시나 이번에도 붉은 돌은 카밀라의 손에서 어김없이 작은 스파크를 일으키며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이게 자꾸 왜 이러지?”
가볍게 고개를 갸웃거리는 카밀라와 달리 다니엘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그는 서둘러 다른 목걸이를 하나 더 들고 오게 했다. 엄청난 기부금을 내야만 간신히 구매할 수 있다고 하더니, 전혀 아깝지 않다는 기세다.
파직!
“이런.”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상황은 똑같았다.
“아무래도 전 이 목걸이와 안 맞나 보네요.”
“…그런 것 같군요.”
한 박자 늦은 다니엘의 대답을 들으며 카밀라는 무척 아쉽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태연한 겉모습과 달리 그녀는 저도 모르게 옆에 앉아 있는 아르시안의 옷자락을 슬며시 잡고 말았다. 손끝이 떨려 왔기 때문이다.
‘미친!’
역시 이 붉은 돌, 영혼을 빼내는 것과 관련이 있는 거다!
‘정말인 거야?’
정말 여기 교황청 인간들도 그것들과 다 관련이 있는 거야? 나에게 이 돌을 줬다는 건 나도 결국 타깃이라는 뜻?
카밀라는 아르시안의 옷자락을 더욱 꼭 쥐었다. 지금 뭔가 잡고 있지 않으면 표정이 무너질 것 같아서.
“…….”
그녀의 미세한 떨림을 아르시안도 바로 느꼈다. 하지만 그는 카밀라에게 왜 그러냐고 묻지 않았다.
또한 그녀의 떨림의 원인으로 보이는 다니엘을 향해 살기도 내뿜지 않았다.
그저 처음 모습 그대로 단호한 눈빛으로 상대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고 살필 뿐이었다. 조금의 허튼짓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이.
“조만간 제가 새로운 목걸이를 제작해 찾아뵙겠습니다.”
“그럼 저야 감사하죠.”
카밀라는 끝까지 짓고 있던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멈칫!
하지만 밖으로 향하던 그녀의 걸음이 이내 뚝 멈췄다.
모든 걸 확인한 지금, 당장 이곳을 떠나고 싶었지만 발걸음이 도통 떨어지지가 않았다.
결국 그녀는 다시 뒤돌아 다니엘 신관과 마주했다.
“다니엘 신관님.”
“네, 영애.”
“괜찮으면 제가 그 아이들을 좀 만나 볼 수 있을까요?”
“아이들이요?”
“이번에 오를레앙 자작가에서 발견된 그 아이들이요. 이곳에서 치료받고 있다고 들었어요.”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신전이 그것들, 영혼을 빼내는 이들과 관련이 있는 걸 알게 된 이상 아이들이 무사한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제대로 치료는 받고 있는 건가? 정말 신경 써 주고 있는 거야?
‘면죄부까지 팔던 놈들이잖아.’
혹시 모를 일이다. 자신들의 죄가 발견될까 아이들을 일부러 방치하고 있을지도.
생각해 보니 일반 신전도 아니고 바로 교황청에 아이들을 데려온 것도 좀 이상하지 않나? 듣기로는 교황이나 대신관이 직접 신성력을 써 주고 있는 것도 아니라던데?
“흐음.”
카밀라의 말에 신관 다니엘이 의외라는 눈빛을 했다. 그 시선에 카밀라는 옅은 미소를 머금으며 말을 이었다.
“도울 일이 있으면 돕고 싶어서요. 저희 상회나 가문의 힘을 모두 쏟아부어 치료법을 찾아볼 생각입니다.”
“그러신가요?”
다니엘의 입가에 다시 미소가 걸렸다.
“큰 도움이 되겠군요.”
“그래서 아이들을 한번 봤으면 해요. 상태가 어떤지 눈으로 직접 봐 두면 도움이 될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다니엘 신관은 바로 카밀라를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직접 안내했다.
애초에 치료법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꺼릴 것이 없었다. 그녀가 아이들을 직접 본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지진 않을 테니 말이다.
그것도 그럴 것이 오를레앙 자작에게 그 액체를 은밀히 구해 준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다. 그렇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
‘해독제 따위는 없어.’
“여깁니다.”
“……!”
잠시 후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들어선 카밀라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행동도 할 수가 없었다.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참아 내는 게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아이들이 지금껏 저 모습으로 계속 있었다는 거야?
“으… 흐윽… 으으…….”
“흐… 으으…….”
두 아이는 제대로 눕지도 못한 채 처음 발견된 모습 그대로 신음과 울음이 뒤섞인 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소리를 내는 것조차 힘에 겨운 듯 그 소리가 무척 가늘고 구슬프다.
“치료……!”
치료법은 정말 없는 거냐는 질문을 하려던 카밀라는 그 말을 꿀꺽 삼켰다.
아이들이 있는 지금 여기서 이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아픔이고 절망이 될 테니까.
하지만 다니엘은 이미 그녀가 무엇을 묻고 싶어 하는지 알아챈 듯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그나마 신성력으로 생명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오를레앙 자작이 쓴 액체로 인해 장기까지 굳어져 가고 있는 아이들은 신관들이 써 주는 미약한 신성력에 간신히 숨만 쉬고 있는 처지였다.
[야! 정신 차려!]
그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에 보았던 그 사제 귀신이 아이들 옆에 딱 붙어 서서 외치고 있었다.
[이대로 죽으면 억울하잖아! 악착같이 살아야지!]
…동감이다. 이대로 죽는 건 너무 억울하다.
[X 같은 것들! 당장 신성력 제대로 안 써? 너희들 지금 이 아이들 그냥 죽게 내버려 두려는 거잖아!]
…죽게 내버려 둬?
“하.”
카밀라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어이없는 눈빛을 다니엘 신관에게 보냈다.
그가 왜 그러냐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짓는 모습에 다시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역시 예상이 맞았던 건가? 이 새끼들, 저 아이들을 살릴 생각이 전혀 없는 거지?
[내 힘만 제대로 쓸 수 있다면… 젠장!]
예상치 못한 말에 카밀라의 눈이 동그래졌다.
당신, 지금 뭐라고 한 거야?
‘힘?’
자신이 가진 힘? 순간 카밀라의 눈이 번뜩였다. 그녀는 곧장 아이들을 살피는 척하며 사제 귀신의 곁으로 다가갔다.
“정말 아이들을 살릴 수 있어요?”
[……?]
카밀라의 나직한 물음에 사제 귀신이 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카밀라가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말을 건 거라 여긴 거다.
그러다 카밀라의 시선이 자신에게 정확히 향해 있는 걸 깨달은 그녀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설마 지금 내가 보……!]
“보이니까 대답이요.”
카밀라는 너무도 식상한 반응을 중간에 자르며 대답을 재촉했다. 정말 아이들을 구할 방법이 그녀에게 있는 건가?
사제 귀신도 카밀라의 뜻을 바로 파악한 듯 다른 말은 더 이상 하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 역시 다시 아이들에게로 향했다.
[신성력에 반응을 해.]
“반응은 하지만 별다른 효과는 없잖아요.”
[저것들의 저급한 신성력을 말하는 게 아니야.]
교황을 아이라고 부를 때부터 보통 사제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가진 신성력은 뭔가 다른 걸까?
‘뭐, 아무려면 어때?’
지금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니지 않은가. 두 아이를 바라보는 카밀라의 눈빛이 다시 무겁게 가라앉았다.
당장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 같은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절로 주먹이 꽉 쥐어졌다.
‘썩을 놈.’
새삼 이미 죽어 사라진 오를레앙 자작의 영혼을 어떻게든 찾아 잘근잘근 밟아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들어와요.”
[뭐?]
갑작스러운 말에 사제 귀신은 무슨 뜻인지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잔뜩 미간을 찌푸리는 그녀에게 카밀라는 다시 말했다.
“제 몸 빌려 드린다고요.”
[무슨……!]
물론 안다. 그녀의 신성력이 자신의 몸을 통해서도 발휘가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아이들이 저러고 있는데 다른 생각은 더 할 수가 없었다. 1%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해 봐야지 않겠어?
“들어오라고요.”
[…….]
살짝 벌어진 입을 다물지도 못한 채 잠시 멍하니 카밀라를 바라보던 사제 귀신은 곧 한 걸음 가까이 발을 내디뎠다.
* * *
“영애께서 마음이 참 따뜻하시군요.”
아이들 곁을 연신 맴돌며 떠날 줄 모르는 카밀라의 모습에 다니엘의 얼굴에 습관처럼 미소가 걸렸다.
그의 말을 곁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아르시안의 생각은 완전히 달랐지만 말이다.
‘저건 또 뭐야?’
그의 눈에는 보였으니까. 카밀라가 검은 연기로 보이는 죽은 영혼과 대화를 하는 모습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다른 이들이 그녀 곁에 가까이 가지 못하게 길목을 차단했다.
살벌한 분위기로 서 있는 그를 겁 없이 지나쳐 카밀라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저희도 무척 안타깝지만 다른 방법이 없……!”
하소연하듯 말을 내뱉던 다니엘의 음성이 순간 뚝 끊어졌다. 그의 얼굴에 순식간에 경악이 떠오른다.
그건 방 안에 대기하고 있던 다른 사제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이건!”
화아악!
방 안을 가득 채우는 환한 빛. 엄청난 신성력이다.
그 신성력을 내뿜고 있는 이를 바라본 사람들은 다시 한번 경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