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네 집에 현재 얹혀사는 이에게 꼭 전해. 뒤통수치는 게 특기인 늙은 여우를 조심하라고.”
…역시 궁은 자신과 안 맞는 것 같다. 왜 올 때마다 이런 일이 생기냐고.
쟈비엘라 황비의 시선 따윈 전혀 개의치 않은 채, 본인이 하고 싶은 말 다 한 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빙긋이 웃는 그가 그렇게 얄미워 보일 수가 없었다.
“저흰 이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능글맞게 인사까지 건넨 그가 자신의 손을 잡고 그대로 정원을 걸어 나갔다.
‘하아.’
그래도 혼자 남겨 두고 안 가는 걸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나? 저 서늘한 분위기에 혼자 남아 있었으면 어쩔 뻔했어?
에드센 황태자의 손에 이끌려 걸음을 옮기는 카밀라의 입에서 연신 한숨이 새어 나왔다.
* * *
“특별히 아프신 곳은 없는 듯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툭하면 쓰러지나? 다시 진료해 봐.”
에드센 황태자는 황궁 소속 치료사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의 말을 바로 반박하는 에드센 황태자의 말에 60대 치료사의 얼굴에 난감함이 어렸다.
“전체적으로 많이 지치신 듯하지만, 몸이 딱히 좋지 않은 곳은 없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카밀라는 어색한 미소를 흘렸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조금 전 에드센 황태자의 손에 이끌려 정원을 나선 카밀라는 곧장 어딘가로 향해야만 했다. 도착한 곳은 바로 황실 치료원이었다.
“저희 가문에도 치료사가 있습니다만.”
“황궁 치료사만큼은 아니지.”
“그건 그렇겠지만…….”
치료사에게 진료를 받는 것이야 매우 익숙한 일이다.
당연하다시피 이번에 수호의 검을 지키면서 또 쓰러졌다. 제노가 몸에 들어왔다 나간 후 어김없이 며칠 침대에 누워 고생해야만 했고.
그런 일이 최근에 잦다 보니 안 그래도 소르펠 공작과 다른 이들 역시 자신의 몸 상태를 유독 신경 쓰고 있었다.
한두 번도 아니고 툭하면 쓰러져 골골거리니 몸에 이상이 있는 게 아닐까 싶은 거다.
아마도 에드센 역시 같은 생각이었던 듯, 기회가 생기자마자 이렇게 치료실로 자신을 데리고 온 것이다.
“피로에 좋은 약을 지어 드리겠습니다.”
안 지어 주셔도 되는데.
안 그래도 지금 먹고 있는 약만 수십 개다. 소르펠 공작이 몸에 좋다는 약을 있는 대로 다 구해 와서.
“고마워요.”
하지만 이런저런 상황을 설명하기 귀찮았던 카밀라는 그저 고맙다는 인사로 이 상황을 마무리했다.
“흐음.”
그러나 에드센 황태자는 여전히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약을 짓기 위해 밖으로 나가는 치료사를 못마땅한 얼굴로 바라봤다.
“정말 아픈 곳 없는 건가?”
“아주 건강하답니다.”
휘익!
순간 자신의 손목을 낚아채는 그의 행동에 카밀라의 동공이 커졌다.
“전보다 더 야윈 것 같은데.”
“요즘 일이 많아서요.”
그러니 이 손 좀 놓지? 카밀라는 힘을 줘 손을 뺐다. 그런 그의 눈빛이 여전히 못마땅하다.
“일을 좀 줄이는 건 어때?”
“그럴 수 있는 일들이 아닌지라.”
“난 너무 야윈 여자는 싫던데.”
…뭐라는 거야? 그 말을 왜 나한테 하는 건데? 어느새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약은 저택으로 보내 주도록 하지.”
“네, 잘 먹을게요.”
“바로 귀택하나? 데려다주지.”
“아뇨, 괜찮습니다. 마차가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안 기다리고 있는데.”
“네에?”
“내가 돌려보냈거든. 진찰받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아서.”
아니, 그걸 왜 네가 멋대로 정하는데!
“그러니 내가 데려다준다고 하잖아.”
잠시 황당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던 그녀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아카데미로 가야 해요.”
클럽 활동이 있는 날이다. 너무 오래 빠져서 오늘은 꼭 참석할 생각이었다.
“가지.”
앞서 치료실을 나서는 에드센 황태자를 지그시 바라보던 카밀라는 조용히 그의 뒤를 따랐다.
* * *
달칵!
봉사 클럽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던 카밀라는 의아한 눈빛으로 한 곳을 바라봤다.
아르시안과 라일라가 뭔가를 아주 열중해서 보고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도 듣지 못할 정도로 초집중 모드였다. 뭐 하는 거지?
“이건 어때요?”
“좋아. 저것도.”
“이건 안 돼요!”
…언제 저렇게 친해졌대?
머리를 맞댄 채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모습에 카밀라는 잠시 그들을 지켜봤다.
“저도 이건 어렵게 구했다고요.”
“다시 현상하면 되잖아.”
“이건 제가 원본 영상을 들고 있는 게 아니……!”
“뭐 해? 둘이?”
“꺄악!”
그제야 두 사람이 급히 고개를 돌려 카밀라를 바라봤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언제 온 거야?”
“방금.”
라일라는 서둘러 뭔가를 빠르게 치웠다. 저거 사진 같은데? 뭐가 저리 많아?
“무슨 사진이야?”
“아무것도 아니야!”
“아니에요!”
“…….”
그들에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서려던 카밀라는 멈칫했다. 동시에 손을 뻗어 자신이 다가가는 것을 막는 그들의 모습에.
“제가 그래서 여기서는 안 된다고 했잖아요.”
“그냥 나한테 다 주면 됐잖아.”
아르시안과 라일라가 다시 소곤거렸다.
욱신.
‘…어라?’
그런 두 사람을 말없이 바라보던 카밀라는 멈칫했다. 순간 가슴이 아릿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뭐지?’
뭔가 속이 울렁거리는 것도 같고, 갑갑한 기분도 들고…….
‘나 진짜 어디 아픈가?’
방금 황실 치료사에게 진찰받고 나온 길인데?
카밀라는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두 사람을 바라봤다. 어느새 그들은 보고 있던 것들을 다 치운 뒤였다.
“카밀라! 오랜만에 클럽실에서 마주하니 너무 좋아요!”
언제나처럼 환하게 웃으며 자신의 손을 잡고 방방 뛰는 그녀의 모습에 카밀라 역시 곧 미소를 지었다.
“다른 사람들은?”
“곧 올 거예요. 저와 아르시안 님이 할 일이 있어 먼저 왔거든요.”
“우리 언제 다시 보는 거야? 저거 아직 다 안 끝났……!”
“쉿, 쉿!”
아르시안의 입을 라일라가 급히 막았다. 나무라듯 그를 바라보자 아르시안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슬쩍 한발 물러섰다.
“…….”
카밀라는 그런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다시 아릿한 통증에 의아함을 느끼며.
“카밀라한테 들킬 뻔했잖아요!”
“시끄러워. 그러게 처음부터 그냥 다 달라니까.”
“와, 양심도 없어! 저도 이건 간신히 구했거든요!”
클럽 활동이 끝나고 아르시안과 라일라는 따로 만남을 가졌다. 아무도 없는 은밀한 장소에서.
그들이 마주 앉은 탁자 위에는 엄청난 양의 사진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그 사진 속 주인공은 바로 카밀라였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는 저도 엘리샤 님에게 받은 거라고요! 저도 두 번은 못 구해요!”
“엘리샤?”
그녀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아르시안의 미간이 바로 일그러졌다.
최근 사사건건 자신과 카밀라 사이에 끼어들며 방해하는 그녀의 행동에 그렇지 않아도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는 상태였다.
“정 갖고 싶으면 직접 가서 달라고 하세요. 원본 영상석은 그분이 들고 계시니까.”
…줄 것 같냐? 틈만 나면 카밀라에게서 떨어지라고 소리치는 녀석이?
“어쨌든 이건 안 돼요.”
“그럼 저거라도 줘.”
아르시안이 가리킨 건 작은 쿠션이었다. 카밀라의 얼굴을 자수로 놓은.
“이것도 안 된다고 했잖아요!”
라일라는 급히 쿠션을 품에 안으며 그를 살며시 노려봤다.
오늘 이 사태가 벌어진 것도 다 이 쿠션 때문이었다.
다른 이들이 오기 전까지 클럽실에서 홀로 수를 놓고 있던 라일라는 마침 소리 소문 없이 들어선 아르시안에게 딱 걸리고 만 것이다.
“백 골드 줄게.”
“필요 없어요. 저도 요즘 돈 잘 벌거든요. 우리 카페 사장님이 월급을 아주 빵빵하게 주셔서.”
“그럼 천 골드.”
헉! 천 골드라니. 무슨 쿠션 하나에……. 잠시 놀란 표정이 되었던 라일라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
“이건 돈이 문제가 아니잖아요! 안 돼요.”
“대체 되는 게 뭐야!”
“요거, 요거, 요거. 이렇게만 들고 가세요.”
“씨X!"
결국 그의 입에서 거친 말이 튀어나왔다. 물론 이미 그의 말투에 적응한 라일라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지만.
“싫으면 마세…….”
“누가 싫대!”
결국 라일라가 내민 사진 몇 장을 빠르게 챙기는 아르시안이었다.
* * *
아주 넓은 크기에 비해 방 주인의 성격을 보여 주듯 가구라고는 기본적인 것만 놓여 있어 삭막하기 짝이 없었다.
그 중앙에 쪼그리고 앉아 뭔가를 열중하고 있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아르시안이다.
“젠장!”
잠시 후 그는 성질을 있는 대로 내며 뒤로 나가떨어졌다.
“뭐가 이리 힘들어!”
그가 들고 있는 작은 쿠션에는 흐릿하게 카밀라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다.
라일라가 들고 있던 걸 뺏으려다 실패한 후 직접 만들기 시작했으나,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 제대로 수가 놓인 부분이 거의 없었다.
당장 쿠션을 집어 던지려다가도 카밀라의 얼굴이 새겨져 있는 걸 보곤 다시 조심히 내려놓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뭐 하는 거냐.”
“……!”
그 순간 들려오는 세프라 공작의 목소리에 아르시안의 온몸이 그대로 굳어져 버렸다.
세프라 공작의 시선이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쿠션에 향했다.
“마법사라는 녀석이 저리 손재주가 없어서야.”
“씨X! 손재주랑 마법이 뭔 상관이냐고! 왜 매번 손재주 타령이야!”
“어! 카밀라 누나다!”
그제야 세프라 공작의 손을 잡고 서 있는 리오의 모습을 발견한 아르시안이 움찔했다.
“설마 그딴 걸 그 아이에게 선물이라고 줄 생각은 아니겠지.”
“내 거야!”
저도 모르게 소리친 아르시안은 작게 욕설을 내뱉으며 이마를 짚었다.
“대체 왜 온 거야?”
“수놓느라 바쁜가 보군.”
“씨X!”
아이 앞에서는 최대한 욕을 삼가려고 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얼굴이 살짝 붉어지는 그를 뒤로한 채 세프라 공작이 자리에 앉았다.
나가라니까, 왜 앉아? 아르시안이 그런 그를 눈을 부릅떠 노려봤다.
“그 아이에게 친부가 나타난 사실은 잘 알고 있겠지.”
“하고 싶은 말이 뭐야?”
그 아이가 누구를 칭하는 것인지 아르시안은 바로 알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