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들 오시오. 먼 길 오느라 고생들이 많았소.”
페이블러 황제의 환영 인사에 에스크라 공작은 간단히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심드렁한 눈빛은 덤이다.
황제의 환영이 전혀 달갑지 않다는 뜻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함께 온 다른 이들이 다급히 황제에게 대신 말을 건네며 축하 말들을 쏟아 냈다.
“…….”
그러는 사이 에스크라 공작의 시선이 주변을 잠시 살피더니 이내 한곳에서 딱 멈췄다.
바로 카밀라가 있는 곳에서.
멍하니 서 있는 카밀라의 모습을 본 에스크라 공작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웃어?’
지금 웃은 거야? 이 상황에 웃음이 나오니?
자신이 당황하는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 키득거리는 에스크라 공작의 모습에 카밀라는 순간 열이 확 올랐다.
‘대체 왜 온 거래?’
당신! 그렇게 한가한 사람 아니잖아! 매일 바쁘다고 식사도 툭하면 거르던 인간이 여긴 대체 어떻게 온 거지?
“저분이죠?”
“맞아요!”
“저자가 바로 그라시아 제국에…….”
홀에 있던 모든 이들이 그에게 관심을 보였다. 그라시아 제국의 실질적인 권력을 쥐고 있는 그의 등장에 사람들의 눈빛에 열기가 피어오른다.
그런 이들 중에는 쟈비엘라 황비도 포함되어 있었다.
‘드디어 왔구나.’
자신의 살길은 저자뿐이었다. 오늘 그녀가 그렇게 오매불망 기다리던 인물이 바로 에스크라 공작이었다.
물론 안다. 저자로 인해 자신이 오랫동안 계획했던 모든 일이 물거품이 되었다는 것을 말이다.
자신이 밀던 그라시아 제국 1황자가 누구의 손에 죽었는지도 이미 들어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오랜 계획을 무산시킨 장본인, 에스크라 공작. 하지만 지금 그녀에게 가장 필요한 이 역시 그였다.
‘정치에 영원한 적 따위는 없는 법이지.’
그를 자신의 편으로 만든다면 더 이상 무서울 게 없었다. 그의 힘을 얻는다는 건 그라시아 제국을 등에 업는다는 말과 진배없다.
‘어떻게든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해.’
쟈비엘라 황비는 에스크라 공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음?”
하지만 그녀는 바로 걸음을 다시 멈춰야만 했다. 그가 먼저 누군가를 향해 다가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왜…….”
그가 향한 곳은 바로 카밀라가 있는 곳이었다. 그 모습을 본 쟈비엘라 황비의 얼굴에 의아함이 가득 담겼다.
‘왜 하필 저 아이에게?’
그녀는 예전부터 카밀라를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무시의 대상이었다는 게 정확한 말이겠지.
태생도 제대로 알 수 없는 것을 상대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최근에야 이리저리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있지만 그렇다고 천한 피가 어디 가겠는가.
‘그런데 왜?’
카밀라가 사신단으로 그라시아 제국에 간 적이 있으니 안면을 익혔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녀가 알기로 에스크라 공작은 고작 그 정도 친분을 두고 먼저 다가가 아는 척을 하는 이가 절대 아니었다.
방금도 봤지 않은가? 페이블러 황제 앞에서도 인사말조차 제대로 건네지 않던 그의 도도한 모습을 말이다.
“카밀라.”
하지만 다음 순간 다정히 카밀라의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모습에 다들 놀란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쟈비엘라 황비 역시 눈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뭐지?’
저 두 사람 사이에 뭔가 있는 건가?
“오랜…….”
사람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마저 안부 인사를 건네려던 에스크라 공작은 끝까지 말을 다 잇지 못했다.
스윽.
카밀라 앞을 순식간에 막아서는 세 사람으로 인해.
“아, 아버지?”
소르펠 공작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 루드빌과 라비의 모습 역시 볼 수 있었다.
세 사람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카밀라의 앞을 완전히 막아선 채 에스크라 공작을 지그시 응시했다.
“…….”
에스크라 공작 역시 그런 세 사람을 조금 전 페이블러 황제를 바라볼 때처럼 아주 무심한 눈빛으로 응대했다.
그런 네 사람이 풍기는 공기가 너무도 무거워 주변에 있던 모두가 급히 숨을 죽였다.
‘나 도망가면 안 될까?’
카밀라는 머리가 아파져 오는 걸 느끼며 미간을 꾹꾹 손으로 눌렀다. 이 상황을 대체 어떻게 조용히 해결하…….
“아빠가 딸 좀 만나겠다는데 방해꾼이 생각보다 많군.”
…야! 이 미친 인간아!
그녀의 고민이 우습다는 듯 바로 폭탄을 투척해 버리는 에스크라 공작의 말에 카밀라는 입을 쩍 벌렸다.
반면 그는 더욱 기운을 싸늘하게 내뿜는 세 사람을 보며 그저 히죽 웃을 뿐이었다.